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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그들이 말하는 백만학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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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었다면, 그랬더라면 이 땅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민주화의 열망이 극점에 다다랐던 그때, 6·29라는 항복선언이 발표되기 직전 그가 떠났더라면 진정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변혁되었을까.
모든 건 80년대 당시 학번들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심정적으론 동감하면서도 합류할 여건이 안 되었던 ‘긴쪼(긴급조치)"세대, 4·19와 6·3 주역들, 또한 일반 시민들의 동참이 없었다면 과연 독재타도의 실현이 가능했을지…, 아마도 불가능했거나 훨씬 뒤로 연기되었을지도 모른다.
말 잔치뿐인 선거철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백만학도’란 단어를 전리품인 양 입에 달고 다니던 옛 얼굴들이 갑자기 이름 알리기에 분주해졌다. 그들이 누군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느 학교 출신이고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또렷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백만학도는 그들만의 의미일 뿐, 말없이 시대적 요청에 충실했던 이들은 따로 실재(實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아무런 보상도 원치 않고 개인의 영달도 바라지 않으며 우리는 싸웠다. 지금의 3,40대들 모두가 그 역사 현장의 생생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386’ 또는 ‘475’라는 숫자로 대변되는 수백만의 당시 학번들은 지금도 두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특정인의 성공이나 대안도 없는 용서를 위해서 우리가 피땀과 눈물을 흘렸던 게 아니라는 것, 그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분명하게 전하고자 한다.
역사는 결코 몇몇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모두의 인생 기록이라는 사실. ‘백만학도’라는 용어는 그들의 이력서에 장식되는 옛 기억의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이겨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단어의 실제 주인공인 것이다.

인용한 문장은 16대 총선을 몇 달 앞두고, 어느 일간지 칼럼에 기고했던 본인의 글이다. 글이 나간 뒤 여러 친구와 선후배들의 많은 연락을 받았다. 해야 할 말을 잘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속시원하게 지적했다’는 스승님의 격려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기고문을 여기에 다시 언급하는 내 마음이 진흙탕 바닥에 넘어진 양 불유쾌하고 씁쓸한 까닭은 무엇일까.
신조어 만들기를 좋아하는 언론에서 갖다 붙였을 게 분명한 ‘386’이란 숫자는, 속칭 ‘30대 나이로써 80년대 학번인 60년대 생’들을 일컫는 의미로 굳어져 버렸다. 허나 60년대 출생 중에서도 40대로 들어선 이가 늘어가는 현실이니, 그 용어도 이젠 새로운 말로 대체되거나 용도 폐기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 연령들이 공유하는 공통분모는 과연 무엇일까. 단지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투쟁했다는 부분에만 한정시킬 수 없는 다양한 그림자가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 펌프로 끌어올린 지하수에 등목하고, 고무신과 돌멩이 몇  개만으로 하루의 놀잇감이 가득 차곤 했던…. ‘타이거 마스크’와‘마린 보이’를 볼 수 있던 아이는 그나마 TV가 있는 마을에 살았다는 혜택이자 증거였다.
집안 재산을 조사할 때 ‘전화’ ‘라디오’가 있는지를 묻던 시절 역시 그때였다. 전화번호 국번도 두 자리, 김밥과 바나나는 가을 운동회 때만 먹을 수 있는 특별 메뉴였고, 자가용 차가 있는 집 아이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난로 위에 가득 쌓아둔 도시락을 쉬는 시간마다 뒤바꿔 놓던 당번들. 혼분식 정책 때문에 보리쌀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일일이 검사하던 선생님들. 칼라로 본 것 같은데 흑백 화면이 분명했던 ‘마징거 제트’. 극장에 걸린 ‘로보트 태권 브이’와 ‘마루치 아라치’ 간판에 이끌려 부모를 조르던 꼬마들. 나쁜 로봇을 박살내고 태권 브이가 지구를 구해내면, 객석에 가득찬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박수를 보냈었다.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의 어린이 월간지를 탐독하고, ‘캔디’라는 만화에 열광하던 그 즈음,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이라 믿었던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감당 못할 충격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은 무조건 ‘박OO’ 씨였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을 신문 기사 그대로 믿으며,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우리 곁에는 서서히 메케한 최루탄 냄새가 익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교복과 두발 자율화’라는 당근이 던져지고, 요즘 학생들이 알지 모를 ‘채변 봉투’에 골머리 썩히던 나날. 방송 화면이 칼라로 바뀌고 ‘빽판’의 지직거리는 팝송과 대학가요제 노래가 가장 좋게 느껴질 무렵, 속칭 ‘386’들은 거대한 물결처럼 대학생이 되어갔다.
왜 대학까지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는지, 현실이 얼마나 왜곡됐고 어느 정도나 틀에 박힌 교육을 받아왔는지,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를 전율처럼 깨닫게 해준 건 한 편의 ‘광주 학살 비디오’였다.
전태일이 왜 분신했으며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 민족에겐 무엇인지, 꼬리 달린 털복숭이 빨갱이였던 북한의 정체가 무엇이며, ‘구국(救國)의 영도자’라던 집권자 실체를 사실대로 바라보게 된 순간부터, 그런 상황에 맞게 살아야 할 대학생의 의무와 운명은 피할 수 없는 절대가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왜 학생과 노동자들이 구타당하고 고문으로 신음해야 하는지, 총칼을 앞세운 자들이 신성한 교회까지 유린하고 여성들을 성고문하며, 원인불명의 실종자가 왜 늘어가는지를 밝혀낼 수 있는 건 시대의 운명과 함께할 젊은이들밖에 없었다. 노동자만으로 힘겨운 싸움을 할 수 없고, 기성세대의 발언권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노학(勞學)연대 투쟁은 어두운 시대의 횃불로 타올랐던 것이다.
기나긴 투쟁사를 풀어놓을 필요까진 없다. 구구절절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행간에 감춰진 의미를 공유할 이들은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뒤 지금까지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뛰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백만학도’이다. 그 한 단어의 뉘앙스만 가지고도 밤새워 술잔을 주고받으며, 가슴을 털어낼 사람들 또한 그들인 것이다.
‘백만학도’란 말을 앞장서서 외쳤던 당시의 몇몇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방침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 바로 우리였고, 독재정권의 검거망을 피해 그들의 안전을 온몸으로 책임졌던 이들도 ‘백만학도’였던 우리들이었다. 때론 여장(女裝)을 하고 남장(男裝)도 하며, 그들 대신 검거되면서까지 해방의 그날을 꿈꾸었던 이들….그들은 지금도 말없이 자신의 삶에 충실히 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유세나 구호도 없이, 그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면서. 총선 전 어느 날 길거리 유세가 한창이던 한 후보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다가와 깍듯이 인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늦은 밤 모임을 통해서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 했던 옛 얼굴들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들에게서 예전과 달리 때묻은 눈빛만을 확인하게 된 내 관점이 잘못이었을까? 당락은 둘째치더라도, 최근의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들의 눈빛을 곱씹어 볼 수밖에 없는 심정이 내내 일손을 멈추게만 만들고 있다. 힘없는 손길로 총선 전에 기고했던 짧은 문장을 다시 꺼내 읽는 내 마음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진흙탕 바닥에 넘어진 양 불유쾌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그 인간들, 원래부터 그랬잖아.’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내뱉은 한마디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끝까지 믿고 싶다 대답하던 나 역시 마지막 심지마저 꺼져 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 허탈감은 일반 국민 모두가 마찬가지였겠지만, 소리없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백만학도’들에게는 지나간 젊음 자체가 붕괴되는 충격으로 남겨지는 것이었다.
전쟁에선 살아남은 장수가 영웅이 될진 몰라도, 이름없이 쓰러져 간 한명 한명의 병사가 그 영광을 만들어 준다.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승리를 위해 싸웠던 병사들. 그들은 목숨으로 구해 준 장수가 변절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 줌의 흙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육신과 유골 조각을 뒤늦게나마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닌데도, 자기들만이 적임자라 떠들어대던 입놀림의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까닭은 기대가 컸던 탓일까?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또 한 번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생각할 수 있다면, 이젠 나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이 있지 않은지를 살펴보아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늘 잊고 지내지 않았던가. 민족의 학살자가 보살인 양 전국을 순회하는 걸 보면서도, 무감각하게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글/ 채지민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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