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용 화장실부터 일상적 삶을 되찾기까지 > 문화


장애우용 화장실부터 일상적 삶을 되찾기까지

동정은 싫다 에필로그 - "장애우 인권운동이 미국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본문

 그 동안 " 동정은 싫다 (No Pity) " 연재를 지켜보고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에는 미국 장애우운동사인 " 동정은 싫다 " 연재가 장애계에 던진 의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다음으로 기획하고 있는 번역연재물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장애우용 화장실이 만들어지기까지

  " 뉴욕 - 여성단체들은 뉴욕시에서 공중화장실을 설치하는데 있어서 여성용을 설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 뉴욕시의 공무원들은 남성용에 비해 더 넓은 여성용 화장실이 마약을 주사할 곳을 찾는 마약환자들과 잠잘 곳을 찾는 홈리스들의 주목을 끌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는 시도 공중 화장실을 설치하는데 있어서 남성용만을 설치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미국인법(이하 ADA)" 이 전극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그 때 뉴욕시가 장애 활동가들을 얼마나 격분시켰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위 글에서 "여성" 이라는 말을 "휄체어사용자" 로 대치한다면.
  장애우들이 공공 서비스로부터 불법적으로 제외되고 있다는 것을 항의 했을 때, 그들은 거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많은 건강한 (able-bodied) 사람들의 소위 " 공공의 선 " 을 위협하는 일부 휄체어사용자들의 얄팍한 이기심을 꾸짖기까지 했다. 그 언론사에서는 그런 환경을 휄체어 사용자들의 권리에 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상식이라는 것과 시민권이라는 것을 비교, 검토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장애활동가들에게 이런 식으로 장애우를 배제하는 것은 마치 시에서 공중 화장실을 설치하고 나서 각각에 " 백인전용 " 이라고 걸어놓은 것과 같이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장애우들이 여기에 불평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접근권을 박탁당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ADA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1992년 6월이전의 넉달 동안의 준비시기를 거쳐서 뉴욕시가 새로운 화장실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세계의 일반 화장실옆에 휄체어가 접근 가능한 커다란 화장실 세계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애우들에게 여전히 불편은 남았다. 이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 공무원이 업무시간 중에 카드키를 가지고 와야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마약환자와 홈리스들이 이 화장실에 머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찬가지 이유로 난방이 되지 않고 세면대도 없었다. 장애활동가인 제임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음과 같은 단순한 것을 주장했다. " 화장실은 모든 사람이 사용 가능하게 지어져야 한다. 이런 차별을 두는 것은 분리하여 불평등이다 " 라고 그녀는 주장하였다.
의회가 소수의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사회는 이와 반대로 소수인들의 권리가 어떻게 주어지고 이러한 권리를 그들이 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롭게 조직된 소수집단인 장애우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역설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평등을 위한 많은 새로운 돌파구들이 나타났다. 통합을 약속하고 있는 ADA는 흑인, 여성 그리고 민족이나 종교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1964년의 법 이래로 다른 시민권적 법률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흑인들은 국민들의 태도를 먼저 변화시켰으며 그후, 시민권적 법률을 획득해갔다. 반면에 소위 드라마틱한 자유의 행진, 교회폭파, 혹은 "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 는 내용으로 대중에 호소하는 연설문을 통하지 않고도 장애우들은 이러한 권리를 획득했다. 이제 장애우들은 사회가 자신들에게 권리를 제공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무가치한가 순위 매기기

  이러한 의문은 공중화장실에 대한 접근권과 같은 작은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건의료와 같은 긴급한 사회적 이슈에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ADA가 완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뉴욕의 화장실들이 세워지기 시작한지 불과 몇 주 후에, 이 법률을 주장했던 부시 행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을 재디자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헬스 케어 혜택을 제공하는 계획의 하나로서 오레곤주는 의료보호(Medicaid)를 12만명에 달하는 빈민들에까지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하려면 예산을 더 확보한 상태거나 혹은 다른 부분에서의 축소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대해 오레곤주는 의료 서비스를 제한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았다.
  총 709가지 품목에 대해서 치료 필요성과 그 금액에 즉 588번째 품목부터는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이러한 배급계획이 효과를 가지려면 오레곤주는 연방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제한을 두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장점도 갖고 있었다. 연방정부가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3천7백만명이 미국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동안 너무나 소극적이었는데, 바로 그 때 실시된 아주 참신한 실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레곤주의 계획은 예산만을 놓고 이러한 아이템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잔혹하고 일그러진 것이었다. 또 이것은 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존에 받고 있던 치료비를 삭감시키면서 소위 범위를 넓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오레곤 주의 담당자는 이 같은 제한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극반자를 위해서 예산을 집행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의료보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장 빈곤한가 보다는 어떠한 치료가 사람들의 삶을 유지 발전시키는데 바탕이 되는가에 제한을 둠으로써 이 체계의 논리를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레곤주의 계획은 특히 장애우 의료에 있어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1992년 초에, 중앙부처 담당공무원들은 이 계획을 지지했으며, 부시대통령도 훌륭한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3월에 부시는 오레곤의 계획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부통령인 로버트 파웰이 " 만약 그 계획이 내가 태어날 때 시행되고 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 " 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클러치와 휄체어를 사용하는 파웰이 생후 5개월일 때 악성종양이 허파와 척추를 침입해 생명이 위독했었다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몇몇 의사들은 그를 고칠 수 없다고 했지만, 휄체어 장애우였던 한 의사는 이 아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이 "희망없는" 아이를 기꺼이 치료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이다. 파웰은 " 만일 오레곤 주의 논리대로라면 가망없는 암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을 중단했을 것" 이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부시 또한 백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린 딸을 치료해줄 의사를 백방으로 찾아 헤맸던 적이 있기 때문에, 백악관의 법률자문인 보이든 그레이에게 오레곤주의 계획이 ADA법을 위반하는 것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레이와 그의 직원들은 오레곤주가 상정한 순위가 장애우의 삶은 일반인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을 반영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어 외상성 뇌손상의 경우는  이러한 제한선의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손상을 입은 후에도 오랜 동안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의료보장과 ADA

  오레곤주는 이 리스트를 만들면서 질병과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화조사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 조사는 슬프고 동정할만한 삶이라는 것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정형을 만들면서 순위를 매긴다고 백악관측은 주장했다. 연방정부에서 주장하듯이 적어도 1백20개의 상황과 그들의 치료에 대해서는 다시 순위를 매겨야 하는 것이다.
  유명한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ALS가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는 했지만, 오래 살고 있으며 아주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ALS등이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며,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고려돼야 하는 것이다. 소위 ALS에 걸린 사람 모두를 단념하는 것은 의료적인 진단에 기초한 차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장애우로서의 삶은 비참한 것이고 의료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사회적 통념에 기초한 것이다.
  오레곤 주의 리스트가 ADA와 충돌되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어떤 환자가 간에 문제가 있을 경우 간장의 이식수술에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만약 그 환자가 5년, 10년, 혹은 20년 전이건간에 상관없이 과거에 알코올중독이나 약물남용 등이 있었다고 해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레곤주의 리스트 중 상당 부분은 장애우들의 삶은 가치가 절하된다는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조산된 아이에 들어가는 돈은 25만불, 혹은 그 이상이다. 그러나 아이가 조산아로 태어날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줄일 수 있는 관리는 불과 몇백 달러 정도이다. 따라서 오레곤주는 예방을 강조했으며, 태아기의 관리에 높은 순위를 매기고 있었다.
  그러나 총 709개의 것 중에서 708번째 순위가 매겨져 있는 것은 23주 이전에 태어났거나 18온스(약 560g)이하의 체중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살리는 것이었다. 오레곤주의 한 공무원은 저자에게 이렇게 낮은 순위가 매겨져 있는 것에 대해 " 이건 의사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이런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의사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고 이야기했다.
  사실 그 아이들의 생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이런 순위를 정하는 것에 대해 결정하기 불과 몇 주전에, 자스차 빌라마르라는 건강한 아이가 5개월간의 치료를 마치고 마이애미 병원을 떠났다. 22주, 15온스(약 470g)의 몸무게를 가지고 태어났던 그 아이가, 의사들과 정부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현재의 의학 기술과 새로운 약들은 이렇게 조산된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연방정부는 오레곤주에게 그러한 순위를 재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ADA와 장애우들은 이에 대해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어려운 정치적 합의의 산물인 오레곤주의 계획을 단지 자신들의 법률적인 자비심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ADA의 제창자들만 남게 됐다 "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비판했다. " ADA는 Big Brother의 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 "며 뉴욕타임즈는 " 획기적인 의료계획, 탈선되다"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장애에 대한 편견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행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ADA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사회를 변화시키고 편견의 자취를 날려버리기 위한 법률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 초기의 시험이었다. 대부분의 장애우들조차 이 법률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ADA는 다른 장애우관련 법률과 비슷하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법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장애우들이 노동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사회 생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건물에 휄체어 램프를 설치하도록 하는 것이 이 법인것처럼 보였다. 화장실부터 헬스 케어까지의 모든 정부 서비스들이 장애우들에게도 동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는 훨씬 더 중요한 제3의 부분이 간과되었던 것이다. 동정과 다르게 권리는 모든 것에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오레곤주의 변경된 계획이 1994년에 효력을 가져왔다. 그러나 제한선을 두는 것은 계속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ADA, 그 거센 변화의 물결

  ADA가 제정되기 바로 전까지 포스터에 담긴 불쌍한 아이들과 장애우의 이미지는 동일시되곤 했다. 1991년의 루이스 해리스와 동료들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인들 중 92%는 중증장애우를 만났을 때 놀라게 된다고 답했으며, 74%는 동정심을 느낀다고 했다. 47%는 "그 장애우에게 일어났던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것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16%는 "장애우들이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에 화가 난다 "고 했다, "장애우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분노를 느낀다는 사람도 9%나 됐다.
  반면 단지 18%의 사람들만이 ADA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장애우들의 최고 이슈가 건강이나 동정이 아니라 존중 혹은 차별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장애우들에게 ADA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 사이에 자신들의 삶에 퍼져 있는 무기력과 동정의 메시지를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ADA는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탈출시켜줄 일종의 면허증이었다.
  의사인 리차드 에들리히는 1991년11월, 버지니아 대학이 새로운 시민권적인 법률에 맞추기 위해서 캠퍼스를 접근 가능하도록 바꾸는 계획을 통과시켰으며, 준비중에 있다고 대학직원이 이야기해 주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ADA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에들리히는 매년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자신의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것을 학교측에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자 학교측은 접근이 가능한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나자 심해진 복합경화증 때문에 전동휄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1987년 이래로 졸업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자 에들리히와 다른 휄체어사용자들이 잔디밭 아래에서 개최되는 졸업식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학교측은 임시 램프를 구입했다.
  대학교 교직원들은 단지 법률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에들리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과거 대부분의 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누군가에게 "요구" 를 하거나 모든 일에 참여하는 것이 권리가 아니라 "부담"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측이 그가 이러한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한 이래로 그의 사고방식은 변화해 나갔다. 그는 뉴욕시티 고등학교에 있을 조카 졸업식에도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교장 선생님은 경멸적인 말투로 계단위로 에들리히를 올려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대꾸하자 그는 새롭게 적용되는 ADA의 편의시설 관련 부분을 가지고 법원에 고소했다. 법원이 고등학교가 즉각적으로 램프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음은 물론이다.
  에들리히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와 음식점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변화하고자 하지 않거나 승낙하지 않는 곳을 발견할 때마다 고소했다.
  이것은 에들리히가 워낙 지독한 사람이거나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완전히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ADA는 "핑계를 계속 만들어가거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 나를 도와주세요 " 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 대신에 삶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 " 이었다. 
  ADA가 완전히 효력을 발휘하게 된 6월에 덴버시 공무원들은 1978년 처음으로 시위를 벌였던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며 ADAPT에게 경의를 표했다. 19명의 장애우들이 교차로에서 버스를 가로막고 앉아서 24시간 동안 버스에 휄체어리프트를 달아 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바로 그 날의 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ADAPT가 덴버에서 환영을 받기 불과 몇 주 전에 이 집단의 성원들은 개별 지원서비스의 확대와 시설 예산 감축을 요구하며 보건복지를 담당하는 루이스 설리반 장관의 연설을 중단 시켰다.
  몇 달 후인 10월, ADAPT는 빌 클리턴의 대통령 유세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클린턴은 "나는 모든 개인들은 개별적인 배려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고 말하며 개개 장애우에 대한 지원 증가를 중점으로 한 국가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클린턴은 각 장애우들이 소비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클린턴의 이러한 약속은 정치가들이 장애우 유권자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존경의 표시였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낡은 장벽을 부수지는 못했다. 장애우의 능력은 언제나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호켄베리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했다. 저널리스트인 존 호켄베리는 브로드웨이극장에서 쫓겨나면서 이러한 명제를 발견했다. 그는 60불을 주고 표를 구입하면서, 자신도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그러나 극장 매니저는 그가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거절했다. "화재가 났을 때 당신은 위험한 존재" 라고 불평하면서.
  ADA가 제정되기 전에는 모든 극장주인들이 이러한 판단을 하는데 어떠한 제재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호켄베리는 ADA에 편의를 도모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용해서 극장에 대한 편견소송을 제기했으며, 이것은 두 달 안에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호켄베리에게 이러한 경험은 일종의 " 데뷔 " 였다. 대부분의 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러한 모욕과 차별을 매일 받아왔다. 심지어 전국 라디오방송국에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장애우들처럼 그는 개인적인 성취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신이 받아왔던 제한과 경멸을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 나는 나를 정의하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배경과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고 저널리스트인 메리 존슨은 설명했다.
  호켄베리는 다른 장애우처럼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 평가 절하 " 의 불모로 잡혀 있었다. 극장에서 호켄베리는 "극장의 매니저는  내가 극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내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절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백만의 다른 장애우들도 또한 이러한 현실에 화가 나있다. 그리고 호켄베리나 에들리히와 같이 자신과 같은 장애우들이 하나의 계급이고 차별로 인해 단합되어 있고 법률에 의해서 능력이 부여 되어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계급의식은 장애 인권운동을 급상승시키는 힘을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 알려나가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시민권적인 투쟁과 진보에 있어서의 완전한 활동가이다.
  장애우들의 사고방식의 변화는 스스로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동정에 근거한 온정주의(paternalism)나 과장된 칭찬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국, 그리고 전세계에 확신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장애우들은 단지 일상적인 삶에 완전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일반적인 기회를 제공하고 존중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끝)


글/ 서동명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