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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그대의 영정 앞에 헌화합니다

고(故) 강정영 상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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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기자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찾아야 할 자료가 있는데 어디에서도 구할 방법이 없다는 짜증섞인 푸념이 이어졌죠.
  마침 오래 전에 스크랩을 해두었던 신문 기사가 떠올라 다시 연락하게 한 뒤, 한참 동안 먼지를 내면 십여 년 간의 신문 조각들을 들썩거렸습니다. 
  언제부터 신문의 가로쓰기가 시작되었는지 모를 만큼 모든 기사들이 세로쓰기로 채워져 있더군요.  별의 별 내용들이 다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의미했던 건지 묻고 싶은 "국민들이 깜짝 놀랄 젊은 후보를 내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던 전직 누군가의 깜짝 선언 기사, 무너져 버린 삼풍백화점의 처참한 모습, "반드시 월드컵 16강에 올라서겠다"며 자신만만하던 어느 감독의 인터뷰사진, 베낀 듯이 매번 반복되는 "부패척결"과 " TV의 선정성 논란" 그리고 "수해대책 철저히 하라"는 공염불 기사, 사찰이 불타오르고 가진 자들의 소비 형태가 고발된 기획 기사, 갈 때까지 가버린 연예계 뒷골목의 풍토 등등‥‥‥. 
  후배가 원하던 참고 자료를 가까스로 찾아낸 뒤, 둘러보듯 나머지를 펼칠 때였습니다.  정말 일순간에 가슴 한가운데를 아프게 내리치는 기사의 큰 제목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다운 젊음 조국 품에‥‥", "꽃처럼 스러져 간 21년‥‥".
  1996년9월23일 월요일자 신문의 사회면이었죠.  각 신문사마다 타이틀에 말줄임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공감이 가던 그 기사 내용은,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원도 잠수함 침투 사건에 관련된 긴급 뉴스였습니다.
  "22일 새벽 6시 40분 경 칠성산에서 공비와 대치 중이던 화랑부대 13연대 9중대 3소대 소속 강정영(姜正榮 · 21) 상병이 교전 도중 총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 21세 꽃다운 목숨을 조국을 바쳤다‥‥‥."
  기억나실 겁니다.  이런 기사와 뉴스 방송에 눈과 귀를 모으고 있던 당시의 정경 말입니다.  이미 언론에 모두 공개되었던 사항 그대로 화랑부대는 1군 직할 예비사단인 11사단을, 13연대9중대3소대는 강 상병이 소속되어 있던 예하부대를 의미합니다. 
  그는 3소대2분대 소속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정상적으로 군 생활을 거친 대한민국 남자라면 술자리에서라도 한 번쯤 추모의 상념을 되씹게 만들었을 그날의 사건‥‥‥. 제가 강정영 상병을 지금까지도 마음 아프게 간직하는 이유는, 이 글을 적고 있는 저 자신이 바로 11사단13연대9중대3소대2분대 분대장으로 군 복부를 마치고 제대했기 때문입니다.
  TV뉴스를 통해 현장 상황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던 저녁 시간, 저는 얼굴을 검게 칠하고 완전 무장 상태로 전투에 임하던 군인들의 어깨에 낯 익는 사단 마크가 부착되어 있는 걸 보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군복 어깨에 붙여놓고 청춘을 보냈던 그 마크였기 때문이었죠. 
  끝도 없는 행군으로 인해 특히 악명 높았던 교육훈련사단이고 예비사단이었기에, 제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비슷비슷한 이유로 실전에 투입되었던 사례가 몇차례 있었습니다.  제대한 지 4년이 조금 넘었던 시간, 그러니까 제가 제대할 때 갓 들어왔던 신병이 제대를 하고, 또 다른 전입 신병이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을 즈음 강 상병이 입대하여 같은 소대의 막내로 배속되었다고 보면 대강 앞뒤 간격이 맞을 것 같습니다.
  제가 누워 있던 침상 그 자리에서 강 상병도 기상하며 취침을 했습니다.  제가 이용하던 관물대에 그의 일기장이 담겨 있었을 테고, 사랑하던 사람의 사진도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을 겁니다.  제가 읽었던 진중도서(陳中圖書)에 그의 손때도 묻었을 것이고, 제가 덮었던 모포에 그의 체온도 남겨져 있었겠죠.
  식판이나 운동기고 같은 소모품들은 거의 새 것으로 바뀌었겠지만, 그가 생각 없이 만지던 소대 물품들 위에 제 손길의 여운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갑자기 뉴스 앵커의 급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아군에 희생자가 나왔고, 숨진 병사는 모 부대 소속 누구와 다른 모 부대 소속 누구라고.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자막에 쓰여져 있던 글씨는 정확하게 제가 알고 있던 부대 이름이었습니다.  이어 소속 부대의 숫자가 제 기억 속의 숫자와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오, 하느님‥‥‥. 
  그 날 밤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거렸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대하고 나면 군부대 방향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는다고들 얘기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술자리나 여자들 앞에선 군대 무용담을 떠드는 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법이죠. 
  문득 잊고 있었던 일화 하나가 생각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라는 말이 있듯이, 화랑부대 출신들의 남다른 전통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건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니까 사실이라고 보증할 수 있겠죠.  첫 휴가를 떠나던 날, 고참병 하나가 이런 얘기를 꺼냈습니다. "상봉터미날 앞에 서 있기만 하면 택시를 공짜로 탈 것" 이라고, 또한 "휴가 기간 동안 군복을 착용하고 다니면 돈 없이도 넉넉하게 먹고 마시다가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웃기는  소리 말라고 속으로 무시하며 서울에 도착해서 상봉터미날 앞 길가에 서는 순간, 갑자기 몇 대의 택시가 몰려 와서 어서 타라고 서로들 아우성이었습니다.  호객 행위인가 싶어 맨 앞차를 탔는데, 운전사 아저씨는 다짜고짜 몇 연대에 근무하냐고 물었습니다.  어디라고 대답하자 자기도 77년도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는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한참을 달린 후 집 앞 골목까지 차를 몰고 들어간 그분은, 앞으로 고생이 많을 거라면서 뜻밖에도 만원짜리 한 장을 제게 주었습니다.  택시값을 안 받은 것은 물론 건강하게 제대하라는 격려까지 이어졌습니다.  집 입구에 서서 저는 큰소리로 경례 구호를 외쳐야 했죠. ‘화랑’이라고. 그분은 경례에 답을 전한 뒤 떠나가셨습니다. 
  그 날 이후 일부러 실험 삼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군복을 입고 있다 보니, 정말로 시키지도 않은 맥주와 안주가 계속 들어왔습니다.  시킨 적 없다고 하니까 방금 나가신 어느 손님이 시킨 것이고, 우리 자리의 술값까지 대신 계산하고 나갔다는 황당한 말이 이어졌습니다.  성급히 쫓아나가니까 중년의 어느 남자분이 껄걸 웃으면서 담배 한 갑을 권해 주시더군요.  그분도 같은 부대에서 청춘을 보내셨던 겁니다.  그분은 강원도 홍천에서 전라도까지 왕복 행군을 했었다고 하시더군요.
  보름간의 휴가 기간 동안 이런 일은 하루에 한두 건씩 꼬박 생겨났습니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예외가 없었죠.  결국 저는 군 생활 동안 택시비를 낸 적 없이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거짓말같죠?  사실입니다.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는 예외 없지만.  그런 게 전통이라는 건지, 저 역시도 제대한 이후에 거리에서 예의 그 마크를 단 사병만 보면 불러 세워서 급한 대로 담배와 캔맥주 등을 사주었습니다.
  반대급부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조건반사처럼 주머니를 털어 낸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단 마크만 봐도 달려가서 술과 안주를  선물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전통이 현역병들에게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도 저는 같은 일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쓸데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떠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저였기에 강 상병의 비보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다음 날 전화통은 불이 났습니다.  같이 근무했던 옛 전우들의 전화가 빗발친 것이죠.  이런 일이 벌어져서 마음이 참담하다는 말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힘으로 자대에 추모비를 건립해 주자는 의견까지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을 찾는 TV프로에서 군 생활을 같이한 동료를 찾고 재회하는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도 코끝이 찡해지곤 합니다.  그것이 남자들의 아련한 향수인가 봅니다.  고참이었던 어느 동료가 사고를 당했을 때, 비상연락망을 동원해서 모두가 팔뚝을 걷고 헌혈에 동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무사히 제대를 했다면 "97년 말쯤에 사회로 돌아와서 대학을 끝마쳤을 테고, 지금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결혼과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을 강정영 상병‥‥.  흐린 기억 속에만 담아두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마음에 묻고 있기만 했던 나날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며 잘못 이루던 순간이 얼마나 지나갔다고, 이렇게 옛 신문을 통해서야 다시금 그때를 떠올려야 하다니‥‥‥. 
  정신을 바로 잡고 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났겠지만, 그가 못다한 언어들은 아직도 우리들 곁에 떠돌고 있으리란 걸 잊지 않겠습니다.  작은 촛불을 밝히며 새로운 마음으로 강 상병의 영정 앞에 인사를 전합니다.
  외아들이었던 그의 빈 공간, 가족들에게 커다랗게 뚫려 있을 그 공간을 이젠 우리가 채워 주어야 할 것입니다. 
  두고두고 기억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세워졌던 조그만 추모비를 이젠 그대의 마지막 자리 위에 정식으로 세울 날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오늘 찾아낸 옛 신문의 기사를 곱게 오려 보관하겠습니다.
  같은 작전 도중에 장렬히 산화한 고(故) 송관종(宋寬鍾 · 21) 일병과 특전사 이병희(李炳熙 · 25) 중사님의 영정에도 마음으로부터의 헌화를 올립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우리의 가슴 깊이 새겨져 통일의 그날, 그리고 역사의 이름 앞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란 것이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한 번쯤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요? 
  두고두고 마음에 담겨 있을 후배 강 상병에게 당시 우리의 경례 구호였던 "화랑!" 의 인사와 함께 추모의 정을 힘차게 외쳐 주고 싶습니다.  "편히 잠들어라.  너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하마.  사랑한다.
  영원한 전우 강정영 상병‥‥‥."


글/ 채지민 (시대문학 시부 및 자유문학 소설부 등단, 제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 Ⅰ・Ⅱ>, 장편소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별하기에 슬픈 시간> <내안의 자유> 등이 있음.)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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