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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신화로 사라져 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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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를 보내고 새로 맞이하게 될 때, 예고 없던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문득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될 때, 홀로의 상념을 되씹고 되씹어야 할 때…… 우리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떠올리곤 한다. "레테의 강" 강물에 젖어 있던 망각의 부분들은  그 물에 젖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가 잊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영원히 감춰진 채 모두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던 시간 구석 구석에는, 남모르게 흘려 온 스스로의 흔적들이 수북히 쌓여 있기 마련이다. "내가 정말 그랬었던가?" , "아 그래, 맞아. 내가 그랬었어. 정말 그랬었지……."
우리는 이렇게 되살아오는 순간 속의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둔 채 무심하게만 오늘을 지내고 있다. 실상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간과하면서 말이다.
  청소년 시절, 당시의 감수성 모두를 휘어잡았던 인물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선 술과 담배로 대신 위로했겠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 밑에 밑줄을 긋고 또 다시 색연필을 덧칠하며 수많은 밤을 사춘기의 가슴앓이로 잠 못 이루게 만든 이들이 있다.
  전혜린. 청춘을 되돌아 생각할 때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은 젊음이 있었을까?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요절한 천재 화가 최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국 땅에서 식민지의 한을 품고 사라져간 시인 윤동주의 경우도 예외로 할 순 없다.
  그들은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려던 청소년기의 감수성 앞에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희망, 주체 못할 좌절을 던져 준 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The End"를 미처 보지 않은 채 어두운 객석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처럼.
  회색뿐인 풍경, "55년 가을 독일 뮌헨 교외의 림(Riem)비행장, 짙은 안개와 레몬색 가스등의 잔영, 잿빛 하늘, 절망적이 고국과의 거리감 (Pathos der distanz), 영원한 물음 앞에서의 공허, 색이 있는 민족에 대한 환영(幻影), 대학과 집 사이를 오가며 홀로 걷던 공원 산보지,
  다다이스트의 집합 장소 <노아노아>, 추위에 떨며 바라보던 난로 속의 붉은 석탄 그리고 달아오르는 불빛, 아스팔트 킨트(Asphalt-Kind)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집시의 피 한 방울에 대한 미련, 인식에 바치는 생, 실향병의 눈, "쟝 아제베도"라는 절규의 대상, 슈바빙의 향수, 구속됨 없는 생의 자유, 괴로운 일로만 달려가는 추억, 그 모든 것에 아파하던 가슴앓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들불처럼 피어올랐던 "전혜린 신드롬"에 대해 회상할 수 있는 속칭 "386" 도는 "475" 세대라면, 위에 적힌 단어와 문장들이 결코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잠시 일손을 놓게하고 깊은 한숨과 차 한 잔을 떠올리게 만드는 향수와 희한같은 게 엄습하지 않을까? 언제나 "출발하기 위해 출발했다" 던 그녀 음성에 가슴을 열었고, 정신적 고향만 같이 한다면 지리적 고향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슈바빙의 "슈바빙적(的)인 것"에 열광하던 순간들, 기억나지 않는가? 잿빛으로 치열했던 그 속앓이의 시간들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지낸다. 그리고 "잊고 지낸다"는 사실마저도 잊고서 그날 그날을 생존하기만 한다. 살아오는 동안 무엇이 나를 뜨겁게 했고, 무엇이 나를 차갑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나를 눈물짓게 했고, 무엇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나의 영혼에 한숨이 스며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의 좌절이 터져 나와 숨통을 막았었는지를 말이다.
  "일어서라! 좀더 너를 불태워라!"  화실 한 귀퉁이에 적어놓은 좌우명처럼 화산같이 타오르던 예인(藝人) 최욱경, "금지된 얼굴들" 에 대한 꿈과 숙명을 안고, "종점을 향하여 지도가 필요 없는" 시간 속을 여행하고자 했던 여인. "인연 없을 재회"를 기다리며. 이미 떠나야 했던 "마지막 순간 어제의 촛불"을 아쉬워했던 사람. "단지 이 기차를 내리게 하십시오! 다음 정거장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며, 순간 순간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캔버스 화폭 위에 몰입시켰던 화가…….
  마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의 암호처럼 스스로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혜린 신드롬이 절정에 이르던 "85년에 심장마비라는 사인(死因)을 남기고 사라져 버려, 지금까지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신화를 이어가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에 가슴 속 새겨지는 별을 다 헤아리지도 못했던 윤동주.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서" 미워졌다가, 다시 그리워짐을 아파하던 이 땅의 청년. 하나씩의 별을 바라보며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憧憬)", "시(詩)"와 "어머니"를 불러 보던 식민지 시대의 시인.
  암흑기의 하늘에다 감성의 별을 띄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암울했던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선명한 자신의 언어를 기록했던 그는, 독립 운동 혐의로 투옥된 뒤 서른도 채우지 못한 나이에 구주(九州) 복강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을 오랜 시간 동안 접해 왔기에, 우리는 윤동주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퇴색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많은 이들의 가슴 한가운데 비밀번호처럼 남겨져 있는 전혜린의 여운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60년대 중반과 후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 화산처럼 타올랐다가 재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 누가 인위적으로 조종한 것도 아닌ㄷ, 그녀는 우리 앞에 불숙 나타나 잠들어 있던 감수성들을 일깨우며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곤 했다. 왜 그녀의; 이름이 순간순간마다 되살아나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미련을 남겨 두는 것일까.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녀의 부활에는 하나의 키워드가 잠부 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잃어 갈 때마다 나타난다는 것.
  시대적으로 암울한 그림자가 모두를 짓누르던 기간이면 예외없이 그녀 이름과 영혼을 불러 일으켰던, 그 힘의 원천은 바로 미래를 상실한 젊음 자신에게 있었던 깃이다.
  독재와 싸우면서 암담한 내일 앞에 한숨을 내질렀을 때, 희망을 희미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본질적 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랑을 잃고 인습의 틀마저도 거추장스러운 가면이라 느끼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전혜린은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IMF가 터져 전국민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일시적이나마 그녀의 책을 찾는 독자들의 발길이 많았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사고가 나면 사후 조치를 취한다. 어쩐다 법석을 떨고 난데없는 재난이 닥치면 재발 방지를 위해 근본적으로 대책을 세운다. 뭐하겠다 구호만 외치듯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고 돌아서 버리던 우리의 습성은 어느 덧 정신세계마저도 같은 전철(前轍)을 밟아야 하는 늪에 빠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즐거울 때, 일이 잘 풀려갈 때,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때, 그럴 때는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의 업적은 곧 자신의 능력" 이라는 단순 구도가 성립될 때면, 그녀의 이름 석 자는 단지 술자리의 안주거리처럼 지적 유희의 허망한 대상으로 치부될 뿐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외롭고 쓸쓸할 때, 미래가 보이지 않을 대, 꿈마저 지워지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떠올릴 수 없을 상황이 되면, 소리도 없이 그녀의이름을 젊은 영혼 위에 새기게 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그녀를 앓는다. 우리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걷던 영국 공원 길가의 레먼등 불빛 곁으로, 맥주 한 잔 들이키던 노아노아의 구석 자리고, 세상을 마음껏 뒤바꾸고 건설하려는 슈바빙의 젊은이들 자유 속으로 자신을 도피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것마저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기에, 우리는 반복적으로 그녀와 자유와 인식의 ‘대명사’ 또는 ‘상징’처럼 부활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된다고들 떠들어 대는 요즘, 불확실한 미래가 자기에겐 희망을 줄 거라고 기대하는 만큼이나 그녀의 재등장이 언제 어느 순간에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녀를 불러들이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만큼 우리는 본래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 잊고 지내는 게 무엇인지도 떠올리지 못하며   "본질의 자라"를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술 몇 잔을 마실 만한 여건이 된다면, 자기의 마음속 필름을 먼 어제의 시간으로 돌려서 천천히 재상영해 보는 것도 이런 계절에 필요하지 않을 까 싶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언제나 "나 자신" 안에 있는 법이다.
  먼 곳에서만 찾으려 헤매던 시행착오를 이젠 접어두고, 내 안에 담겨진 "본래의 나"를 찾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전혜린이 신화로 남겨져 기억되듯,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개개인의 신화 또한 자신의 망각된 기억 속에서 목마르게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채지민 (시대문학 시부 및 자유문학 소설부 등단. 제 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ⅠㆍⅡ>, 장편 소설<그대에게 가는 길><이별하기에 슬픈 시간><내 안에 자유>등이 있음)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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