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장수영의 도전(1)
본문
21세기는 우리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다른 자세를 요구하는 듯 하다. 인류 모두는 이제, 모두에게 차별이 아닌 평등이, 대결이 아닌 화해가,
분쟁이 아닌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한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해결해야할 수많은 과제들에 직면하게 되는 오늘이다. 98년 3월 국내에 있는 외국인 장애우들의 실태를 취재하며 그나마 시행되고 있는 장애우복지제도의 우산조차 나눠쓰지 않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 그러한 작태는 외국에 있는 교포장애우들에게 그대로 반복되기도 한다.
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교포장애우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정수영 씨도 그런 재외교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수영 씨는 1949년생으로, 어렸을 때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한국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27세에 「희망의 집」에 입소했다. 「희망의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글자를 읽고 쓰게 되었으며, 국적으로 인한 연금차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국민연금의 국적차별을 없애기 위해 1992년 8월 「재일외국인 연금차별을 없애는 모임」을 결성했고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글 ‘정수영의 도전’은 현재 자립생활을 위한 사회보장운동을 하고 있는 그가 이제까지 걸어 온 길과 자립에 대한 도전과정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의 심정을 담고 있다.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정수영 씨에 대하여
정수영 씨와 만난 지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山村(야마무라)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국인인줄 몰랐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한국인인줄 알게 되었고 아울러 일본이 재일한국인에 대해 매우 냉혹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수영 씨의 양친은 수십 년간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세금을 내면서 일본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 왔으며, 정수영 씨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해왔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일본인의 의무이기 때문에 정수영 씨의 아버지도 당연히 일본인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 권리가 부여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 적합한 권리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수영 씨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받아야 했고, 그 아들인 수영 씨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더 더욱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 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수영 씨에게 의무만을 강요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권리는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큰 모순인 것이다.
신변자립이 불가능한 중증 장애우지만 정수영 씨는 지역에서 자립 생활을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차별정책을 펴고 있는 일본에 대한 큰 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부끄럽게 한다.
이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수영 씨와 만나면 만날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욱 커진다. 외국인 내국인으로 구분하기 이전에 일본인과 동등한 의무를 부여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정수영 씨를 만날 때면 언제나 어느 외국인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냉정하다. 사정이 나쁘면 언제든지 (외국인을) 국외로 추방할 수 있다는 특권을 일본 정부는 가지고 있다.”
지문날인 제도도 그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일본인과 동일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그 가족을 포함하여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일본이 된다면 일본 사회는 더욱 더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것은 진정한 복지에서 우리들이 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방향일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정수영 씨가 하루라도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느님에게 기원할 뿐이다.
山田昭義(야마다 쇼우기)
AJU(일본인이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수영씨의 생각
희망의 고향집에 들어오기 전의 생활
내 조부모는 1930년 자식들인 아버지 형제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조부모는 오오사카(大阪)를 필두로 관서지방 여러 곳을 전전하며 다양한 직종에 종사해 왔다. 그리고 일 관계로 알게돼 친한 친구사이가 된 야마무라(山村)라는 일본인에게 일본이름을 제공받아 야마무라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조부모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26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부모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반 년만에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서너 살 정도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오후 4시경 자전거로 집에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밖에서 놀다가도 곧바로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시늉을 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는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해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만화책을 보곤 했다고 들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행동거지가 변한 것은 형(정수영의 백부)을 전쟁에서 잃고 난 후였다.
자신이 형 몫까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공부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결혼할 당시에도 아버지의 방에는 책들이 가득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지금 같으면 동경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공부했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1927년 아이치현 세토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조부모는 북한 출신이었다. 내 외할아버지, 즉 어머니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가난한 집에서 자라면서 잔심부름, 아기 돌보기, 가정부 등을 하며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면서 혼자 많이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글을 모르신다.
우리 가족은 대가족으로 많을 때는 아버지의 형제분들과 할머니를 포함해서 13명나 됐다. 그리고 나는 형제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의 장애우들이 일일서비스센터등을 이용하면서 외출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극히 일부 장애우만을 제외하고는 집안에서도 격리된 상태가 많았다. 하지만, 내 형제나 부모는 나를 특별히 취급하지 않고 보통의 형제들과 똑같이 생각하여 외출도 많이 시켜주었다. 가난했지만 따뜻한 형제애가 있었기에 아무런 불편 없이 맑고 밝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내 나이 여덟살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라디오를 사다 주셨는데 그 당시로서는 드문 최신형 라디오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집은 결코 유복하지는 않았다. 몸이 약해 병원과 집만 오고 가곤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패거리들의 망을 보는 역할을 해서 형무소에 들어가기도 해 늘 집을 비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라면전문점을 열면서 경제적으로 조금씩 여유가 생긴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다 주신 것이 라디오였다. 이 라디오를 통해서 산수나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와 작은 시어머니를 모셔야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하시던 라면전문점을 이어받아 운영하느라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의 손에 밴 라면냄새를 매일 맡아야 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라면을 매우 싫어한 적도 있었다.
어느 부모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머니는 나를 매우 귀여워했고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셨다. 그 중에서 제일 싫었던 곳은 골수에 찬 물을 빼는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일이었다. 백부가 전쟁이 끝난 직후 소아마비는 골수의 물을 빼주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어느 병원에서 들은 후 백방으로 알아보신 어머니는 10회 정도 맞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매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등골을 굽혀서 골수에 직접 주사를 놔서 물을 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어쨌든 굉장히 비쌌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주사를 맞기가 무척 아파 9회 정도 맞고 그만두었다. 내가 의사 앞에만 가면 자지러질 정도로 울었기 때문에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한 어머니가 “이제 그만하자”며 포기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할머니와 나는 뇌성마비라는 병을 어떻게든 고쳐 정상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의사나 안마사 등 여러 곳을 다녔었다. 안마, 약, 주사뿐만 아니라 불에 몸을 쬐기도 했다.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런 치료도 받으러 다녔다. 이것 또한 굉장히 무서웠다.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나를 위해 온 名古屋(나고야)시내를 뒤지고 다녔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 엿장사를 하셨던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약간의 돈을 남겨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내 형, 누나, 남동생 등 4형제 중 셋째다. 어느 정도 철이 들어갈 무렵 다른 형제들이 학교가는 것을 보면 어린 마음에 무척 부러웠었다. 하지만 형제들은 나를 잘 보살펴 주었다. 싸움도 많이 했지만 역시 형제는 고마운 존재다. 누나와 누나친구들과 함께 칠월 칠석날 재미있게 놀던 일, 형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에게 의자를 만들어 주던 일 등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에는 몸이 작았기 때문에 바르게 앉을 수 있어서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남동생은 소아결핵을 앓아 조선초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했다. 한번은 동생이 놀러 나가고 없는 사이 큰일이 일어날 뻔한 것을 동생이 돌아와서 도와주기도 했다. 옛날에는 이불이 모두 무거웠기 때문에 내가 더워서 이불을 차려고 하다가 오히려 위로 당겨져서 전체를 뒤집어 쓰게 되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 때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동생이 발견하고 이불을 벗겨내 나를 살려준 일도 있었다.
1985년, 다시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또 생활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가 라면전문점을 계속 했더라면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생활보호라고 하면 TV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던 그런 어두운 기억이 있다. 지금은 생활보호를 받는 집이라도 전화나 TV는 있지만, 역시 싫은 기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상담을 하곤 하는데, 사라이(皿井)선생님은 “그러한 기분이 드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야마무라 씨는 야마무라 씨 나름대로 여기에서 성실하게 생활해 나가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씀하셨는데, 듣고 보니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5세 때 함께 살고 있던 친척 누나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은 한국식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을 많이 불러 마시고 먹고 했다. 그 당시 내가 사춘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늘 친구가 그리웠다. 주위에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서 학교 친구들하고만 놀았기 때문에 내게는 친구가 없었다. 내 유일한 친구들은 큰아버지의 딸인 사촌들이었는데 그녀들은 친절했고 당시 유행한 휴대용 레코드로 함께 유행곡을 듣곤 했다.
그 당시에는 순간 순간만 재미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형이나 동생이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솔직히 말해 굉장히 부러웠다. 그 때부터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부모나 형제들이 있어서 괜찮겠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이런 몸으로 긴 세월 동안 모두에게 폐를 끼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살때쯤 우리집에 나를 위문하러 온 3명의 학생들이 “내년에 성인식이네”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을 들은 후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나도 벌써 이만큼 나이를 먹었구나’라고 처음으로 나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학생(남), 한 사람은 회사원, 한 사람은 간호학교 학생이었다.
그 당시에는 라디오카셋트가 유행했었고 노래테이프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만 했지 녹음할 생각은 못했었다. 앞서 말한 3명의 학생이 다시 우리집에 방문했을 때 “펜팔친구가 되어주시지 않겠어요”하고 부탁해 보았다. 무대포였다고나 할까, 뻔뻔스럽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2, 3회까지는 형수에게 부탁해 편지 대필을 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가족이라지만, 아니 가족이니까 더 더욱 내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 때 문득 생각해낸 것이 라디오카셋트에 녹음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녹음버튼을 누르는 것만 부탁하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목소리 편지’를 만들었다. 스무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연습없이 바로 녹음하기 때문에 받은 사람은 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20살 무렵,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가 시작한 포장마차의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형님 내외가 분가해서 가족은 나를 포함해 삼형제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가끔씩 들리는 정도였다. 어머니는 일이 바빠서 늦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는 자상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냉정하셨다. 요즘말로 고부간의 갈등이라고나 할까. 자주 할머니와 어머니는 크게 다투시곤 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누가 먹여 살려요!” “관둬! 너 말고도 먹여 살릴 사람 많아.”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둘 다 자기 고집이 강했기 때문에 서로 물러서지 않다가 할머니는 집을 나가버리신다. 그리고 나서 밤이 되면 동생은 빨리 잠들어 버리고 누나는 학교에서 늦고 하니까 나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될 때가 가장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웠다. 할머니는 내가 희망의 집에 들어온 지 3, 4년 정도 지나 면회를 오셔서는 “너는 좋은 곳에 들어와 있구나”라고 한 마디 해 주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2년 전 치매가 걸려 어머니가 굉장히 고생하셨다. 할머니는 82년에 돌아가셨다.
국적문제로 시설 입소 거부당해
그 당시 나는 집안에서 가족들의 손발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런 생활을 평생동안 계속하면 결국 부모님의 손발을 묶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시설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22, 23살 무렵에는 ‘시설’이라고 하면 격리병동 이미지밖에는 없었기때문이었다.
조금 지나 근처에 ‘春日井(카스가이)’이라는 시설이 생겨 형이 나를 생각해서 상담을 하러 갔다. 그러나 입소수속까지 다 마치고 입소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거절당했다. 그것이 국적문제였다는 것을 희망의 고향집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푸른새학원’이라는 시설은 누나가 고등학교 때 자원활동을 하던 곳이고 나도 약 받으러 자주 들르는 곳이어서 해수욕장 놀이캠프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자주 나를 초대해 주었다.
복지사무소 담당자가 적극적으로 푸른새학원 입소를 권했지만 이번에는 아버지가 맹렬히 반대하셨다. 매월 한번씩 정기적으로 푸른새학원에 약을 타러 갈 때마다 내가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다. 나는 단지 부모형제의 곁을 떠나 조금은 편안하게 해 주려는 마음에서였지만 아버지는 “이런 곳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너는 좀 더 인간다운 생활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말씀은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요즈음은 왠지 알 것 같다. 강요당하고, 훈련받고 이러한 정해진 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인생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계속)
번역/이채식
일본 동지사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장애우복지를 전공하고
현재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직업재활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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