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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이야기마당] 선생님, 지금 제 얘기가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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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선생님의 이름을, 성함을 , 존함을 불러 왔습니다. 지금은 "각하"라는 깍듯한 경칭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선생님 의향대로 "대통령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게는 오래 전부터 선생님이셨습니다. 정치적인 노선이나 견해를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정치판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높은 자리로 오르시기 전부터 전해드리고 싶었던 의견이 간직되고 있기에, 예전의 누구처럼 볼품없는 권위로 민중을 위압하려 덤비는 세상도 아니기에, 그냥 절친한 옆집 아저씨한테 질문을 전하듯이 적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국민들과 거리감이 없어진 세상의 변화가 느껴지기에, 저만의 호칭을 계속 쓰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결례는 아니겠죠?
  문득 "87년의 여름이 떠오릅니다. 연세대를 출발한 고(故) 이한열 열사의 장례 행렬이 아현동을 지나 시청 앞까지 이르던 그 날이었습니다. 당시 조문 행렬의 맨 앞자리엔 당시 민추협을 이끌던 두 김씨가 계셨습니다. 선생님하고 또 한 분이 계셨죠. 장례식에 참석한 백만명이 넘는 조문객들은 어두운 죽음의 시대를 함께 생존한다는 아픔과 비장함을 되새기며 서울시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주 천천히, 거대한 침묵 속에 한 걸음씩 내딛으며 백만의 행렬은 이어졌죠.
  최루탄과 화염병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각 대학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직장인과 일반 시민, 연로하신 어르신들까지도 함께 걸으며 눈시울을 적시던 그 날, 백만의 추모인파는 단 한 사람의 걷는 속도에 맞춰 이동을 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죠? 바로 선생님의 걷는 속도에 맞춰 모두가 움직였던 겁니다. 그렇게 긴 길을 직접 걸으시는 모습을 뵌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이라 시작되는 한 편의 싯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날 우리는 함께 걸었고, 같은 길을 나란히 나아갔습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모였던 그 많은 인파가 수천 발의 최루탄 가스에 쫓겨 해산되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시청 옥상에 조기(弔旗)를 게양하고 "가자, 청와대로!"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향하던 분노의 물결을 기억하시겠죠. 하지만 파랗던 하늘 전체를 일순간에 뒤덮은 최루탄과 다연발탄의 독가스로 인해, 한열이를 떠나보내던 우리의 마지막 자리는 허망하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들의 만행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세상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참고 견딜 수 없는 울분을 어찌하지 못해 통곡 같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폐부 깊숙이 박혀오는 독가스에 신음하며,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딘가를 향해 몸을 피하던 그때였습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대로 위에 쓰러졌던 40대 중반의 한 장애우가 피울음을 토하면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몸을 의지하던 목발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비틀거리며, "이 개XX들아,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여라. 죽여!"라고 외치던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행렬에 참여했던 어느 여성 장애우는 인파에 떠밀려 넘어진 휠체어에서 떨어져 나와, 최루탄 탄피 가득한 아스팔트에 나뒹굴고 말았죠. 눈앞에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고 자리를 피하던 저는, 그런 와중에도 그 장애우를 등에 엎고 시청 방면으로 내달리던 젊은 대학생들의 감동적인 뒷모습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도,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함께 걸으며 호흡하던 애국 시민,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국민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당선됨을 알리던 어느 겨울날 새벽, 저는 제기 드리고 싶었던 얘기들이 모두 이뤄지리라는 희망이 앞섰습니다. 가장 단순한 일이지만, 단순했기에 쉽게 보이지 않던 일들........ 하지만 어떻게 도니 건지 아직도 대답은 들리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질문을 드린 적은 없었죠. 아픔을 가진 많은 이들이 느끼던 부분을 선생님만큼은 해결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우리가 너무 성급한 해답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차별이니 출신 학교 차별이니 뭐니 하는 망국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표적인 피해자의 입장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세계는 21세기와 미래를 향해 치열하게 달음질치며 더 넓은 우주로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OO도 출신" 이니 "XX고 출신"이니 하는 소아병적인 편가르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 더 큰 차별과 이기적인 무관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을 가져 봅니다.
  IMF 체제 이전에도 국내 30대 재벌의 장애우 의무 고용률은 0.25%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더 나아졌을까요? 막말로 사지 멀쩡한 사람까지 거리로 쫓겨나는 마당에, 장애우들을 염두에 두면서까지 보다 나은 복지 혜택을 받게 만든 곳이 있었을까요? 우리 나라 정부를 책임지고 계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정부 기관이나 공무원 사회에 장애우들은 과연 몇 퍼센트나 근무하고 있을까요? 공무원 사회에도 의무 고용률이라는 게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정부와 사회가 보이지 않는 제도의 틀로 장애우들이 모두와 함께 걸을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장애우들은 "장애우" 라고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수천 수만번씩이나 뼈아픈 심적 장애를 반복해서 받게 됩니다. 한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선천성 장애는 10∼15%인데 비해 후천성 장애가 80∼90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전은 2∼3에 불과하다고 적혀 있더군요.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선생님께서도 후천적인 사고로 장애를 가지셨습니다. 극단적인 얘기겠지만, 우리는 모두 "잠재적 예비 장애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교통사고와 산업 재해, 의약품의 오남용, 돌발적인 화재와 갖가지 범죄 사건들이 우리 곁에 늘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장애우의 날" 이 있었습니다. 각 신문과 방송들은 자기들이 가장 관심있게 장애우들을 대한다는 듯이 입을 모아 떠들어댔지만, 그런 무심코 스쳐가는 식목일과 같이 1년에 한번 밖에  없는 연례행사일 뿐이었습니다.
  가끔씩 눈을 감고 몇 초 동안 서 있는 경험을 가져 보곤 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커녕,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 길마저도 아찔했습니다. 한 대에 몇천만 원씩 한다는 계단 리프트 시설은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없다고 하더군요. 직접 물어 본 어느 역의 직원은 작동법 마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류장에 서 있어도 버스는 서지 않고, 택시도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걸 흔하게 경험해야만 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식당에서도, 쇼핑몰에서도, 공공장소에서도 그들을 위한 시설과 관심은 찾을 수 없습니다.
  출신 지역을 차별하는 것보다, 출신 학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사악한 짓은 인간을 신체적인 외면으로 평가 내리는 일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꼭 여쭤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책임지신 정부와 주요 기관에 장애를 가진 분들을 등용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의무 고용률이 0.25%가 아닌 5%, 10%로 올라갔다고 기록된 보고서를 우리 국민이 볼 순 없는지요. 개인적인 장애 특성을 개발해서 장애우들의 취업률을 90% 이상 끌어올렸다는 선진국들의 경우는 막연한 남 얘기로 끝나 버리고 마는 건가요.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인재가 우리 나라에 없으라는 법이 있던가요? 더 나은 능력을 지녔는데도 단지 "OO도 출신" 이라는 "XX고 출신" 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긴 세월 동안 차별 받았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행복 추구권조차 차별 당하는 이들이 곁에 있음을 이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 서있는 참모들 중에서, 선생님께 임명의 권한아 주어진 공공 기관의 책임자외 관계자들 중에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분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면서도, 우리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 글을 읽으실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고픈 얘기는 간단하게나마 나름대로 진지하게 적은 것 같은데,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가시면 어떡하죠? 누구라도 대신 전달할 순 없는 건가요? 꼭 답을 말씀해 주세요. 똑같은 가슴앓이와 전철(前轍)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기에, 진정으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큰 목소리로 힘껏 외치고 있는데…. 선생님! 지금 전해드리는 제 얘기가 정말 들리시나요? 
 


글/채지민 (시대문학 시부 및 자유문학 소설부 등단. 제 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ⅠㆍⅡ>, 장편 소설<그대에게 가는길> <이별하기에 슬픈 시간> <내안의 자유>등이 있음)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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