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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동정은 싫다(26) "왜 장애우들이 안락사를 원하는지를 먼저 보라"

안락사허용과 우생학 우세로 인한 반인권적 논의들

본문

 


  장애우들 가운데 자신이 처한 개인적인 불행으로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가족이나 법원에서도 죽음을 원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왜 안락사를 원하는지, 사회에서 이들의 고민을 어떻게 하면 덜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생학자들은 간질이나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영원히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까지 당당히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번 호에는 장애활동가들을 분노케 한 반인권적 논의와 장애우들의 자살을 방조했던 당시 미국 사회를 고발한다.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건강하지만 안락사 시켜도 좋은 장애우들


  맥아피는 그래디에 있는 ICU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병원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ICU는 그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시켜 놓은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거의 3개월 동안 시끄러운 ICU의 병동에 누워 있었으며, 그 후 5개월 동안은 그 보다 낮은 단계의 입원실에 놓여 있었다. 그 후 5개월 동안은 그 보다 낮은 단계의 입원실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전혀 사생활이 보장이 안 되는 곳이었으며 , 간호사들은 그가 침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통을 쳤다.
  맥아피의 부모님들이 그의 전동휠체어를 가지고 찾아와 병동에 놓고 갔지만 병원의 직원들은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며 벽장에 처 박아버렸다. 그래디란 곳은 오래되고 낡은, 가난한 사람들의 최후의 휴양지였으며, 직원들은 아무런 자긍심도 없고 환자들에 대한 애정도 없이 시간만 때우는 그런 곳이었다.
  "그들은 그를 전혀 씻기지 않아서 그에게서는 악취가 풍겼다. 그들은 목요일마다 머리카락손질을 해주곤 했는데 토요일에 내가 다시 그를 보러 갔을 때도 머리카락은 마루바닥과 베개에 온통 뒤덮여 있었다"고 아멜리아 맥아피는 불평하였다.
  맥아피는 병실에 머물렀으며, 그래디는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보험 담당자들은 맥아피가 건강하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불해 주지 않았다.
  그래디에서 퇴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행크 샐링거는 전신마비장애를 갖고 있는데다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하고 살아야 하는 맥아피에게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서 1백여개에 이르는 요양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맥아피의 병원 비용은 7개월 동안 17만 5천3백69달러였지만, 의료보험은 겨우 3천달러에서 8천달러 정도만은 지원해 주고 있었다. 결국 이 나머지는 병원과 주의 세금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맥아피는 아틀란타 법률회사의 변호사인 랜달 데이비스에게 법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데이비스는 항공법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가장 알맞은 법률적인 적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맥아피를 만나러 그래디에 왔으며, 그는 여기에서 ICU의 무거운 분위기를 간파했다.
  간단히 말해서 데이비스는 맥아피가 느끼는 삶의 절망이 크게 다가왔다. 맥아피는 자신의 몸의 통제력을 잃어버렸으며, 그의 삶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그의 삶은 데이비스가 보기에도 살아야 할 어떠한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 법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맥아피가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이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안락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법원에 납득시켜야 했다.
  수동적인 안락사는 삶을 연장시켜 주는 인공호흡기 등의 기계적인 것을 의사가 제거하거나 혹은 제공하여야 할 것을 보류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의료에 대한 윤리학자들과 법률가, 그리고 미국의료협회는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만 이러한 수동적인 안락사를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들은 이러한 것이 일반적이라고 증언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절대 행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금기 시 되는 것은 적극적인 안락사였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며, 사망자의 2∼3%정도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고 옹호자들은 밝히고 있다.
  맥아피가 자신의 죽음을 요구했던 시기에 이 방식은 거의 개방되어 있지 않았고, 많은 의료학자들에게 윤리적인 문제로 반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미국 의사들은 이 나라에서 의사들이 죽어 가는 환자에게 약물을 과다 투입해서 죽는 것을 돕는 것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맥아피의 인공호흡기가 삶을 지지시키는 매우 인공적인 시스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단지 그의 삶을 연장하는 치료를 거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맥아피의 부모와 3명의 누이들도 맥아피의 죽고자 하는 권리를 지지하고 나선 터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주장은 적극적인 안락사와 수동적인 안락사의 경계를 흐리게 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맥아피가 인공호흡기를 계속하고 있는 한 죽을 염려가 없을 정도로 건강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맥아피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병원이나 요양원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이 인공호흡기 때문은 아니었다. 인공호흡기는 30파운드 정도의 무게로 휴대가 가능한 것이었는데 쉽게 휴대할 수도 있어서 이것을 부착한 채로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었다. 그는 단지 전동휠체어를 굴리는데 필요한 만큼만 인공호흡장치가 필요할 뿐이었다. 이러한 보조적인 기구들은 완전하지 못한 몸의 기능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구들은 다른 의미에서는 각각 자유와 독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적 판결들은 의료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지지하였다. 존슨 판사는 데이비스에게 동의하였다. 즉 맥아피가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은 그를 자연상태로 놓는 것일 뿐이라고 판사는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오토바이 사고가 났던 4년 전부터 맥아피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존슨 판사는 건강보조시스템이 맥아피에게 왜 실패했으며, 도리어 이것이 그가 삶을 중단하고자 결정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대신에, 존슨은 스포츠를 좋아했던 소년의 비극과 더 이상 그가 존재하여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장애우가 된 것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가족의 짐이 되느니 죽어버리라고?"


  아틀란타의 장애활동가들은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만약 죽기를 원하는 맥아피의 결정이 지지된다면 같은 장애우인 자신들의 삶도 더 이상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타지역 활동가인 미크 존슨과 엘레너 스미스, 이 두 사람은 법원 밖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일 맥아피가 그의 삶을 그만둘 수 있다면, 그것은 장애우들의 삶이 비장애우들의 삶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그들은 항변했다.
  단지 그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주에서는 왜 그들이 합법적으로 자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법원의 판결은 가족과 사회에 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의무가 있다는 메시지를 장애우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다름없다고 장애활동가들은 강하게 비난했다.
  사실 맥아피는 ICU에서 늘 옆에 있었던 사회복지사와 치료사를 내쫓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심리학자는 그가 죽기를 원했을 때 방문해서 그가 우울해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존슨 판사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맥아피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라는 것만을 보고하였다.
  데이비스 변호사는 오히려 스미스와 같은 장애활동가가 너무나 온정주의적이어서 맥아피가 충분한 결정을 할 수 없도록 한다고 반대하고 나서 기도 했다. "맥아피는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매우 독립적이며,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데이비스는 이야기했다.
  그러나 스미스와 다른 장애우들, 심지어 똑같이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삶이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데이비스는 여기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당신의 건강을 기원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속해 있는 권한이 아니다"고 맥아피의 경우, 사태를 특별히 꼬이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주 정부에 의해서 인정되는 자살방법을 찾아다닌 것이었다. 맥아피는 장애우인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장애우 역사학자인 폴 롱모어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전신마비 장애우도 스스로 자살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맥아피는 호수로 그의 정동휠체어를 운전할 수 있으며, 계단으로 돌진해서 떨어질 수도 있다. 또 약물을 투입하는 것을 통해서 확실한 죽음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출혈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롱모어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은 단순히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법원이 맥아피가 죽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방식이었다. 역사학자로서 롱모어는 때로는 장애우 그들의 의지에 반해서 죽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새삼 확인하자 혼란스러워졌다.
  독일의 나찌정권 하에서 의사들은 정신지체, 정신질환, 자폐, 만성질환, 그리고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동들과 성인들을 대량으로 죽였다. 그들에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각종 약물을 주입했던 것이다.
  이 약물이 잘 듣지 않으면, 마취제등을 다량으로 주입하기도 했다. 또 남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산화탄소 가스를 마시게 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이를 통해 약 20만명 정도의 장애우들이 죽었다고 역사학자 휴즈 그레고리 캘라거는 기록하고 있다.
  "가치 없는 삶(Lebensunwertes Leben)" 이라는 것은 나찌의 의사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때 사용하던 용어였다. 후에 나찌의 이러한 학살은 6백만명의 유태인과 다른 대학살의 희생자에게까지 확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 있다.

 


반인권적인 우생학자들의 주장


  나찌의 생물의학운동은 1920년대 전 세계적인 우생학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20년대 미국의 25개 주에는 강제 불임수술을 요구하는 법률이 있었다. 불임수술을 누구보다 앞장 서서 지지했던 독일의 의사 프리쯔 랜쯔는 1923년에 독일이 시행하고있는 불임수술 허용수준이 미국 보다 훨씬 더 뒤져 있다고 불평하였다. 렌쯔는 간질과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미국과 비교할 때 우생학을 연구하는 곳이 부족한 것을 애석해 하기도 했다.
  독일과 다르게 미국에서 우생학운동은, 거대한 집단적인 학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일부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정신지체, 자폐, 정신질환, 시각장애 그리고 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멸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된 후 손을 이후로도 남길 기회를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후생학자 중 한 명인 포스터 케네디 의사는 1938년에 설립된 미국안락사협회회장이었다.
  1942년에 미국정신의학자에 그가 기고한 바에 의하면, 케네디는 지능이 일정 수준이하인 아이들을 제거하자고 제안하였다. 정신지체아동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나 혹은 후견인이 의료보험협회의 의사들의 동의를 받아서 이 아이로 인한 삶의 짐에서 해방되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하였다. 케네디는 이러한 제거가 상처 입은 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 시키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은 그 아이가 미래에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와 그의 부모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케네디의 은근한 우생학 지지론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량학살이 퍼지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우생학에 연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장애우의 삶을 끝내는 것이 자비로운 것이나 혹은 올바른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72년 의사였던 플로리다주의 한 국회의원은 "위엄 있는 죽음" 이라는 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결국 법률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1985년에 나온 책인 <그 아이가 살아야 하는가? - 장애유아의 문제>라는 책에서 헬가 쿠세와 피터 싱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기는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태어난지 28일 내에 이러한 아이를 죽일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그리고 1991년, 로마 린다 대학의 크리스챤윤리센터의 부소장인 데이비드 리슨은 심지어 장애아의 심장을 가지고 원숭이를 살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주장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에 사람은 심장을 개코원숭이로부터 이식 받았다. 만약에 영장류의 동물의 능력이 중증장애우와 같은 인간보다 뛰어나다면 나는 처음에 했던 것과 거꾸로 하는 것도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장애아이로부터 심장을 이식해서 건강한 개코원숭이나 침팬지의 삶을 살려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의사들은 전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다운증후군이나 여러 가지 다른 결점을 가지고 있는 아이의 삶을 끝내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지해 왔다. 이러한 행위는 1983년에 처음으로 발각되었는데 어느 중증장애아의 부모는 의료적인 치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고, 심지어 의사도 그 아이를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동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자발적인 안락사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외과의사인 제네럴 C. 에베레트 쿠프는 밝혔다. 그는 이러한 것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1973년 「New England Joumal of Medicine」에 두 명의 외과의사는 그동안 수많은 장애아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보다는 죽음을 맞는 것을 허락했다고 고백했다.
  1979년에 캘리포니아 주법원에서는 필립 베거라는 13살난 다운증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이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심장수술을 거부하고 그 아이의 삶이 그렇게 의미 있지 않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다행히 다른 부부가 그를 입양했기 때문에 이 아이는 생명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차라리 장애아는 죽이고 원숭이를 살리죠?


  장애 활동가들에게 맥아피의 경우는 장애우의 삶이 가치 절하돼 있다는 것에 대한 중대한 하나의 예였다. 1983년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인 26세의 사회복지사 엘리자베스 보우비아라는 여성은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고통 없이 굶어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의 한 연합단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서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심한 장애 때문에 죽기를 원하며, 그녀의 삶을 살리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녀를 진단한 3명의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크나큰 정신적 위기가 그녀에게 닥쳤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그녀는 얼마 전 아이를 유산 했으며, 결혼생활도 파탄에 이르게 됐다. 또 남동생이 바로 얼마 전 죽었고, 제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다니던 대학원에서도 자퇴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캘리포니아 법원의 판사는 그녀의 이렇게 우울한 현재의 상태를 간과하였으며, 그 결과 그녀가 죽는 것을 병원이 도와주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의 보우비아는 판사에 의해 묘사된 무기력한 여성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여성이었다. 역사학자 롱모에는 "그녀는 전동 휠체어를 스스로 조작할 수 있었고, 대학원 과정을 절반 이상 마쳤으며, 결혼도 해서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적당한 의료적인 대우만 주어진다면 다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보우비아는 환자가 그 자신이 죽고자 하는 동기, 나이 혹은 건강에 관계없이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케이스가 되었다. 그녀의 투쟁은 전국적인 뉴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왜 그토록 죽기를 원하는가 하는 이유에 주목하는 언론은 없었다. 그녀는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했다. 1988년의 한 리포터는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보우비아가 동정 속에서 살고 있으며, 하루에 8백달러 하는 독방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계속)

글/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서적안내]


 꼬리표 붙지않는 학교 교육
(Schooling without Labels)

 

  이 책은 템풀대학교 출판사에서 1992년에 출간한 2백 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저자는 시러커스 대학교 재활과 특수교육학과 교수인 더그라스 비크랜이며, 그는 그간 4권의 명성있는 저서를 집필하였다.
  이 책의 특성은 실제 장애아동을 양육하면서 장애자녀의 완전 사회통합을 이끌어낸 여섯 가정의 경험을 밀접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라는 꼬리표가 붙여진 사람이 어떻게 완전한 사회참여를 이룰 수 있었는지,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가 없는 사람이 함께 생활하고 함께 교육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두 명의 장애자녀 가운데 보다 중증인 자녀를 그룹 홈에 떼어 놓았던 부부가 그 자녀를 집에 다시 데려와 함께 살면서 일반학교에 보낸 사례는 좋은 예이다. 그룹 홈에서 가톨릭학교에 속한 일반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중증 자녀를 만나러 유치원에 찾아갔던 부부는 한 유치원생으로부터 끈질긴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마리아의 헬퍼세요?’ ‘아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친구세요?’ ‘아니다. 엄마다’ ‘당신이 엄마예요? 그러면 당신은 여기에 사세요?’ ‘아니다, 나는 다른 곳에 살고 마리아는 그룹홈에서 산다’ ‘당신은 왜 같이 안 살아요?’ 이 부부는 이것을 “좋은 질문” 이라고 생각했다. 왜 더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자녀는 부모를 떨어져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가. 정부는 마리아가 그룹홈에서 지내게 하기 위해 3만 불을 지불하는데 이 돈의 절반이면 두 자녀를 집에서 양육할 수 있다.
  정부의 복지정책도 문제가 있고, 후원자들 역시 장애우들이 집을 떠나 모여 살 때 동정을 하고 있다는 게 모순임을 알았다. 또한 집에 돌아온 자녀를 일반 학교에 보내기 위해 교육구청, 학교 당국과 투쟁(?)을 벌여야 했다. 다른 가정들도 모두 자연스럽게 이웃이, 지역사회가, 학교가 장애자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집요한 노력으로 나름의 성취를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은 동기는 장애를 수용하는 부모의 자세와 완전 포함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어야 가능하다.
  ‘특수’등의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여야 하는가? 장애를 가진 아동을 ‘장애아동’이라고 불러서 그 아동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특수’라는 개념을 만들기 위한 지능검사등 각종 검사가 필요한가? 각종 꼬리표로서 ‘불구자’ ‘정신지체인’ ‘환자’ ‘희생자’ ‘고통받는자’ 또한 ‘케이스’ 등등은 매우 기피되는 용어들이다.
  캐나다에서는 정신지체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단체이름을 ‘캐나다 정신지체인 협회’에서 ‘캐나다 지역사회 생활협회’ 라고 바꾸었다. 이들은 정신지체인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한다.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학교교육 현장에서조차 누가 이상한 기준선을 만들어 놓고 누구는 일반학교 일반학급에 해당이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 하는가,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되고 안되는가. 부모와 학교 관계자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할 과제이다.

 

대출문의 : 서대문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 이청자
전화 (02)376-6284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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