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흐르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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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울고 있었다. 어두운 거리 가로수에 기대어 눈물 지우던 그녀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서 있던 내 마음이 아파질 만큼 흐느낌을 그치지 않았다.
쓸쓸히 나뒹구는 낙엽들과 함께 성큼 다가오던 초겨울 어느 날, 당장이라도 폭우나 폭설이 쏟아질 것 같은 성난 먹구름이 모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오후 시간이었다. 인도를 오가는 바쁜 발걸음들과 흑백사진 같은 대조를 이루던 정지된 화면 하나는,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눈가를 매만지던 손길 이외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어떤 사연이 있기에 울고 있는 것일까. 별리의 슬픔일까. 자신의 삶에 대한 좌절의 표현일까. 단순한 감정의 복받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빛깔의 아픈 그림자가 찾아들었기에 저렇게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흘끔흘끔 훑어보며 스쳐가고 있었다. 지나친 다음 돌아보는 눈길 속에서도 그녀의 자세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의아해하며, 오가는 이들은 두세 차례 돌아보는 고개짓을 반복하다가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찾아드는 어둠과 함께 가로등 불빛이 밝혀진 무렵에서야 그녀는 가끔씩 고개를 매만지는 손길엔 여전히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고, 글썽이며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내 눈망울에도 어렵지 않게 비춰져 왔다. 떠나간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을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두고 온 무언가를 잊지 못해 애태우는 걸까. 아니다. 어쩌면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늘에 젖은 상태였기에 그녀가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과 차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유독 그녀만 눈에 띈 이유가 바로 그게 아니고 무엇일까......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내 마음 속 그 아이는 언제나 울고 있다’라고 얘기하던 누군가의 문구가 떠올랐다. 사무실에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통화를 마친 뒤에도, 배달된 저녁식사를 동료들과 대강 끝낸 뒤에도, 화장실에 들렸다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돌아온 자리에서도 그녀의 굳어진 몸짓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그녀는 이렇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 내 마음에 새겨지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하나의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그 얼굴에서 웃음 짓는 모습이나 행복해 하는 표정을 상상해 볼 순 없었다.. 마치 그렇게 있어야 할 자리에 멈춰있는 사람에게 내 영혼을 띄워야 하는 운명이, 오늘 이 시간에 연결되어진 것만 같은.....
희망없는 사람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는 법이다. 저만치 떨어져 서 있던 그녀가 내 마음에 담겨지고 있는 이유는, 내 자신의 모습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가,, 바로 여기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도 없이,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오늘의 짧은 만남은 끝을 맺게 된다. 혼자만의 상념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고, 그녀가 내게 동정을 불러낼 아무런 의무도 없는 일이었다.
암울했던 나락의 한 해를 보내면서 내게 남겨진 단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고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아마도 울먹이며 서 있는 내 모습을 그녀가 바라보며 한숨지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금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자리 앞에서 나는 앞뒤 생각을 가늠할 여력도 없이 담배를 꺼내 물어야만 했다.
흔히 우리는 타인의 감정 표현에 동화(同化)되는 경험을 자주 접하곤 한다. 이산 가족의 상봉을 바라보며, 세계를 제패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의 감격스런 눈물 속에서, 민족을 파탄으로 이끈 철면피들의 가증스런 책임회피 발언 속에서, 자신의 신체를 타인의 생명 위해 기증하는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우리는 함께 감동 받고 함께 분노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으며 서 있던 그녀 역시 내 마음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유감을 전달하며 스쳐가는 짧은 인연과 함께 저 만치에 지금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말씀 좀 나눠도 될까요?’
‘아무 말도 필요 없어요.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얘기로 표현할 수 없는 사연인가요?’
‘힘들어요. 서투른 언어는 우리를 더욱 헝클어지게 만들죠. 억지로 뱉어내는 백 마디 언어보단, 한 방울의 눈물이 제겐 더 뜨거운 해결책일 수 있어요.’
‘눈물을 닦아 주고, 또한 상처를 나누고 싶어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왜죠?’
‘어쩌면...... 제 마음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당신이 대신 흘려 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어요. 온 몸이, 속옷까지 가득 젖어버린 사람에게선 눈물자국 같은 걸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눈물자국은 없어도, 설령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해도, 슬픈 사람의 눈빛엔 항상 눈물이 가득 젖어 있는 법이죠.’
‘내 눈물이 당신 것일 수 없어요. 당신의 마음이 제 것일 수도 없고요.’
‘털어내 버릴 수 없는 일입니까?’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요. 우리는 이렇게 다가설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서로의 자리에 각기 머물러 있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생존해야 하는 거죠.’
‘나눌 수 없는 슬픔인가요?’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잡으려 할수록 사라져만 가는 운명의 테두리에서 이젠 벗어나고 싶어요. 벗어날수록 그 속에 단단히 얽매여 있겠지만 말예요. 당신은 제게 선물일 수 없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슬픔을 벗어날 수 없을 땐 차라리 두 눈을 감아 보세요. 눈물에 가려 흔들리는 아픔보단, 마음에 간직된 향수와 여운을 영혼의 힘으로 쓰다듬는 게 훨씬 나을 수 있으니까요.’
‘결국... 모두가 혼자였어요. 세상 모두는 혼자인 거예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고, 위로 받지 못하는 생명으로 우리는 존재해야 하는 거죠.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어요. 혼자 있겠어요. 그러고 싶으니까요. 그럼 이만...’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창가를 툭툭 적시고 가로수를 적시고 나서 인도 위를, 그녀의 머리카락과 외투를 물들이고이고 잇다. 긴 여운을 남기는 경적음과 함께 청춘남녀를 태운 오토바이 한 대가 화살처럼 질주 했고, 교복 입은 학생들의 깔깔대는 음성이 어수선하게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혼자였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어 행복하다며 떠들어댔지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선 채로 일정 거리를 두고 마주보아야만 하는 생의 장벽에 둘러싸여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우리는 영원히 느끼지 못하며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자기 자신이 혼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까지는 말이다.
아직 울고 있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것 같은데도, 떨리는 그녀의 손길은 차가운 빗물에 어우러지며 지금도 눈가에 머무르고 있다.
글/ 채지민 (시대문학 시부(‘93) 및 자유 문학 소설부(’95) 등단, 제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 장편소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별하기에 슬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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