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이상으로서의 인물, <토지>의 곱새도령 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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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경리 작가 (사진제공. 토지문화재단) |
함께걸음 2016년 5월호에서 필자가 다룬 척추장애인 장형보 (채만식의 《탁류》)가 악인의 전형이라면 조병수 (박경리의 《토지》)는 선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인물을 형상화시키는 관점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장형보는 탐욕과 잔혹의 화신으로서 비극적 갈등을 초래하는 핵심인물이지만, 그 인물이 왜 하필이면 장애인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이라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악한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은근슬쩍 제시하기까지 한다. 이에 비해 ‘곱새도령’ 조병수는 극적인 사건의 직접적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최참판 의 몰락을 불러온 조준구의 간악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대비된 순수와 인간존엄 그 자체로서의 설정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탁류는 현실적 모순을 세태 풍자소설로 드러낸 것이라면 토지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띠기는 하나, 작가의 궁극적인 관심은 이 모든 문제를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면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토지의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심상치 않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 인물들이다. 이를테면 절에 버려졌던 고아로서의 김길상, 무당 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용이와 혼인할 수 없었던, 그러나 평생 애절한 사랑을 지켜갔던 월선, 백정 집안이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던 차별에 한을 품고 평등한 세상 만들기에 몸을 바쳤던 송관수, 그리고 양반 가문이기는 하나 흉악한 부모에다 장애를 가진 조병수 등, 그 외 인물들도 대부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에 의해 부패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진수(眞髓, the essence)를 발현시켜 나간다.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문학적 이상향이자 염원으로서 창조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조병수이다. 필자가 뭐라고 언급하기보다는 짧은 지면이나마 그에 대한 장면을 최대한 옮겨보고자 한다.
조병수는 토지 1부 제 4편 1장, ‘서울서 온 손님들’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서울에서 거지가 된 조준구가 최참판의 재종형제임을 빌미로 최참판 집의 더부살이로 들이닥치는 장면이다. 그러나 썩은 준치도 준치라고 곧장 양반임을 내세워 한 푼도 없는 주제에 나귀와 가마를 빌려 타고 행차를 한 것이다. 시끌벅적하게 들이닥친 조준구와 거만하기 그지없는 홍 씨 부인이 눈을 내리깔고 내리는데.
뒤늦게 달려 나온 복이와 길상이는 뜻하지 않게 요란스런 행차와 가마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자 영문을 몰라 멍하게 바라보는데 다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홍 씨가 타고 온 가마 뒤에 마치 짐짝같이 내버려져 아무도 관심하지 않았던 가마 속에서 뭔지 모를 이상한 것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아이였었다. 분명 사내아이임에 틀림이 없다. 얼굴을 봐서는 여남은 살쯤 된 것 같았고 평생 햇빛이라곤 받아본 일이 없었던지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눈은 무섭게 컸었다. 꼽추였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듯 계집종 곁에 가서 치마폭 속에 몸을 숨기듯 하며 눈만 내밀고 사방의 형편을 경이에 찬 표정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토지> 2권 p336~337)
이후 무서운 역병이 돌아 할머니와 충복들을 잃고 혼자 된 최서희가 그리움으로 패악을 치고 있을 때, 병수가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내미는 장면이다.
투명하고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울부짖는 서희 모습을 지켜본다. 기괴스런 병신이지만 얼굴은 천상의 동자같이 깨끗하다. 달밤에 이슬만 먹고 자란 풀잎처럼 가냘프다. 조준구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부모들과는 딴판으로 어떤 성령이 그의 속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정하고 귀하게 보인다.
별안간 서희는 울음을 그쳤다. 병수를 보았던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병수 가까이까지 걸어간다. 병수 얼굴에 손가락을 겨누며 “비렁뱅이 병신! 네가 내 신랑이 되겠다 그 말이지?” 홍당무가 된 병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듯 맹추를 올려다본다. “가아! 다시, 두 번 다시 별당에 얼씬거렸다간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때려죽일 테야!” (3권 p75)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병수 운명에 대한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는 병수에 대해서 더 적극적인 피력을 하고 있다.
자라지 않는 신체, 그 신체와는 반대로 정신의 성장은 이상하게 빨랐다. 넒은 천지, 그러니까 서울에서의 골방살이에 비하면 평사리는 넓고 넓은 천지였던 것이다. 그는 시시로 뒷산에 올라 하늘과 강물과 숲과 들판을, 철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연을 볼 수 있었고 날짐승 들짐승 뭇벌레들, 사철의 식물들을 볼 수 있었고 먼발치로 들일하는 농부들의 생태도 볼 수 있었다. 별당을 제외한 넓은 집안을 돌아다녀도 방해하거나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두어진 생활에서 일시에 밀어닥친 외계의 상황은 그런 만큼 신선하고 강렬했을 것이다.
목마른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새로운 환경은 그에게 숱한 지혜를 주었고 생각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대체로 신체적 불구자는 성한 사람들보다 감각이 예민하다고 한다. 천질인지 혹은 다만 병적 체구 탓인지 병수는 감수성이 빨랐다. 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 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랄까 분위기랄까, 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 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 초시한테 소학을 배우고 통감을 떼고 사서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 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자각하게 된다. 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을 가풍에 접한 일이 없었고 부모의 훈도를 받은 일이 없었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 그 행간 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 (3권 p208)
고 박경리 선생의 집필 모습(사진제공. 토지문화재단) |
작가가 통념처럼 지적한, 성한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해내는 소유자이니만큼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이해도 누구보다 깊다. 조준구가 노리개로 데리고 놀다가 홍 씨의 질투에 못 이겨 험악한 하인 삼수한테 던져준 삼월이의 망가져가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별안간 멍든 삼월의 얼굴을 쓸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울컥울컥 치미는 애정, 정다운 마음.
“밥 많이 먹었니?”
“예?”
삼월이 의아해 하며 쳐다본다. 바보 도련님이 하는 소리거니 하고 다시 배추 진잎을 뜯어내고 다듬는다. (p230)
병수는 삼월의 멍든 얼굴이 자기 등에 짊어진 혹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등의 혹에도 저와 같은 피멍이 있고 손톱으로 할퀸 핏자국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p229)
드디어 최참판 집 재산을 챙겨 든 조준구는 서울로 금의환향(?)하지만 아들은 그냥 평사리에 팽개쳐둔다. 거기서 겪게 되는 뼈저린 고통의 시간,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그러나 그는 마침내 소목 일을 배워 통영에 정착하게 된다.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과 더러운 곡식을 거부하기 위해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의 그 뼈아픈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인륜으로 얽힌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준구는 평사리에서 가져간 재산을 송두리째 말아먹고, 최참판 집조차 서희한테 도로 팔아 받은 비굴한 돈으로 전당포를 차린다. 그리고 아들이 훌륭한 소목꾼이 돼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다. 10년 만에 만난 자식과 며느리한테까지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서울로 손자를 데려가 일류 교육을 시키겠다고 생색을 내는데, 이를 거절하는 아들한테 부친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
“부정한 재물이다 그 말이겠다! 그 말이겠다! 오오냐 이노움! 그렇게 결벽하고 그렇게 도도한 놈이 스스로는 왜 태어나지 못했나? 올라거든 오라!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그래 그런 잘난 소리 하는 놈이 부모의 몸은 왜 빌렸나? 병신이면 병신답게 주는 밥이나 먹고 구구로 있을 일이지, 가문에 똥칠하는 놈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보고 짓는다던 고얀 놈 같으니라구! 야 이놈아!”
말년에는 풍으로 누워 운신도 못하면서 아직도 욕심에 독이 오르면 자기 똥을 아들 얼굴에다 부리는 등 온갖 패악을 다 부린다. 이 소식을 들은 평사리 여인네들이 하는 말.
“사람 아닙니다. 밥이나 믹이달라꼬 기어들어와도 그 꼬라지 못 볼 긴데, 그 곱새도령 몸은 병신이지마는 마음은 관옥이요, 이 세상사람 아닌갑소. 클 때도 보아서 알지마는 그 눈이 시프고 우찌나 맑고 빛이 나든지. 우째서 그리 착한 사램이 그렇기 무도한 부모한테서 태이났을까요.”
작가는 해도사의 입을 빌려 대답하게 한다.
“전생의 업을 벗노라, 한꺼번에 갚아버리고 천상행(天上行)하려고 그런 거지요.”
짧은 지면이다 보니 조병수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자 휘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스승과 제자, 그 예절이 각별하다. 이들은 소목장이의 기능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있었다. 조병수의 도저한 학문의 세계를 휘는 십여 년 동안 곁에서 엿보았고 불구의 몸이었으나 그의 청명한 감성과 인품에 접해왔으며 그의 비애와 고통을 지켜보았다. 해도사는 휘에게 기본적인 학문과 사람의 도리, 세상의 이치를 다져준 사람이다. 그러나 조병수는 그 다져진 터전에 실로 많은 빛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예술에 대한 휘의 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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