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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ABC-시작하는 시각장애인들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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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나 자전적 영화 속 선배 장애인들의 모습은 어릴 적 내게 용기, 희망 도전정신 같은 것을 북돋워줬다. 당장에라도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불끈불끈한 덩어리가 바로 내 앞에 와 있는듯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감동의 잔상에서 빠져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들도 나처럼 불편했던 것도 알겠고 지금은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성공을 한 것까지도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됐는지, 하루하루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영상 속 그것들로는 나를 돕기엔 너무도 부족했다. 이제 겨우 점자가 무엇인지 지팡이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정도를 알고 있는 나에게 성공스토리 속의 장면들은 매우 감동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발자전거 타는 어린이에게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멀어 보여서 공감하기 힘든 그런 것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사는 이야기를 조금은 구체적으로 풀어 놓으려고 한다.

난 그 시절 그분들처럼 대단히 감동적이거나 성공한 인물은 아니지만 20여 년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쌓인 내 평범한 삶의 이야기도 어딘가의 누군가에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 가기로 한다. 처음 혼자 살게 되거나 이사를 하게 될 때 시각장애인으로서 겪게 되는 첫 번째 어려움은 내 집을 찾는 일인 것 같다. 여러 번 연습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혼자 남겨지는 첫날의 긴장은 언제나 최고조였다. 실수로 길을 잃기라도 하면 패닉이 돼버리는 머리는 주소마저 가물거리게 해 주변에 물어보기도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는 한다.

그래서 길을 배울 때 나는 가야 할 길 외에 가지 말아야 할 길까지 같이 물어보고 외워두는 편이다. 실수하더라도 주변의 랜드 마크나 지물지형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내 머릿속 지도에서 제대로 된 길로 다시 돌아오기도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여러 번의 실패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이라면 출퇴근길의 여러 거점에 단골가게를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주변의 도움을 편히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미리 만들어 놓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취향의 음식점에 들어가기도 하고 주변보다 비싸게 파는 상점에서 몇 번씩 물건을 사기도 한다. 덕분에 비 오는 날엔 치킨집 아저씨가 우산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고 간 택시 때문에 당황했을 때도 상점 어르신들의 릴레이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혼자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가정생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연애에서까지도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갑자기 아픈 가족을 위해 비상약을 사 오는 것도, 예고 없이 방문한 친구들을 위해 과일과 맥주 몇 병을 준비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생각보다 차이가 크다. 요즘처럼 극도로 더운 어느 날 냉장고에 물이 바닥났을 때 슈퍼마켓을 찾지 못해서 수돗물을 마셔야 한다면 그 얼마나 서럽겠는가? 지팡이는 생긴 모양과는 달리 우리를 많은 위험에서 보호한다. 친절한 사람은 많고 둔해 보이는 나의 감각들도 경험이 쌓일수록 발전을 거듭한다. 처음엔 많이 힘들겠지만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집 앞 슈퍼나 약국부터라도 혼자 찾아가는 도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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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요리인데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잘 해먹지 않지만 처음엔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음식에 도전했다. 첫 음식은 라면! 이것의 포인트는 물 맞추기와 타이밍인데 물컵으로 몇 번이 적당한지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최적의 맛을 찾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익숙해지면 시계도 컵도 필요 없어지는 때가 오지만 아직 초보라면 수프와 물을 먼저 끓인 후 싱겁다면 수프를 더 넣고 짜면 물을 더 넣은 다음 면은 제일 나중에 넣는 것도 방법이다.

라면이 무슨 요리냐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시작은 언제나 위대한 것이다. 각종 부재료를 섞어서 다양한 라면을 끓여 먹다 보면 각자만의 방법들이 생겨나고 찌개도 국도 자연스럽게 끓여 먹을 수 있게 된다. 요즘은 오븐이나 양면 프라이팬 같은 새로운 도구들도 나와서 마음만 먹으면 시력과는 상관없이 삼겹살도 구워 먹고 스파게티나 피자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처음 자취를 하던 때 친구들 모아 놓고 막국수와 김밥 만들어 주던 때의 기억은 지금도 매우 뿌듯한 기억 중 하나이다.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메뉴이고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 그것들을 선택하게 된 주된 이유였지만 생각과는 달리 요리의 과정은 엄청난 노력과 상상 이상의 기술들을 필요로 했다.면의 선택부터 소스의 배합 심지어는 맛과 모양까지도 목적했던 방향을 잊어버릴 정도로 결과물은 달라져 있었지만, 정성에 무모한 도전을 더한 음식들에 친구들은 후한 평가를 해줬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미각을 괴롭혀온 내 요리 실력도 실패의 횟수에 비례해 나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는 실력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있는 재료로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즉석요리는 주로 나의 머리와 손을 거쳐 나온다. 청소나 빨래는 청소기와 세탁기가 발달해서 별달리 연습해야 할 것도 없지만, 청소 시에는 한 곳만 계속할 수 있으므로 좌표를 정해 놓고 차례대로 하는 것이 나름의 방법이다. 물론 구역을 나누는 아주 기초적인 정도의 수학 실력과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길을 구별할 정도의 기억력은 필수다.

옷은 섞이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분리하는 게 중요한데 섞여도 지장 없는 것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방법을 대신한다. 특별히 필요한 디자인의 옷들은 재질부터 특별한 것을 고르거나 옷걸이의 위치를 정해서 최대한의 구별 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세탁기가 고장 났을 때 혹은 빨랫감의 종류에 따라서는 손빨래가 꼭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그때도 역시 청소와 마찬가지로 옷의 부위를 차분하게 나누고 차례대로 세제를 묻히고 꼼꼼하게 비벼주면 어렵지 않게 마무리할 수 있다.

집안에서 내가 정한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건의 정리인데 우리 집의 모든 물건들은 고유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가구들처럼 큰 물건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쇠나 리모컨처럼 작은 물건들도 쓰고 나면 언제든지 각각의 고유 위치에 돌려놓아야 한다. 냉장고 속의 음식들도, 샴푸와 비누들마저도 손님들이 오게 되면 쓰고 꼭 제자리를 놓아주기를 부탁한다.

때로는 손으로 찾기 쉬운 위치를 정해 놓다 보니 미관상은 조금 보기 어색할 때도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보기에 좋은 것보다는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듯 보일지 몰라도 그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 물건 하나를 찾기 위해 온종일 온 집안을 더듬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IT 기기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루 중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대상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다. 컴퓨터의 화면을 읽어주는 스크린리더가 생기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삶은 급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할 때도, 정보를 찾을 때도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도 이제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거의 없다. 스마트폰은 한 발 더 나가서 색을 구별하거나 글씨를 읽어주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사진이나 영상을 통째로 설명해 주기도 한다.

요즘은 약속이 잡히면 주변의 위치 정보와 맛집을 미리 검색하고 만날 사람들과 링크를 공유한다. 시각장애인이 찾는 것보다는 당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검색 속도가 빠르긴 하겠지만, 약속 장소에서 만나고 난 이후엔 많은 부분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역할이자 예의라고 생각해서 되도록 열심히 인터넷을 이용하곤 한다.

낯선 차나 택시를 타게 되면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해서 내가 가고 있는 경로를 확인한다. 요즘은 일부러 돌아가는 기사님들은 거의 없지만실수로 잘못된 길을 들어서거나 내비게이션의 오류도 발생할 수 있으니 스스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건 유용할 때가 많다.

마지막으로 미용에 관한 것인데 거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에 가게 될 때는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예복은 따로 걸어두는 것으로 상황에 대비하지만 그럼에도 약속 며칠 전 다른 사람들의 확인을 받는 과정을 거친다. 머리 스타일은 미용실 선생님과 친분을 쌓으면서 반복해서 정리 방법을 배우긴 하는데 정말 중요한 자리라면 그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스스로의 손기술에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가벼운 파마를 권하고 싶다. 그마저도 불안하다면 가까운 미용실에 조금 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여성분들은 더 많은 고민과 연습을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전맹 시각장애인들이 색조 화장까지 완벽하게 하는 걸 보면 사람은 생각하기에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넓혀갈 수 있다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컴퓨터로 기고할 글을 작성하고 반응을 SNS로 확인한다. 시각을 잃었다는 건 정말 불편한 일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시력을 돌려주지 않는 이상 그 불편함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 잘살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는 나조차도 하루에도 몇 번씩 답답한 상황을 마주하는 걸 보면 장애는 여전히 장애인 것 같다. 그러나 걷는 것도 먹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까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고 없느냐는, 또 다른 장애를 만드느냐 조금이라도 덜 불편해지느냐의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예고도 없이 파헤쳐놓는 공사장을 걸어가는 것도 가스레인지에 음식을 조리하는 것도 언제나 힘들고 불편한 일일 수는 있겠으나 조금 더 존엄한 독립을 위해 우리에겐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에 나오던 멋진 선배들이 활짝 웃으면서 조금은 거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스스로 하나씩 이뤄온 자부심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불편하다고 의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고 도와줄 의무도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장애인들이 불편한 것을 보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내가 사는 방법을 스스로 하나씩 만들어 가기를 바라본다.

 

작성자글. 안승준/ 한빛맹학교 교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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