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학회]성찰적 근대화와 장애인의 미래
본문
성찰적 근대화, 개인화란 무엇인가
울리히 벡(U. Beck)은 『위험사회 에서 인류의 시대구분을 크게 전근대, 단순근대(1차근대), 성찰적 근대로 나눠 제시했다. 전근대는 전통적인 봉건사회를 의미하며, 단순근대는 산업사회를, 성찰적 근대는 산업사회가 해체되며 대체하게 되는 사회 유형을 의미한다(Beck, 1992). 벡은 성찰적 근대화의 주요 특징들 중의 하나를 ‘개인화’에서 찾고 있다. 개인화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데 나타난 현상으로, 봉건적 예속, 왕, 귀족, 교회, 신분제도 등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됨으로 시작되고, “자본주의 성립 이후에도 가족, 이웃, 직장, 계급 등의 소속 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끊임없이 분리시키는 원심력”(이광근, 2015: 97)을 의미한다.
실제로 후기근대사회에 이르게 되면, 근대 이후 출현하게 된 계급 개념 역시 개인화로 인해 희미해져 간다. 표준화된 완전고용체계는 유연하고 다원화된 불안정고용체계에 자리를 내줬고, 사람들의 일생도 표준적인 (계급)유형을 따르기보다는 개인 스스로가 계획하고 선택하고 실행하며 책임져야 하는 것(do-it-yourself biography)으로 개별화됐다. “출생-교육-취업-결혼-은퇴 등 일련의 생애과정(life course)에 따라 정립된 근대사회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무너지면서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수정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벡 외, 2010: 128; 신경아, 2012: 16)”
성찰적 근대에서 자아의 정체성과 자율적 결정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개인화는 정치적 양상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산업사회가 발생시킨 위험사회의 요소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자아를 불안하게 만드는데, “성찰적 근대화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자아실현이나 개인주의와 관련된 질문들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정체성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벡은 전문가에 의존한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하고 개인들의 참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하부정치(subpolitics)의 활성화를 통한 생활 정치를 추구”(손철성, 2002: 222)한다고 논의한다.
성찰적 근대화에서 개인화의 장애학적 함의
‘노동 없는 자본주의’에서 장애인 노동의 가능성
성찰적 근대사회에서의 노동은 그 이전 사회와 비교했을 때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1차근대에서 주요한 노동 모델인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더 이상 사회의 ‘표준적 모델’이 될 수 없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대규모 실업, 성별분업의 약화, 파트타임 노동의 증가, 평생고용 구조의 붕괴 등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문순홍, 2006:268). 둘째, 노동의 내용과 노동시장의 공급자도 달라진다. “한편에서는 ‘산업’과 ‘생산’의 핵심으로 이해됐던 물질생산과 육체노동의 비중이 축소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동안 ‘노동인구’로 분류되지 않았던 (기혼)여성과 고령자들이 ‘노동인구’로 포섭됨으로써 노동과 산업의 저변이 오히려 넓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은 종말이 아니라 변화를 겪고, 노동시장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인구집단으로부터 충원된다”(홍찬숙, 2013a: 256). 이렇듯, 노동시장의 변화는 ‘개인의 정체성’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있다(문순홍, 2006: 268).
성찰적 근대화가 진행되면, 장애인의 노동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1차근대사회의 테일러리즘, 포디즘으로 대표되는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노동은 ‘비장애인 중심의 물진생산 육체노동’을 의미한다. 2차근대에서는 이러한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이 약화되고,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한 비물질 생산, 유연한 생산방식 및 비육체노동, 파트타임 노동 등이 강화된다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증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특히 재활공학이나 의학 등이 발전하게 되면 직업 영역에서의 장애인 재활 수준이 높아지고, 건축공학에서 무장애 환경을 강조하는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가 확대 적용되면 장애인 친화적 기업환경이 조성돼, 장애인 고용률 상승이라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가족제도의 약화와 장애인의 독립 가능성
1차근대에는 성별분업에 근거한 전형적인 핵가족 모델에 가족임금(family wage)이 제공되고,복지국가는 대부분의 복지급여를 가족 단위로 편성했다. 하지만 성찰적 근대에서 가족은 노동의 변화만큼 큰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여성개인의 복지권(welfare right)이 발생한다. 이는 여성이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가족 내에서 가족이 수행했던 여러 가지 노동과 기능들이 각각 파편화돼 잠재적 상품으로 변화하게 된다(가사노동, 돌봄노동, 감정노동, 생식요소 및 기능의 상품화)(홍찬숙, 2013: 260-261).
성찰적 근대에서는 개인이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 잡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며, 가족시간의 감소가 나타나 가족 간 친밀감의 교류와 소통은 감소하고 자연스럽게 가족 구성원들은 개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이 강화된다. 그렇다면, 성찰적 근대화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가족제도와 기능의 약화는 장애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첫째, 가족들이 장애인을 부양하는 기능은 점차 약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장애인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가족이 아닌 국가나 사회 혹은 시장으로부터의 의존성이 높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가족이 아닌 다른 체계로부터 얼마나 지원을 잘 받을 수 있을 것인가는,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율과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서비스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율이나 공적 장애인사회서비스 수준이 높다면, 장애인은 ‘가족의 개인화’ 현상 속에서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은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 장애인은 1차근대에 비해 2차근대에서 삶의 질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장애정체감 형성의 새로운 가능성
지금까지 노동체제와 가족제도의 변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듯이, 성찰적 근대에서 개인은 ‘수많은 선택’과 ‘복수의 정체성’에 열려 있다(기든스, 2001). 사람들은 과거의 행동양식들이 폐기되면서 열리는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스스로를 더욱 능동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 기든스(2001)는 인간이 위험과 기회 사이를 이동하며 자기정체성을 구축하고, 성찰적 기획을 통해 자기 삶의 역사를 스스로 써 나가는 자기충족적 개인(self-sufficient individual)이 돼가는 것이 후기 근대사회의 특징이라고 규정한다(신경아, 2013: 269). 이는 전근대 사회를 지배했던 친족, 사회적 역할, 전통적 의무와 같은 기준들이 사라지면서, 사회적 지식과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 자체를 목적으로 한 인간의 관계가 확장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성찰적 근대에 열려있는 수많은 선택지와 다양한 정체성 형성의 가능성은, 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사회문화적으로 1차근대 때보다, 성찰적 근대에서는 인간을 억압했던 각종 제도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다양한 인간의 개성이 장려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따라서 성찰적 근대사회에서, 장애는 개성의 한 종류로써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즉, 장애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장애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장애 및 장애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이를 받아들이는 정도”(이익섭ㆍ신은경, 2006)인 장애정체감(disability identity), “장애가 다양한 사람의 모습 중의 일부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장애에 낙인을 두는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이며, 오랫동안 장애 억압적인 사회가 규정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믿음과 느낌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시도”(Triano, 2004; 전지혜, 2013)로 논의되는 장애자부심(disability pride) 등이 보다 지지받을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성찰적 근대화에서 장애인의 안정적 미래를 위한 전제
성찰적 근대화에서 장애인의 안정적 미래를 위한 전제조건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성찰적 근대화가 장애인에게 진정한 열린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장애인에게 안정적인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성찰적 근대화가 심화될수록 가족의 기능이 약화된다. 이는 장애인의 복지를 책임지는 주체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강화돼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장애인복지서비스의 공공성은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찰적 근대에서 복지국가의 기반 및 영향력은 점차 쇠퇴하고 있고, 시장에서 공공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애인복지서비스의 대안적인 공급주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유력한 주체로서 국가, 시장이 아닌 시민사회부문으로서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 조직을 활용한 방법을 적극 검토하고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장애인 당사자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성찰적 근대에서는 1차근대의 정치적 중심 제도였던 의회정치와 정당의 영향력이 약화된다. 그 대신 시민사회영역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인 정치인 하부정치가 활성화되고 이를 통해 사회의 의사결정 및 역동성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성찰적 근대에서 장애인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장애인 하부정치가 활성화돼야 함을 의미한다. 성찰적 근대에서는 “무차별적 시민들의 다차원-지구수준, 지역수준, 국가수준, 지방수준, 개인수준-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규범과 사회적 연대의식이 발현할 것”(홍찬숙, 2014: 127)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에, 장애인의 정치적 역량을 시민사회수준에서 높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도가 요청된다. 셋째, 성찰적 근대에 부합하는 사회복지 및 장애인복지 전문가의 역할이 수립돼야 한다. 성찰적 근대사회는 개인을 노동시장, 가족제도 등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벡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찰적 근대의 개인은 전문가 체계에 이전 시대보다 더욱 의존하게 되며, 이는 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성찰적 근대에서, 전문가에게 조언과 상담을 구하는 장애인에게, 그 자신이 ‘장애인’이 아닌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직의 역량을 개발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역량은 전근대사회는 물론 1차근대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 억압적인, 보다 좁게는 경제지상주의적인 가치를 비판할 수 있는 인식을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장애학을 기본으로 해, 보다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지적 훈련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 글은 필자의 "성찰적 근대화론의 장애학적 함의: 개인화를 중심으로"(비판사회정책 제52호, 2016)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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