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강박과 돌봄혐오에 대한 아이들의 ‘작은’ 반격: > 문화


자립강박과 돌봄혐오에 대한 아이들의 ‘작은’ 반격:

고정욱의 「가방 들어 주는 아이」(2002)를 중심으로

본문

장애인은 강하다 또는 건강하다”, “장애인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다”,

“장애인도 도움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시각장애를 가진 필자는 미디어, 학교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기관에서 위와 같은 유형의 이야기들을 자주 접한다. 비록 이것들이 호의에서 나온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참으로 씁쓸하고 우려되기 까지 한다. 과연 모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그렇게 강할까? 또는 건강할까?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실생활 속에서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만으로 무엇이든 잘 헤쳐나가고 있을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움요청에 응하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거나 불편한 일일까? 내가 이런 반문을 제기하는 것은 자립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호의존과 협력에 기반하지 않은 개인화 또는 개별화된 ‘자립’의 개념과 실천에 대해 경계하고 이의를 제기해보자는 것이다.

강함/자립을 중시하고 약함/의존을 경시하는 사고체계와 사회관계 속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예컨대, 장애관련 도움 요청이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의존적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자로 낙인 찍힐 것이 두려워 도움요청 시 자기검열을 하는 경우가 많다. 비장애인의 경우에도 유사한 형태의 검열이 발생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고 심지어 상처마저 줄 수 있다고 판단하거나 또는 그 행위가 장애인을 나태하게 만들어 결국 비장애인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장애인의 도움요청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한다. 두 가지 경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인간 본연의 취약성과 의존성 그리고 상호협력을 축소,부정하는 자립에 대한 강박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립에 대한 집착은 돌봄행위를 희화 하거나 폄하함으로써 돌봄혐오를 직간접적으로 조장하는 ‘수발 들기’, ’따까리(비하적 의미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 ‘가방모찌(비하적 의미에서 수행비서를 뜻하는 한일 합성어)’등으로 대표되는 사회풍조와 맞물리며 개인적, 사회적 협력과 연대를 저해하는 등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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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자립강박과 돌봄혐오에 대항하는 서사는 없을까? 나는 장애작가 고정욱의 가방 들어주는 아이(2002)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고정욱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당사자이며, 수 십 편의 장애관련 동화들을 집필해왔다. 그 중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비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동화는 초등학생 비장애 아동 석우가 지체장애 급우 영택의 또래도우미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공감과 협력의 가치를 배워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2학년이 시작되는 3월 새 학기 첫 날, 담임교사 조기준은 석우에게 등·하교 시 영택의 가방을 들어주라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의 집이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영택은 목발을 사용하는 지체장애 아동이다. 석우는 일년 내내 영택의 가방을 들어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지만, 조기준의 “엄한 눈빛”에 그만 눌려 또래도우미를 맡게 된다. 조기준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지시와 1인 ‘전담 마크맨’ 식 도우미 선정은 아이들의 반감을 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학급 공동체의식 함양 및 증진을 저해하는 역할을 한다.

석우는 무거운 두 개의 가방(영택과 자신)을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 “에이, 먹는 조기는 맛있기나 하지, 우리 조기(조기준의 별명)는 쓸데 없는 것만 시키고 난리야.”(p. 16)라고 투덜거린다. 영택이의 “거북이”와 “달팽이” 만큼 다른 속도의 걸음이 답답하기만 하고 장애아동의 “쫄짜” 노릇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석우는 영택과 등·하교 길을 ‘함께’ 걷는 것 대신, 먼저 한참 앞서가 가방을 영택의 집과 학교에 갖다 놓는 차선책을 택한다. 석우의 이러한 행위는 빠르고 생산적인 것과 적자생존에서 살아 남은 강자를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규정·우선하고, 이와 상반되는 자들을 반대로 처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협상된다.

하지만 사회적 낙인은 또래도우미 석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단지 “찔뚝이(영택의 별명)”의 소유품(가방)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석우에게 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된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가방과 함께 돌봄을 실천하는 석우의 모습은 주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공부 못하는 애”, “바보”, “골목대장 부하” 등 학습부진아 내지는 가방모찌 류의 스테로오타입화 된 관념과 이미지에서 비춰진다.

부담스럽고 짜증만 나는 가방배달이 반복되던 초여름 어느 날, 석우는 방과후 급우 서경의 부추김에 떠밀려 축구를 하게 되고, 그 결과 영택에게 가방을 늦게 전달한다. 원망과 꾸중을 듣지 않을 까 걱정하는 석우에게 영택과영택엄마는 “괜찮다…오히려 걱정했다.”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초콜릿까지 건넨다. 석우는 초콜릿을 아껴 두었다가 집에 돌아와 밤에 시장에서 돌아온 동생과 함께 맛있게 나눠 먹는다. 이후 석우의 마음 속에 작은 변화의 씨앗이 싹트고, 석우와 영택은 서로의 취약함(계층과 장애)을 통해 공통점을 찾고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고, 채워가는 공감과 돌봄의 희로애락을 체득하게 된다.

석우는 마을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연립주택 옥탑방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자녀다. 석우아빠는 사업실패 후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이며, 엄마는 시장에서 튀김과 어묵을 팔며 그곳에서 석우의 어린 동생까지 챙긴다. 만 8세인 석우는 부모가 돌아오는 늦은 밤까지 항상 홀로 집에 있다. 석우는 계층에 기반한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편견과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는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생계유지를 위해 정신 없이 바쁜 부모, 그리고 학생대상 복지혜택 부족으로 인해 미술시간용 천원 짜리고무 찰흙을 준비하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영택엄마가 영택과 함께 찰흙을 구입하라고 이천 원을 ‘모른척’하고 주는 배려 덕택에, 석우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미술시간에 찰흙 탱크를 만들어 담임교사로 부터 칭찬까지 듣는다. 의기양양해진 석우는 영택과영택엄마에게 찰흙탱크를 자랑하며 나눔과 배려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함을 표시한다.

영택은 마을 언덕 중턱에 있는 파란대문 집에 거주하는 지체장애를 가진 중산층 자녀다. 자애롭고 헌신적인 부모와 경제적으로 윤택한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영택은 장애에 대한 구조적인 편견과 차별 그리고 비장애 중심적 문화 덕택에 학교 안팎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다. 영택은 친구가 없으며 주변의 차별적인 시선 때문에 생활전반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은 그를 “찔뚝이”라고 놀리며 학교에서 주변화 시키고 있다. 게다가 비장애 중심의 학교 문화는 장애아동 영택에게 필요한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을 뿐더러 학습적, 정서적 지원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학교가 그에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1인 전담 마크맨 또래도우미 배정 뿐이다. 비우호적이고 불평등한 환경에서, 영택은  놀림과 조롱의 대상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비장애 급우들에게 불편함만 주고 짐만 되는 잉여인간으로 축소된다.

지역사회의 반응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몇몇 동네 어른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 영택에게 “인물은 훤한데, 아깝네”, “쯧쯧! 저런 자식은 없는 편이 낫지”, “전생의 업” 등 동정과 연민으로 가장된 언어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영택은 차별적인 시선과 행위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내면화한다. 때마침 뒤따라 온 석우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마치 자신의 일 인양, 어른들의 무절제함과 무감각함에 “할머니들, 왜 그러세요? 영택아 가자!”라고 정면으로 맞선다. 이때 석우는 사업부도로 인해 아빠가 친지들에게 당한 불편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영택과 자신의 아픔을 병렬시킨다. 영택도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항변까지 한 석우가 무척이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를 계기로 두 소년의 우정은 깊어지고 마침내 처음으로 ‘느릿느릿’하게 ‘함께’ 걷는다.

           장애아동 영택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행위는 그의 생일 잔치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의 어느 날, 영택은 같은 반 급우 모두를 집에 초대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왜냐하면 영택이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석우와 서경만이 영택의 집을 방문한다. 반 급우들이 생일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택엄마는 석우에게 아이들이 오지 않는 이유를 묻고, 영택은 그 이유가 자신의 장애 때문이라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다. 충격에 빠진 영택은 자신의 손상된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엄마, 왜 난 장애인으로 태어난거야…힘들게 태어났는데 (생일이)뭐가 기쁘다는 거야,”(pp, 67-68)라며 울부짖는다. 석우는 흐느껴 우는 영택을 바라보며, 그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게 된다.

           어느 새 쌀쌀한 겨울이 찾아 오고, 영택은 방학 동안 다리수술을 받게 된다. 석우는 영택이 수술 후 걷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만, 영택은 호전된 상태로 학교에 돌아온다. 목발이 아닌 지팡이를 짚은 영택의 새 모습에 모두들 신기해하고 기뻐한다. 석우도 영택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이 기쁘지만,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새 학년에는 영택과 다른 반으로 배정 되었기 때문이다. 석우는 이제 또래도우미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고, 평소 열망했던 축구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지만, 영택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새 학년이 되어서도, 영택이 가방을 들어줄까?, 가방 들어주는 것은 너무 무겁고 힘들어!, 축구를 또 다시 포기 해야할까?, 다른 사람들이 예전처럼 이상하게 쳐다보고 놀리면 어떡하지? 석우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3학년이 시작되는 첫 날, 첫 운동장 조회시간, 석우는 학교로부터 예상치 못한 모범상을 받는다. 석우가 일년 동안 장애아동 영택에게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수여 되는 일종의 선행상이었다. 운동장 구령대 위로 불려 나온 석우는 복합적인 감정애 휩싸이고, 무슨 이유 였는지 교장이 건네는 선행상장을 받지 않는다. 급기야 참았던 울음보마저 터져 버리고, 석우는 전교생과 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놓아 울기 시작한다. 교장을 비롯한 어른들은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고 난감하기 짝이 없다.

석우의 수상 거부는 단순히 ‘착한 아이 콤플렉스‘ 식의 죄책감에서 유발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미시적, 거시적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거부는 돌봄인과피돌봄인의 수직적 관계에서 돌봄과정을 바라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한 저항이다. 즉 석우의 행위는 복합적이고 수평적인 돌봄행위와 과정을 단지 돌봄인(비장애인)의 자선적 의미의 희생과 봉사정신과 행위의 결과물로써 축소,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거부권 행사인 셈이다. 또한 석우의 거부권 행사는 1인 ‘전담 마크맨’식으로 비장애 또래도우미를 장애아동에게 배치하여 장애와 비장애 아동들 모두에게 고충을 주는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학교관행들과 형식적인 ‘선행상’ 수여로 학교의 편의시설 및 서비스 결여와 학교 구성원들의 배려와 책무성 부족 등의 구조적 문제들을 봉합하려는 ‘어른’들 문화의 깃털 같은 가벼움과 윤리성 결여에 허를 찌르는 ‘반격’이기도 하다.

선행상 거부 사건 이후, 석우는 여전히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돌봄의 희로애락을 체득한 그에게 가방 들어주는 것에 수반되는 육체적 피로, 주변의 시선과 축구경기 비참여 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석우 옆엔 언제나 공감과 협력의 소중함을 알고 실천하는 영택을 비롯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를 경험하는 필자는 얼마 전 부터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나는 활동보조인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배우는 등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했으면서도 자립강박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도움을 거부했던 나, 장애학자로서 돌봄과 협력을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체득하지 못했던 나를 깊이 반성한다. 나는 오늘도 활동보조인 가방(백팩)의 끝자락을 잡고 ‘느릿느릿’하게 그와 ‘함께’ 걷는다. 영택과 석우가 존재함으로 인해, 보조인과 내가 미국 철학자 에바키테이(Eva Kittay)가 “사랑의 노동(1999)”이라고 부른 돌봄(care)을 실천함으로 인해, 창출되는 고용, 생산과 소비, 배려, 공감, 협력과 연대와 같은 유·무형적 자산들이 사회 전역으로 확장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참고문헌

 

고정욱 (2002). 가방 들어주는 아이. 백남원(그림). 사계절.

Kittay, E. F. (199). Love's Labor: Essays on women, equality, and dependency. New York, NY: Routledge.

 

 

작성자우충완/ 장애학 연구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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