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동정은 싫다(11) 제4장 숨겨져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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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미국 장애우 운동사(10)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3)
(A Hidden Army for Civil Rights)
관심집중…
연재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번역연재 열 한번째.
ADA 제정과정에서 가장 소중하게 얻은 점은 감추고 억누르고만 있었던 장애우의 권리의식을 장애우 스스로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번 호에는 들불처럼 일어나 거대한 파도와 같은 힘을 만들어낸 미국 장애우들의 시민권 획득과정을 소개한다.
저자: 조셉 피 쉐피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서동명 |
들불처럼 일어난 시위대의 물결
밥 카프카가 보기에는 랜디 제닝스와 같은 재활전문가들의 활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업상담, 훈련 그리고 배치와 같은 재활서비스는 법에 의해 1920년부터 실시되고 있었고, 이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미국재활협회는 1925년에 출범하였다. 오늘날 이러한 재활복지체계에 의한 사회복귀는 한해에 20억달러가 들어가는 정부지원 사업이다. 1989년에는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서비스를 받았으며, 이중 약1/4 정도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활협회에 따르면 전체 대상자 가운데 단지 5%만이 이러한 체계에 의한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프카는 재활상담가들의 서비스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보다는 불필요한 사람들만을 위주로 이뤄진다고 불평하였다.
제닝스 역시 장애우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재활전문가들은 제한된 재원과 법률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원조를 제공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제닝스가 잘 알고 있었다. 19살 때 직장을 구했으나 다음날 당장 그 직장에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버스에도 리프트가 없었다.
제닝스가 보기에 무엇보다도 이 법안이 중요한 것은 ADA가 장애우와 비장애우와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페라에 가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과 같은 장소에 앉아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버스에 그들과 분리돼서 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제닝스와 같은 전문가들과 다른 장애우들은 법 위반과 집단시위와 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는 카프카의 "모든 공공건물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임(이하 ADAPT)"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ADAPT는 항의시위를 백악관에서 시작했다. 또 다른 250명의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들의 "정의의 행렬의 바퀴"인 휠체어로 그들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도전은 다른 집단까지 퍼져나갔다. 동시에 재활협회에서 주최하는 입법을 위한 집회가 개최됐다. 그래서 재활전문가들은 이 시위에 함께 하기 위해 아침회의를 취소했다. 그것은 1990년 3월 카프카와 제닝스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어떻게 백악관 앞에 함께 모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이유다.
많은 휠체어 장애우를 포함한 4백75명이 백악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합류했다. 이러한 수는 다른 항의시위와 비교해 볼 때 굉장히 적은 수였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며, 심지어 레스토랑이나 극장에 가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시위참가를 위해 전국을 횡단해 온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2백 명의 ADAPT시위대가 묵고 있는 숙소중 단 3개의 방만이 휠체어로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이와 같은 수의 수많은 시위들이 있었으나, 각계각층의 장애우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모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적은 수의 참가자 수는 이들이 표현하는 항의의 정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하게 했다. 보이든 그레이는 백악관 앞에서 시위 군중에게 짧게 이야기하고자 모습을 나타냈다. "만약 이러한 시위가 천천히 행해진다면 20년 정도는 걸릴 것이다"고 그는 흑인들의 시민권운동의 투쟁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이 행진에 참석한 사람들은 펜실베니아의 다른 끝에서 국회의사당 앞으로 출발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 카프카는 스피커를 가져왔다.
첫번째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대통령 산하 장애인고용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새롭게 임명된 저스틴 다트였다. 다트가 첫번째로 한 일은 위원회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Committee on Employment of the Handicapped President"s Committee on Employment of People with Disabilities로 바꾸었다). 휠체어를 탄 채 다트는 시위대에게 "우리는 미국인이며 다른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우리도 가지기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라고 선동하였다.
국회의사당을 기어서라도 오르자
켐프, 갈라데대학교 초대 총장인 조단, 그리고 전 백악관 언론비서 제임스 브래디 등 여러 사람에게서 주목할만한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ADAPT의 전국적 지도자인 마이크 오우버저가 전동휠체어를 탄 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군중의 반응은 갑자기 파도처럼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ADAPT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했던 9학년 시절을 회상하였다. "20년 전에 나는 완전히 평등한 미국시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었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아직도 법률적으로 차별받는 2류시민으로 여기에 서 있다." 오우버저의 목소리가 자신이 아직껏 찾지 못하고 있는 시민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을 때,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점점 더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우리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따돌림당하고 있다. 우리는 집을 가지고 직업을 가지는 것도 거부당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권리침해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오우버저의 연설은 시위대의 외침에 묻혀버렸다. "접근은 우리의 권리다"라는 외침이 되풀이되는 동안 36명의 ADAPT 항의자들은 휠체어를 버리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애우들이 의사당에 기어올라가는 모습은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혐오감을 주기도 했다. 이날 메리 존슨을 포함한 몇몇 활동가들은 이렇게 "기어가는 모습"이 나약하고, 아이와 같은 인상을 남기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실제로 취재카메라는 이날 8살인 제니퍼 킬란이 팔과 무릎으로 기어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의 머릿속에 ADA투쟁의 이미지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역민방에서는 그 날 밤에 ADAPT가 주장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보도했다. 장애우들은 시민권을 원하고 있다고.
다음날 ADAPT는 성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방문하는 계획을 잡아놓았었다. 실제적인 내용은 국회의사당 본청에 들어가서 바로 그 다음날 ADA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요구할 방침이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국회의사당 방문의 주동자가 근처에서 기다리는 동안 150명의 ADAPT 성원들은 본청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요구를 의장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ADAPT 시위대들조차 깨달은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이것은 역시 아주 중요하게 준비된 사건이었다. ADAPT리더들은 몇 시간 동안 국회의사당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며, 의장단이 그들을 만나러 오도록 압력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것은 집단의 힘을 이용한 시위였다. 페트리샤 라이크 역시 이 항의가 영향을 끼쳐 주저하고 있던 의원들이 장애우들의 절실한 갈망을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의장단은 ADAPT의 요구를 직접 들은 후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좌절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마이클 의원이 말하자 활동가 마크 존슨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화가 나있는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의 합창과 고함소리가 국회의사당 건물 전체에 울려퍼져 갔다. 카프카와 다른 ADAPT성원들은 체인과 자전거를 그들의 휠체어와 함께 묶어 놓았다. 국회의상당의 경찰들이 주동자를 체포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휠체어로 하나의 장벽을 만들어 거부했다. 장애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로버트돌 상원의원이 나와서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거듭 만류했을 때 워싱턴장애우 활동가 중 일부는 무척 고민을 하기도 했다. 제닝스도 여기에 동의했다. 제닝스는 카프카와 ADAPT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외침으로써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지만,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 논리의 신빙성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이것은 ADAPT의 역할이 아니라고 카프카는 생각했다. ADAPT 시위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ADA법안의 즉각적인 표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러한 대결을 통해서 의존적인 사람을 살아온 장애우에게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고자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우를 아이나 무능력자와 같이 생각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자선을 바라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장애우에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들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국회의사당 주변의 경찰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한 번에 한 개씩의 휠체어를 옮기는 동안 제닝스와 그 대표단은 의회 임원들과 협상을 이끌어냈다. 7명의 여성대표들은 이번에 새로 당선된 피터 게른 하원의원을 만났다. 계속해서 ADA법안에 대해 로비를 했지만, 중소기업들은 법안이 통과된다면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불평을 들었다고 그는 밝혔다.
여성대표들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재활전문가들은 이 법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고용이 가능한 사람들을 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리어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그들은 설명했다.
휠체어장애우 엘리자베스 가스파드는 편의시설설치에 재정이 많이 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리의 장애 때문에 서 있거나 장시간 걷는 것이 어려운 그녀에게 있어 편의시설은 고용주가 일을 하는 방에 쉴 수 있는 의자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등학생 때 장애를 갖게 된 그녀는 미래에 가정이나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행스럽게도 재활 직업 상담원들이 그녀에게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조언을 해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세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해 그녀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집 앞에 나갈 수 없고, 교통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면 평등한 고용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경쟁적인 노동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며 ADA는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자신있게 설명했다.
당시 국회 소위원회에서는 ADA 제정을 위한 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 AIDS협회 로비스트인 탐 세리단은 장애우법에서 에이즈환자를 제외하는 수정안을 의원들이 반대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많은 장애활동가들은 동성애자권리운동이 일반인들에게 호응을 받는 것에 대해 일종의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단은 이것이 수많은 장애로비스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재활협회와 같은 단체들의 영향 때문에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1990년 장애우를 위해 6백억불을 사용하였다. AIDS환자들은 정부프로그램에 압력을 행사할 연결망이 없다고 세리반은 말한다. 동성애자권리원동이 더 눈에 띄고 더 응집력이 있고, 더 대중들이 의식하게 되지만 1990년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국가적인 차별금지법이 생기는 한 가지 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AIDS는 만성적인 질병이기 때문에, 이 병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양성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ADA법 범위 안에서는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애우들과 동성애자들 사이의 동맹관계는 법안제정에 박차를 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동맹은 몇몇 국회의원들을 걱정시켰다. 텍사스를 대표하는 국회의원 중의 다른 의원들처럼 홀은 이 ADA법안이 에이즈를 가진 사람들의 보호를 포함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위험한 성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에이즈를 가지게 된 게 아니냐고 홀은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두통을 가진 사람들을 돕는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발레리 진쉬일레는 외쳤다. "차 사고가 났을 때 "당신은 과속을 했습니까?" 혹은 "술을 마시지는 않았나요?"하고 먼저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그들을 돕는다"고 홀은 인정하면서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수요일, ADAPT 시위자들은 더 대담한 행동을 계획했다. 국회의사당 건물까지 연결되는 지하철을 폐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4개의 시위대 집단이 지하에서 길을 잃어버려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결국 59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을 재판한 판사도 장애우였다. "태어났을 때 내 왼팔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법을 어기지는 않았다"고 워싱턴 판사로 버트 스코트가 설명했다. 그는 ADAPT 시위자들에게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떻게 법과대학원에 들어갔으며, 결국 그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68세의 이 판사는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결국 오우버저에게 5백달러의 벌금과 1년동안의 보호관찰 처분이 내려졌다.
스코트의 엄혹한 판결은 ADAPT의 활동가들을 격분시켰다. 그들을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은 그가 자신들을 경멸한다고 느낀 부분이었다. 무거운 벌금을 물었던 다른 ADAPT 리더들은 "그가 자신의 장애를 감추고 비장애우들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스코트는 얼마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시위자들이었더라도 똑같은 판결을 내렸을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들이 휠체어장애우라고 해서 법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이 미친 것이다."
ADAPT 활동가들은 하루종일 법원에 잡혀 있다가 절망감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금요일에 분리와 소외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코트 판사에 의해 강력한 처벌을 받은 오우버저, 토마스 그리고 세 명의 참가자들은 법원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램프가 없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ADAPT 모임의 대변인 티모시 쿡은 법원에 대항해 50만달러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973년 재활법 수정조항에는 모든 정부건물이 접근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야 했다.
심한 뇌성마비로 인해 언어장애가 있는 아서 캠벨은 법정에서 그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어 주도록 요청했다. 법원은 이에 동의했다. "여기 이 법정에서 휠체어를 탄 우리는 배심원석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판사의 자리에도 앉을 수 없다"고 그는 적었다. 보딘 판사는 캠벨의 말에 감동받았고, 이것은 장애우들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사회적인 권위가 있는 사람이 들어준 첫 경험이었다. 청각언어장애우들은 가지고 온 칠판에 한 자 한 자 글을 썼고, 법정은 정치집회의 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으며 박수치고, 소리지르고, 울부짖었다.
마침내 통과된 ADA!
덴버에서 온 조지 로버트는 ADAPT의 설립자인 웨이드 블랭크가 그의 지나온 생을 간략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웨이드는 기관과 양육기관에 버려져 25년간 쓸쓸하게 보낸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심지어 오스틴의 웨인 스팬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 조지 보딘 판사는 목이 메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주위 사람들은 나를 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들과 여러 번 싸우면서 나를 집에 있도록 했다. 단지 우리가 원한 것은 교육과 취업과 바깥외출의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활이었다."
보딘은 그 시위자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당신들의 행위에는 정당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벌금인 10달러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단상을 내려와서 법정을 돌면서 활동가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였다.
장애우들과 그의 가족, 정치가 그리고 전문가들의 연합된 지지에 의해 ADA는 의회장 안에서 신속하게 추진되어 갔다. 1990년 7월 26일 부시는 3천여 참석자들의 환호 속에 법안에 서명했다. 대통령은 이제 어느 극장에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 리사 칼에게 인사했다. 박수갈채와 함께 부시는 "이제 부끄러운 차별의 장벽을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이반 켐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시 행정부는 즉각적으로 ADA시행을 위한 조정작업에 들어갔다. 504조와 같이 4년간의 싸움을 거쳐 만들어진 법이 없었고, 이 법은 1992년에 시행되었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은 열성적으로 새로운 조치들을 따랐다.
ADA통과는 장애우에게는 지진과 같이 큰 사건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데 있어 매우 급진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즉 자신들의 소외된 삶에 대해 도전할 권리를 가진 소수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적인 승리였다. 비장애우들은 ADA의 통과를 장애우들의 권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으로 보는 정도만큼만 급진적이었다.(계속)
글/ 서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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