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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 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1)

본문

[번역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9)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 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1)
(A Hidden Army for Civil Rights)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 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관심집중…
연재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번역연재 아홉 번째,
이번 달에는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 ADA 제정당시 숨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당신은 극장에 들어서지 마시오

 

  리사 칼은 영화를 보기를 원했다. 1988년, 19세의 뇌성마비장애우 칼은 그래서 워싱턴 타코마에 있는 극장의 매표소에 자신의 휠체어를 직접 몰고 갔다. 그러나 극장측은 그녀에게 표를 팔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극장 안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여보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고 극장 주인은 이후에도 뻔뻔스럽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리사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다음 해에 미국 상원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울고 있었다. 나는 단지 다른 사람들처럼 영화를 볼 수 있기만을 원했을 뿐이다."
  칼은 미국장애우법 제정을 위한 증언시간에 이 같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1964년 시민권법안에서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것처럼, 신체 정신장애우에 대해서도 이러한 차별이 금지되어 있었다. 즉 극장주의 거부는 일반 사회의 편협함을 나타내는 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일이 칼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장애우들 가운데 거의 2/3가 극장을 가본 적이 없었다. 비장애우들은 단지 22%만이 극장에 가보지 않았다고 답한 사실과 확연히 비교가 되는 것이다. 비장애우들 중에서 겨우 5%만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장애우는 17%가 그렇다. 또 식료잡화점에서 쇼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비장애우가 2%임에 반해 장애우들은 13%가 그런 경험이 없었다. 여론 조사원들이 왜 장애우들이 그렇게 개별적으로 분리돼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질문했을 때, 59%의 장애우들이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렵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칼이 극장에서 당했던 것처럼, 그들은 차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40%는 공공장소에서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고 지적했으며, 교통체제가 접근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장애우들이 49%였다. 이것은 장애우 중의 대부분이 직업을 갖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66%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 조사결과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즉 고용주가 그들을  고용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혹은 일터까지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그 원인이다.
  다른 어떠한 집단들도 장애우들처럼 미국 사회에서 그렇게 고립되거나 분리되지 않았다. 미국 흑인들이 공공장소와 직업에서 법률적인 통합을 획득한지 25년이 지났지만, 비슷한 분리와 고립이 수백만 장애우의 일상적인 삶에서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동안 장애우들은 잊혀진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은 승리는 아직 소외와 차별을 끝내는데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것이 왜 장애활동가들이 아직도 더 많은 시민권리 조항을 얻고자 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이다.
  처음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가 차별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이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동정이 아닌, 기회와 접근을 얻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버그도르프의 일화가 있다.

 

 

장애우의 권리 일깨워준 해고조치

 

  1968년 20세의 버그도르프는 여름방학을 보내기 위해 대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이아나에 있는 전기기술자조합에 의해 후원 받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오하이오시 전기기술자의 아들들이 그들의 아버지와 친구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었다. 버그도르프가 여름동안 조수로 일하는 것을 첫 번째 직업으로 구했을 때, 현장주임은 버그도르프의 오른쪽 팔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해고했다. "여기서는 너 같은 불구자는 고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이때까지 버그도르프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아버지는 그에게 각각의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한쪽 팔에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도구의 사용법을 알았고 실제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장애에 대해서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농구 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것을 왼쪽 팔로 할 수 있었다.
  버그도르프를 현장주임이 해고했을 때, "당신은 법을 어기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한쪽 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차별반대법이 있지 않다는 것을 버그도르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그도르프가 그 자신을 증명시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장애를 가진 미국법인(ADA)"은 처음에 13명의 레이건파에 의해서 제안되었다. 이들은 포괄적인 시민권법안을 채택하기 위하여 1988년 2월 워싱턴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입법은 위원회의 대리인이며 연구전문가인 버그도르프에 의해서 초안이 작성되었다.
  버그도르프가 그 직장에서 장애를 이유로 해고된 지 20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법대에 들어갔고, 장애우관련 법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차별금지법의 개요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장애우국가위원회에 자신의 초안을 가지고 갔고, 여기서 그는 장애우에 대한 시민권을 주장하는 저스틴 다트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다트는 장애우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50개 주 전체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여행경비를 모두 다트 자신의 사비로 충당하였다. 여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똑같았다. 즉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차별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1948년 다트가 18살 때, 그리고 버그도르프가 유아였을 때 그들은 소아마비에 걸렸다. 이때 다트는 휴스턴대학교에서, 휠체어에 타고있다는 이유로 교사 임용이 보류되었고, 그는 이러한 결정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통합클럽을 조직하였다. 성원들은 모든 텍사스 지역의 대학교가 흑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1만5천명의 학생들 중 단지 5명만이 이 클럽에 가입했을 뿐이다. 5명 중에 3명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이 모임을 통해 자신들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또 다른 억압을 알게 되었다.

 

 

져스틴 다트의 새로운 깨달음

 

  1967년 다트는 베트남 남부지방을 여행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이공에서, 소아마비장애아들을 위한 오두막 속에서 다트는 지옥의 광경을 보았다. 백여 명의 아이들이 이 오두막에 있었는데, 죽은 채로 방치되거나 혹은 아무 곳에나 묻혔다. 자신과 같은 소아마비 장애아들은 희망이나 미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는 큰 눈을 가지고 다트에게 손을 내밀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순간 다트는 분노와 무력감, 슬픔, 그리고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광경을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나는 시카고에서 하녀와 운전사를 둔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나는 일본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고,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매우 안이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다트는 사업도 그만두고, 다른 장애우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남은 삶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그와 아내 요시코는 안락한 생활을 그만두고, 베트남의 버려진 농가에서 살았다. 그들은 1974년에 다시 미국 텍사스로 돌아왔으며, 다트는 여러 장애우단체의 현상태에 대해 지적하기 시작했다.
  다트의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공화당원이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의 몇 안되는 절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캘리포니아 지역 내 백만장자들의 모임의 리더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레이건에게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아버지와 자식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는 장애우지지정책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내 의견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도 확신할 수 없다."
  다트와 버그도르프는 그들이 수행한 일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 때문에 능력이 없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다트는 다리에 심한 장애가 있었고, 버그도르프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장애를 한 팔에 가지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장애를 갖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부자이거나 가난한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의 능력이나 원인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장애우가 된다는 것은 그의 진실된 모습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장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가장 큰 장벽이 된다. 이러한 좌절은 장애우권리운동 과정에서 열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는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트리샤 라이트는 1980년 워싱턴 지역 장애우계에 폭풍같은 존재로 등장했다.
  당시 장애우압력단체들은 대부분 전문가와 부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료모델에서의 요양원, 사회복귀의 장을 제공하는 일터, 직업재활 등의 프로그램을 위한 연방정부의 재정을 받아내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장애우운동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트는 이러한 기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버클리에 기반을 둔 "장애우권리·교육·방어기금(DREDF)"을 세운 것이다.
  라이트는 그녀가 워싱턴에 온 첫 주에 장애우 압력단체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장애우압력단체의 로비스트는 냉소를 보내며 얘기했다. "우리에게 예산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이트는 이에 싸늘하게 응수했다. "그러시겠지."
  이 뻔뻔스러운(?) 신출내기가 옳다는 것은 머지않아 증명되었다. 라이트와 로비스트는 레이건 부시 행정부와 504조와 장애아동을 위한 교육권확보를 위한 1982년 투쟁에서 친구이자 동맹자가 되었다. 주택차별법안처럼 시민권의 승리가 다가왔다.
  코네티컷에서 성장한 라이트는 정형외과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발생한 퇴행성근육질병은 이러한 꿈을 빼앗았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요양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 일어나기 시작한 탈시설화 운동에 몰입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독립생활운동"이라는 이념을 충실히 실현시키고자 했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작은 도시인 마틴즈에 거대한 그룹홈을 세웠으며, 그들에게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그녀가 이 직업을 갖게 된 지 6개원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라이트는 지도감독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그룹홈 생활자 중 두 사람을 밤에 침대에 묶어두라고 요구하였다. 라이트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하자 결국 해고되었다. 이 그룹홈 계획은 실패하였고, 32명의 사람들은 노인요양원으로 흩어졌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장애우를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흑인이나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시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장애우로 태어났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곤 한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완곡요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제공한다", "돌보다", "보호한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1997년에 라이트는 HEW(보건교육복지부)에 가입을 하였고, 휴맨과는 2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형태의 DREDF(독립적인 삶을 위한 버클리센터의 법률 지부)에 참가하였다.

장애를 가진 미국인법의 첫 번째 버전은 실패하였다. 버그도르프의 법안은 1988년의 100차 국회일정이 거의 끝날 무렵 제안되었지만 입법부 의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 법안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기자들도 이 법안의 실현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시행정부가 출범하면서, ADA는 라이트가 활동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라이트는 영리하고 집요하게 장애우를 위한 시민권운동을 펼쳐나가는 전술가였다. 탐 하킨 상원의원은 라이트와 함께 일하면서 ADA를 다시 고쳐 썼다. 이번의 자유주의자들은 장애우협회에서 레이건파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범위를 더 좁혔고, 더 기업가들의 입맛에만 맞게 하였다. 따라서 법제정이 더욱 쉽게 됐다.

 

 

청각장애우 비서는 왜 안되는가

 

  버그도르프, 다트,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더 급진적인 법안을 작성했었다. 2년 안에 모든 버스나 지하철, 레스토랑, 그리고 극장에 편의시설을 설치해 장애우들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2층 건물도 파산하고 싶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했다. 그러나 변화된 법안은 단지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나 오래된 건물을 수리할 때 접근이 가능하도록 고칠 것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전체 비용의 1%보다 더 적게 만들어 준 것이다. 또한 원래의 법안에서 빠진 것은 만약 그들이 직업상 차별을 받는다면, 장애우들이 고소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라이트가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걱정했다.
  심지어 버그도르프의 원법안에서 변화된 것은, ADA가 현존하는 시민권 법률로부터의 현저한 이탈이었다. 장애우권리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업비의 사용에 있다. 원래 레스토랑은 외부에 램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수백 달러를 사용해야만 했다. 또 2층 이상 되는 백화점이나 사무실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옷가게들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시설을 고쳐나가야만 했다. 1973년의 재활법 개정안은 정부의 재정을  얻는 대가로 고용주들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러한 변화가 워싱턴에서도 똑같이 진행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법률이었다.
  사업에 있어서 이러한 잠재적인 부담을 알고, ADA는 단지 그들이 쉽게 성취될 수 있고, 합리적인 지출일 때에만 변화될 수 있도록 명기하였다. 작은 사업체는 몇 백 달러의 사용이 요구되었고, 더 큰 것은 몇 천 달러 등의 각각의 사업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에 의존해 요구되었다.
  그러나 법률은 예산비용의 윤곽을 정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에도 법원의 결정에만 의존했다. 상점에도 장애우들이 접근가능케 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법칙은 주인의 투자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1982년의 연구에 의하면 편의시설설치 사례의 절반은 돈이 거의 안들거나 아예 안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책상배치를 다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30%는 1백에서 5백불 정도 사이에서 이뤄졌다. 특별히 영세한 많은 사업체들은 법률이 막연하고, 잠재적으로 돈이 많이 든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사업장들이 장애우들은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 새로운 원천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ADA에는 또 다른 비용이 있다. 새로운 버스와 정류장 등이 휠체어이용자도 접근이 가능해야 하고, 전화회사는 청각장애우와 건청인 사이에서 메시지를 타이프로 쳐주고 말로 전해줄 사람들을 고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정부프로그램은 장애우들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아야 했다.
  ADA가 주로 요구했던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 장애우들을 작업장과 사회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한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버그도르프는 장애우들의 일할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요구를 하기 위해 시각장애변호사인 크리스 벨을 고용하였다. 사람들은 벨에게 "청각장애 여성이 비서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그에게 안되는 일은 안되는 거라고 얘기했다. 어떻게 그녀가 전화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왜 우리는 모든 비서가 꼭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무실에서는 다른 많은 비서가 있고, 그들 중의 한 명은 전화를 받고 다른 사람은 타이핑을 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였다.(계속)

 

글/ 서동명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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