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 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2) > 문화


[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 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2)

본문

 [번역연재] 미국장애우 운동사(10)

동정은 싫다

 

제4장 숨겨져 왔던 장애우의 시민권을 위하여(2)

 

(A Hidden Army for Civil Rights)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 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관심집중…
연재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번역연재 열번째.
ADA 제정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번 호에서는 ADA 제정을 결국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많은 지지자들과 장애우 활동가들의 노력을 소개한다.

 


장애우운동의 버팀목이 됐던 "숨어있는 사람들"


   미국장애우법인 ADA 제정을 위해 장애우들은 숨겨져 왔던 시민권 운동체계를 비밀스럽게 구성하기 시작했다. 장애우 활동가들은 엄연히 차별의 원인이 다른, 흑인, 여성, 그러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을 모델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장애우 인권운동은 수만 명의 항의자들로 거리를 뒤덮을 만큼 엄청난 조직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곳에는 마틴 루터 킹이 없었다. 각 인권운동들은 동일한 동기도 없었고, 커다란 분노의 원인도 없었다. 또 실제로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장애우 운동은 다른 인권운동과는 다른 독특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토니 코에로 하원의원은 이러한 힘이 장애라는 사회적 낙인을 거부하고 장애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숨어있는 사람들(hidden power)"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장애우 자신일 수도 있고 그들의 가족일 수도 있다.
  코에로 자신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16살 때 가족 모두에게 닥친 트럭교통사고로 그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증과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의사가 간질이라는 진단을 내렸을 때, 코에로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가톨릭에서 간질환자가 된다는 것은 미쳤거나, 혹은 악마가 몸 안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에로 부모들도 역시 두려워했다. 그의 가족들이 이민 온  포르투칼에서는 간질을 악마의 상징이거나, 혹은 조상들이 지은 죄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모든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 간질은 체크의 대상이 되었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모든 것에서 거부당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그에게 운전면허증 교부를 거부했다. 심지어 1978년에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때, 상대후보는 유권자들에게 "만약에 그가 백악관에 가서 정견을 발표하는 동안 그가 발작을 일으킨다면 어떡하겠습니까?"라고 인신공격을 했다. 코에로는 어찌되었건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는 장애 때문에 수 차례 거부당했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커다란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코에로는 ADA 법안의 주된 후원자가 되었다. 의회에서 ADA 첫번째 안에 대해 공화당원 로웰 와이커 의원이 지지를 표했는데, 그에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이커가 88년 재선에 실패하고 코에로도 90년도에 의회활동을 끝내자 ADA 제정운동은 후퇴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 법안을 지켜주고 발전시켜 나가는 숨어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의회에서 코에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메릴랜드 하원의원 스테니 호이어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코에로는 호이어의 부인이 간질환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 중심인물인 하킨스는 청각장애우인 형제가 있었으며, 에드워드 케네디는 암 때문에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이 있었다. 또 상원의장인 밥 돌은 2차 세계대전 중 부상으로 오른팔이 마비되었다. 유타주의 상원의원인 오린해치는 의회장에서 자신의 처남이 소아마비장애우이며 밤마다 특수한 장치 안에서 잠을 잔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결정적인 도움은 시민권협회장인 랄프 니스로부터 받았다. 그는 첫번째 의제로 장애우 인권을 언급하면서 장애우들이 차별에 직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숨어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놀랍고,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록될 사람을 단연코 조지 부시 대통령일 것이다. 그 역시 가족 중에 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1953년에 백혈병으로 세 살 때 죽은 딸이 있었고, 아들 네일은 심한 학습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부시의 막내아들인 마빈은 1985년에 결장 때문에, 인공항문으로 생활해야 했다. 부시가 매우 좋아한 삼촌인 외과의사, 존 워커는 한창 출세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 소아마비에 걸려 더 이상 수술용 칼을 들 수가 없었다. 만능스포츠맨으로 손꼽히던 워커의 인생은 소아마비로 인해 형편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1982년 부통령으로 재직할 때 부시는 ADA 제정운동에 있어 가장 강력한 방해자로 보였다. 모든 장애아들이 공공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1975년의 법과 1973년의 재활법의 개정안의 청원을 가로막았던 사람이 마로 부시였던 것이다. 1982년에 주정부와 지방정부는 장애아동의 교육에 너무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에 불평하였다. 대다수의 기업주들과 주정부도 반차별법으로 인해 여러 부대시설을 뜯어고치는 데 들어갈 돈을 걱정하였다.
  이 법은 1973년에 통과했지만 세부규칙은 1977년까지 제정되지 않았었다.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1981년에 각종 규제를 폐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은 부시가 부통령으로서 해야할 가장 첫번째 일이었다. 즉 504조의 첫번째 규칙으로 모든 장애아동들의 교육을 보장해야 했다.
  장애우들과 부모들은 여기에 아주 빠르게 반응하였다. 4만여 통의 편지가 백악관으로 날아들었다. 부시는 유권자 중에 각지에 숨어있는 지지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항의는 자발적이었고, 아주 급속한 것이었다." 부시의 법률고문인 그레이는 그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냉소적인 정치적 반응은 아니었다. 이것은 실제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와 부시에게 이것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확실히 장애우들은 새로운 행정부에게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부시는 장애우단체들이 행정부의 계획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부시부통령은 장애우 인권운동가인 에반 캠프와 대면하였다. 캠프는 그때 랄프 나더라는 소비자운동가와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장애우 인권센터의 소장이었다. 그는 비록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부통령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캠프는 다소 보수적인 논리를 들었다. 장애우들은 독립적이기를 바란다고 캠프는 부시에게 설명했다.
  그들은 일방적인 정부의 복지급여체계에서 벗어나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온정주의적인 정부가 그들을 한없이 도와주기만을 원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시가 장애우들이 어떠한 도움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찾기를 원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그레이는 전한다. 1983년 3월, 부시는 그때까지 504조에 대해 보였던 반대의사를 자진해서 포기했다. 이 사실은 곧 캠프와 장애우 집단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장애우들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캠프와 그레이의 소중한 우정


  1964년 캠프는 버지니아대학교 법률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39군데의 법률회사에 지원을 했건만 39번 모두 거부당했다. 다행히 외삼촌인 드로우 피어슨이 워싱턴의 힘있는 정치평론가였기 때문에, 그 덕택에 그는 내국세사무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다시 증권거래연구소로 옮겼다.
  캠프는 신경근육질환이 있었지만, 1971년에 다리가 부러지기 전까지는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가 일단 휠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6년 동안 더 이상 승진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증권거래 연구소를 상대로 고소했고, 결국 승소했다.
  캠프와 부시는 끊임없이 정치적인 대결을 하면서도 서로의 팬이 되었고, 후에 동맹자가 되었다. 부시는 캠프를 통해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부시가 장애우 집단에게 연설을 할 때, 캠프에게 연설문을 손질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1987년 부시의 추천에 의해 캠프는 고용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연방정부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89년에 부시는 대통령이 되었고, 캠프는 의장이 되었다.
  장애우운동에 있어서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친목은 1982년 있었던 회합일 것이다. 이것은 부시의 법률고문인 그레이와 함께 한 것이었다.
  캠프와 그의 동료이자 장애우 교육운동가인 패트리샤 라이트는 그레이와 수많은 시간 동안 장애우들의 권리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의 우정은 발전하게 되었다.
캠프와 그레이는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법의 제정과 개정작업이 사회를 바꾸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데에 둘 다 생각을 같이했다.
  장애우는 아니었지만 그레이는 본능적으로 캠프의 투쟁을 이해하고 있었다.
  10살 때 그레이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복부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간 뒤 그는 심지어 하버드대에서도 남부사람들은 고집불통이고 교양 없고 무식하다는 북부 사람들의 노골적인 무시를 받아야 했다. 그는 차석으로 대학교를 마쳤으나 그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부지역 사람들의 억양을 북부사람들이 비웃었기 때문에 차라리 청각 장애우인 체 하는 편이 나았다"고 그레이는 회상한다. 이렇게 편견 때문에 고통스러운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 장애우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그레이는 절감하고 있었다.
  캠프와의 우정을 쌓아나가는 동안 차별철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하게 되었다. 처음 그레이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친구가 계단 때문에 마음놓고 원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의 집도 혼자 힘으로 드나들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편 504조를 놓고 의원들과 장애우들의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 특히 예산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장애가 가벼울수록 아마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며, 장애가 심할수록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작았다.

 


장애우와 그 가족들은 개발되지 않은 유권자


  워싱턴에서 준비되고 있는 장애우인권에 대한 법안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핵심적인 사건이 1988년 3월 발생했다.
  당시 캠프와 다른 활동가들은 워싱턴 호텔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그 지지자들 중 대부분은 민주당원들이었고, 나머지가 공화당원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각각 나누어져 1988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서서히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뭉치기 시작했고, 각 당의 후보자들에게도 같은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한 목소리로 장애우의 권리를 요구했으며, 의회에 ADA 제정을 동시에 요구한 것이다.
  캠프는 부시를 지지했다. 3달 후에 부시는 "나는 장애우들도 통합교육을 받고 일반인들의 세계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 말은 호의적인 부시의 이미지를 더욱 높였으며, 장애우들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견지명이 있는 부시의 여론조사원은 몇 년간의 분석 끝에 장애우들과 그의 가족들을 "개발되지 않은 유권자"라는 충고를 선거본부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장애우의 권리에 대해 부시가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장애우 유권자들은 두드러지게 부시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부시가 민주당의 마이클 두카키스 후보에게 11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에 부통령인 제네비 진영에서는 투표결과 7%로 나타난 표차 중 3%는 장애우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평했다.
  사실 수많은 표가 부시에게 이동했다. 이전의 여론조사에서는 장애우들의 49%가 두카키스를 지지한데 반해 공화당의 지지는 44%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국 내 장애우의 수가 3천 5백만에서 4천 3백만 정도나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장애우 운동의 힘은 아직 미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애우 인권운동은 이렇게 흩어져 있는 힘들을 하나로 묶었다. 수백 가지의 장애가 있으며, 각각의 집단들은 그 자신의 특정장애와 관련된 이슈와 사건에만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단체들끼리 충돌하기도 하고 심지어 같은 영역의 장애우들 사이에서 더 큰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전국시각장애우연합회 회원들은 다른 장애우 집단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ADA에 대한 지지를 보류하였다. 시각장애우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가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교통신호등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소리로 신호를 보내는 조치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비행기에서 비상구 옆의 자리를 허락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미국시각장애우협회는 이 연합회의 주장들에 완전히 반대하였으며, ADA에 전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였다.
  ADA는 차별에 대항해서 여러 분열된 단체들의 함께 투쟁이 나서도록 만들었다. "간질을 가진 사람들도 이제 청각장애우들의 법률제정 운동에 함께 지지를 보내야 한다"고 장애우 활동가 리인즈 세비지는 얘기했다. "이 일은 결코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미국당뇨협회와 같은 큰 조직에서부터 중증장애우협회와 같은 소규모 조직까지 1백 80여 개의 전국 조직들이 그 법안에 서명했다. 지체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 정신지체, 정신병 등의 장애와 에이즈, 만성피로증후군 등의 주요한 장애영역을 망라한 것이었다. ADA를 통과  시키기 위해서 장애우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 집단까지 모두 동맹자로 만들었다.
  몇몇 장애우들은 비장애우 전문가들이 너무 통제적이고 온정적이라고 불평하였다. 사실 의료진이나 사회사업가들은 수혜자들이 희망하는 바를 잘 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집단의식에 위협을 느꼈다. 장애우들을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켜 의견을 나눠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심지어 자신 직업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그들 자신을 새로운 수백만의 클라이언트들과 파트너로서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고, 점점 더 많은 장애우 젊은이들이 전문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모든 버스에 리프트를 설치하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이 돌아온 밥 카프카와 랜디 제닌스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스타일이나 전술상 크게 달랐지만 1990년 워싱턴에 장애우를 위한 시민권법안의 통과를 위한 운동가로 텍사스 대표로 왔다는 목적은 같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카프카는 "모든 공공건물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임(ADAPT)"의 열렬한 투사들인 3천명의 장애우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국회의사당 점거를 불사하며 편의시설문제를 제기  해 나갔다.
  한편 제닌스와 17명의 재활 전문가들은 의회의 의원들을 만나 왜 장애우와 같은 수혜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한지를 정중하게 설명했다. 이 두 집단들은 의회의 의원들이 장애우들이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많은 차별들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1983년 창립된 ADAPT는 모든 도시의 버스에 리프트를 설치하도록 하는 일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버스를 탄다는 것은 평등이 가장 기본적인 상징이었다.
  애틀랜타지역 활동가인 마크 존슨은 "흑인들은 버스의 앞에서 타는 권리를 위해서 싸웠다면, 우리는 버스에 탈 권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라고 그는 단적으로 설명했다.
  8년 동안 수백 명의 ADAPT 회원들은 전국을 돌면서 항의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미국의 공공버스조합을 혼란에 빠뜨렸다. 수많은 회원들이 체포되면서도 장애우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을 배제한 도시들을 상대로 폭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그것은 의로운 싸움이었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점점 더 나빠졌던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장애우 집단들조차도 이들을 이단자로 단정지었다.
  이러한 외부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ADAPT 창립자인 블랜크는 이 조직을 무대의 뒤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요한 연결고리는 에반 캠프였다. 그 급진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의 끊임없는 옹호자들이었다. 때마침 워싱턴에서의 ADAPT의 행진은 의회와 백악관에 메시지를 보내는 데 가장 좋은 압력수단이 될 거라고 캠프는 판단하게 되었다.
  블랜크는 백악관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것은 ADAPT에 새로운 힘을 주었다. 워싱턴 행진 전 몇 달 동안 ADAPT는 애틀랜타에 있는 연방 정부의 건물에 리프트를 설치하지 않은 버스회사에 자금을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몇몇 도시버스노선들은 ADA가 영향력을 미치기 전에 리프트가 설치되지 않은 더 싼 버스를 사려고 하였다.
  이 때 아주 이상한 일이 애틀랜타에서 일어났다. 연방정부건물 밖에서 ADAPT 회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경찰들은 어느날 밤새 그들을 평화적으로 에스코트할 것을 명령받았다. 심지어 데모하는 사람들이 복도와 현관에서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담요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문은 대통령을 대신해 백악관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운송을 담당하는 부서의 공무원들은 버스회사들이 리프트가 없는 버스를 사는 것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것에 대해 협의했다. 워싱턴에서 ADAPT는 백악관 문에 경찰들을 묶어 두는 것과 같은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자신들의 호의를 나타내었다.
  페트리샤 라이트는 그러한 행동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면서 부시가 ADA를 공화당원들이 지지하게끔 더 많은 압력을 넣어줄 것을 주장하였다.(계속)

 

글/ 서동명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