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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제2장 동정에서 자립으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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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연재] - 미국 장애우 운동사

 

동정은 싫다

제2장 동정에서 자립으로(4)


(From Charity To Independent Living)

 

세계의 장애우 관련법 중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법이 바로 미국의 ADA(장애를 가진 미국인을 위한 법)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ADA가 제정되기까지 미국 내 장애우들이 펼친 장애우 운동을 기록한 운동사이다.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

    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

    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대자보와 수화로 전한 메시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연좌항의가 있었다. 휴맨이 이끄는 이 시위대는 HEW(보건교육복지부) 사무실의 6층을 25일 동안 점령하였다. 여기서도 워싱턴에서와 같이 음식과 통신을 차단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장벽도 이들 시위대를 막지 못했고, 정부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별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다른 지역에서의 연대 시위였다. 6일째 되는 날 샌프란시스코 대표인 필립 버튼은 음식공급과 전화연결을 요구했다. 여기서 휴맨은 빌딩 밖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연결할 수 있는 다른 창조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해서 대자보를 걸고, 청각장애 시위자들은 수화를 사용해서 밖으로 정보를 보낸 것이다.
  칼리파노는 법안 중 22군데에서 수정을 고려하였는데, 그 중에 장애우를 위한 시설에 "분리되어서 그러나 평등하게(Separate but equal)"라는 이념을 포함시키려 했다. 여기에는 학교와 병원에 자유로운 접근을 위해서 경사로를 두는 것을 제외시키는 것과 장애아동들을 받아들이는 일반학교보다는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휴맨은 "우리는 절대 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신들이 장애우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빌딩을 짓는다는 것은 분리를 조장하는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것을 인식할 때까지 연좌농성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로버츠도 또한 "통합이야말로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일반사회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나는 아름답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연좌농성은 장애우권리운동의 정치적인 시대를 가져왔다. 또 이러한 항의는 장애우들끼리 서로 다른 장애영역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했다. "여러 가지 다른 영역의 장애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다른 장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즉 이 시점까지 시각장애우조직, 청각장애우조직, 휠체어장애우 모임 등이 따로 있었다"고 25일 동안 농성장에 머물러 있었던 M. J. 오웬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소교구주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연방건물의 6층에서 시위자들은 장애우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였고, 사생활이 없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친근한 친구가 되었다. 한 지체장애여성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이 젊은 여성과 12명의 사람들은 둘러앉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여기서 그 젊은 여성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아름답게 되기를 바랬었고, 절름발이가 아니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아름답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웬도 "우리는 모두 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정신지체이거나 시각장애우이거나 청각장애우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은 모두 다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강하고 존엄하다"라고 말했다.
  이 법이 통과된 지 4년이 지난 후인 1977년 4월 28일 칼리파노는 장애우들의 잇단 항의에 굴복하여 일체의 변경 없이 법안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4월 30일 시위자들은 이 같은 승리를 기뻐하며 행진을 하였다. 동시에 칼리파노는 모든 장애아동의 교육을 위한 법안에도 사인을 했고, 의회는 1975년에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가 이러한 두 법안에 사인을 함으로써 학교는 모든 장애아동에게 대해 가능한 최상의 공공교육의 보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어 부모들이 수업의 질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법률은 상당한 수의 장애우가 대학교 진학을 가능케 하는, 교육받은 장애아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진보에 대한 반동

 

  매우 낙관적으로 보이기만 했던 운동이 시위자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곧 주춤하게 되었다. 버클리 부근이 이미 "장애우의 메카"라고 언론에 의해 꼬리표가 붙여졌지만 다른 지역에는 로버츠와 휴맨이 캘리포니아에서 구축하려고 했던 행동주의의 중심부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들은 아이오와주의 5백명 이하의 농장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보도했다. HEW 지방사무소는 그 마을의 공공도서관에 장애우들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통보했다. 공무원들 중 누구도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경사진 진입로를 만드는 데에 6천5백불이 소요되기에 이르렀다.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베코비츠는 나중에 장애우에 대한 반차별 조치의 급격한 실현은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분리수용의 종결이 재정절약을 의미했던 흑인의 시민권 운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베코비츠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비용은 정치적이었다. 미시시피대학의 제임스 메레디쓰는 경사로나 난간이 있는 넓은 화장실, 계단이 아니라 수업에 출석할 수 있는 용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 메레디쓰의 대학에 대한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비용을 절감하기보다는 비용이 드는 것이었다." 이는 곧 대학이 연방 조치에 따르는 행정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벽 없는 환경"의 건축가 론 메이스는 대학 관계자들이 대체로 장애우들을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지나치게 과대추산했다고 말한다. 북부 캐롤라이나 교육 공무원은 주립대학 건물을 접근가능토록 만드는 데에 150억불이 소요될 것이라고 추산했다고 메이스는 말했다.
  사실 변화의 대부분은 간단했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휠체어를 탄 학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대학은 학생들을 높은 층까지 옮길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보다는 1층으로 수업을 옮겼다. 메이스는 실제로 겨우 1천5백만불 정도의 비용이 든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노동부의 1982년 조사 역시 장애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큰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왜냐하면 작업장의 변화 중 50%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이 때문이었다. 나머지 30%의 변화는 피용자 1인당 1백불에서 5백불이 소요되는 것이었고, 최고로 비용이 많이 드는 4%의 변화도 피용자 1인당 2천불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인들이 504조를 사인한 직후 몇 년간 여전히 연방의 자금제공기금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있었다. 흑인들의 시민권운동의 진보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법원이 장애우들에게는 덜 호의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남동부 커뮤니티 칼리지 V. Davis의 최고 법원은 청각장애여성인 프랜시스 데이비스가 북캐롤라이나 대학의 간호원 양성프로그램에 그녀의 장애가 임상 과정에 참여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입학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장애우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직무에 고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그녀의 청각장애가 입학만 거절당하지 않는다면 학교에 가거나 간호원이 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들불처럼 번진 자립생활운동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행정부는 기업과 정부기관에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지는 규정들, 특히 504조와 교육법을 재검토하였다. 1984년 사회학자 스코치는 "장애우 권리 운동의 효과는 1978년 최고조에 달했으며, 레이건의 당선 이후 영향력의 감소가 지속적으로 빨라졌다"라고 썼다.
  몇 년이 지난 후 버클리에서 시작된 자립생활운동은 전국으로, 매우 빠르게 번져갔다. 1977년 장애우정책 전문가 마가렛 노섹에 따르면 미국에는 자활센터가 52개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집단활동의 열정적으로 번져 그 수가 3백개에 달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초기 자활센터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가장 활동적이고 번성하다고 여겨졌던 버클리 센터를 모델로 삼았다.
  1976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센터는 이미 약 1천명의 장애우에게 이동시 원조, 휠체어 수리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1988년 센터는 1년 동안 평균 81시간의 원조를 받는 1807명의 장애우를 도왔다고 보고하였는데, 전체 장애우의 4분의 3이 빈곤상태에 있었다.
  1978년 의회가 로버츠의 증언에 따라 자활센터를 운영할 기금을 주에 지원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면서 중요한 순간이 왔다. 이는 장애우들이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재정자금의 확보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센터가 연방의 돈에 의존했기 때문에 공공연한 정치적 활동의 대부분을 유연하게 해야 했다.
  자활센터의 번성은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심지어는 고립된 전원지역까지의 전국에서, 장애우와 그 가족 그리고 장애우 전문가들에게 장애우 권리운동의 새로운 철학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자활의 새로운 이상을 주장하였다. 센터는 아무도 심지어는 의사나 치료사들조차도 장애우의 욕구에 대해서 장애우 자신들보다는 잘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센터는 자신들의 자조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자기결정권을 갖는 장애우의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세대 이후의 미국의 장애우는 전장애아동교육법과 자활운동의 새로운 인식의 수혜자가 되었다. 1977년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장애아동들은 권리를 보장받는 첫 세대로서 198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학교를 떠나 학교에서 보호받았던 만큼의 장애우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는 사회로 나가는 시점이 새로운 장애우 활동의 출발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집단의 일원으로서 보호받았던 이 세대들은 앞서의 권익이 유린됐던 세대보다 스스로를 일으키는 데에 자기확신적이었다. 갈라데학생들의 저항, 장애를 가진 미국인법안의 통과, 504조의 확대 등은 197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 시위 참여 세대들의 장애우 권리행동의 짧은 동요가 떠난 자리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사건들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장애우라는 소수의 정체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버클리에 뿌리를 둔 자조의 이념에 근거한 활동가의 전망을 가져왔다. (계속)

 

글/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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