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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노피티(No Pity) 제 2장 동정에서 자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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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제 2장 동정에서 자립으로
(From charity to Independent)


 

버클리대에서 장애우 인권 운동 출발
 흑인이 대학교육을 받을 권리의 문이 열리고 인권운동이 시작된 1962년 가을 전신마비 장애우인 에드 로버츠 (ED Roberts)는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고, 그의 대학 입학은 장애우들의 인권운동의 출발이 되었다.
 그는 십대에 장애우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장애우의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가 14세이던 1953년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의 가정은 그의 부모와 그를 포함한 네명의 형제들 모두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게 된다. 이 장애에서 다른 가족들은 회복이 되었지만 풋볼팀의 쿼터백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던 로버츠는 머리만 움직일 수 있고 겨우 혼자의 힘으로 호흡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발병 후 첫 일년은 침대에만 누운 채 휠체어에도 앉을 수도 없고, 폐 근육의 마비 때문에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호흡할 수도 없어 공중전화부스 크기의 괴상하게 생긴 8백 파운드의 철로 된 폐(iron lung)속에서 하루에 18시간씩 보내야만 했다. 작은 전기모터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송풍기로부터 일정한 압력이 나와 그의 가슴, 흉부를 눌러 입을 통해 숨을 들이마시게 하는 이 기계 속에 로버츠는 머리만을 내놓고 똑바로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로버츠는 우울함, 무기력감,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무기력한 장애우(helpless cripple)"로 한동안을 살아야 했다. 대학진학, 결혼, 취업 가능성에 대한 그의 질문에 의료진의 대답은 항상 "불가능하다"였다. 여생을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결정은 단식으로 인해 7개월 동안 몸무게가 120파운드에서 50파운드로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비록 무의식적이었지만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자신이 먹는데 만큼은 "무기력한 장애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년의 입원기간 후에 로버츠는 아이롱 럭(iron lung)과 함께 버킹검의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통한 학교 수업에 참가하게 된다. 그의 새로운 동료학생들은 자신의 학교 책상에 앉아있고 로버츠는 아이롱 럭에 누운 채 전화를 통해 수업을 듣는 것이다. 학생들이 질문에 대답할 때에는 아이롱 럭에 누운 채 학급의 또래들이 마이크를 통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수업에 참가했다.
 그 교육을 통해서 발병 이전에는 지겹기만 하던 학교 수업이었고 읽기도 아주 느리게 배웠지만 현재 그에게는 교육만이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도 휠체어를 탄 기형적 인간 혹은 기계에 누운 불쌍한 아이로 그를 동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의 현재의 가장 주된 모습인 장애를 수용하고 조금은 다른 그러나 괜찮은 생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건강이 나아져 휠체어를 타고 고등학교 3학년으로 등교했을 때 동료학생들은 놀라움과 흥분된 눈으로 그를 반겨 주었고 그때를 "스타가 된 것 같았다"라고 로버츠는 회상한다. 하지만 그의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교육 관료들과 교장은 운전과 체육과목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졸업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직노동운동가였던 로버츠의 어머니는 이를 항의하여 재활과목으로 체육학점을 인정받고 운전과목은 면제되어 졸업을 하게 되고 2년제 산메토커뮤니티걸리티(San Mateo Community College)를 졸업한 뒤 장애학생을 위한 시설과 프로그램이 설치된 UCLA로 진학하려 하지만 산 마테오의 지도교수인 제인 워드(Jean Wirth)는 학교 선택의 기준을 비제한적 시설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 즉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 기준에서 선택할 것을 조언하고 그가 원하는 정치학 분야가 좋은 버클리대학에 진학하도록 권유 한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교육부는 그의 장애를 이유로 4년간의 대학 교육비 지급을 거절하지만 산 마테오의 교장, 학생회, 워드의 항의가 지역신문에 실리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이것은 로버츠에게 가치 있는 장애우에게 필요한 언론의 힘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
 버클리입학은 건물에의 접근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실은 접근이 불가능했고 식당과 도서관은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보조자나 친구의 도움을 빌어 휠체어에서 들어 올려져 교실에 갈 수 있었고 무거운 아이롱 럭이 들어갈 튼튼한 방이 없었던 기숙사문제는 학생 건강 서비스 센터의 장인 헨리 박사(Dr. Henry Bruyn)에 의해 교내 병원인 코웰(Cowell)에 기숙하게 되면서 해결이 된다. 몇몇 장애학생을 이전에 받아들였지만 실패했던 경험을 가진 버클리대학이 로버츠를 다시 한번 시험 케이스로 입학시켰을 때 지역신문은 "무기력한 장애우가 학교에 가다(helpless cripple goes to school)"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게 된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옷을 입혀 주고, 먹여 주는 조력자를 필요로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조력자를 고용했으며 때로는 친구들이 도와주기도 하였다. 조력자 비용은 주정부에서 지불했으며,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가장 처음 이러한 프로그램을 시작한 주가 된다. 그의 버클리대학 생활은 아이롱 럭밖에 있는 시간 동안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책읽기는 스틱을 입에 물고 책장을 넘겼다. 아이롱 럭에 누워 있는 동안은 머리 위의 거울을 통해 책을 볼 수 있었다.
 학문적 토론과 성적 경험, 마약 등 전형적인 1960년대 대학 생활을 보내는 동안 1967년 어머니가 그를 가까이에서 돕기 위해 이사를 오고, 그의 이웃이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쥬디(Judy)와 고정관념 타파 등에 대한 토론 등을 하다가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전동휠체어가 발명되었을 때 그의 재활 카운슬러는 그의 약한 손 힘으로는 조작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사랑과 독립에 대한 갈구는 한 시간 반만에 작동 법을 배워 휠체어를 타고 장애를 가진 이후 처음으로 가고 싶은 곳을 언제나 마음대로 갈 수 있게 하였다.

 

작은 승리에서 정치적 운동시작
 로버츠는 버클리의 유일한 장애학생이었으나 그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 버클리는 또 다른 장애학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음해에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전신마비가 된 헤슬러(Hessler)가 입학한다. 로버츠와 헤슬러 그리고 다른 장애학생들은 함께 모여 버클리대학에서 중요한 이슈였던 언론자유운동, 반전시위, 다른 정치적 사건 등을 토론하고, 로버츠는 여성운동과 민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장애우들의 권리회복과 같은 맥락에서 보고 나약함을 가진 여성의 모습에 대한 편견을 이권에 이용하는 것을 장애우들이 동정과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똑같이 여기게 된다.
 학교 졸업 후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있던 1967년 버클리에는 12명의 중증장애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은 롤링 쿼드(Rolling Quads)로 그들 집단을 이름 짓고 늦은 밤 휠체어에 앉아서 혹은 아이롱 럭에 누운 채로 함께 모여 교실에의 접근의 어려움에서부터 교통수단의 부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고 있는 일반적인 장애물의 제거방법을 논의하고 시위방법을 분석한다.
 1968년 기숙사는 주정부의 재활과에 의해 공식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된다. 한 카운슬러가 낮은 학점을 이유로 두 명의 학생을 기숙사로부터 퇴거시키려 할 때 롤링쿼드의 나머지 장애학생들은 반기를 든다. 카운슬러는 이들 모두가 A학점만을 받고 정해진 학점 이상을 이수할 것을 요구했고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 주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했으며, 두 학생의 퇴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학업에 적당치 않다는 라벨을 붙인다.
 로버츠는 장애학생과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에 반기를 들고 학교 행정부와 학생회에 장애학생에게 보다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항의를 하고, 그가 버클리에 들어올 때의 투쟁과 캠퍼스에서 보아 왔던 학생운동에 영향 받아 지역신문사,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에 전화를 건다.
 기자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오랫동안 본 적이 없다"라고 보도하고 버클리의 다른 학생들도 지지를 보낸다. 결국 몇 주 후에 이 카운슬러는 사퇴하게 된다. 이들의 늦은 밤 토론은 완전한 자력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카운슬러 혹은 사례관리자가 되어 다시는 자신들의 재정지원을 통제하는 관료에게 아부하는 일이 없게 되길 원했다.
 자력으로 취업방법을 알아내어 주정부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아야 했고 재활 카운슬러들의 클라이언트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주정부의 서비스의 수혜자가 아닌 소비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음해에 버클리시가 학교의 남쪽에 위치한 쇼핑거리를 수리할 때 그들은 또 한 번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보도블록은 일반적 거리 설계에 포함되지 않았고 5인치 보도블록 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장애학생들은 거의 캠퍼스를 떠나지 못했다. 롤링쿼드의 8명의 장애학생들은 시의회 회의에 참석했고 그중 도날드 롤렌스(Donald Lorence)의 대단한 연설은 도시 거리에 램프를 설치하는데 연간 5만 달러를 투자하는 것을 약속 받게 된다.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부터 정치적 운동의 싹이 자라나게 된 것이다.. (계속)

 

 

저자 /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패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했고,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의 유수한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역자 / 이 책을 번역한 이상진 씨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원에서 직업재활을 전공했다. 현재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미국 직업재활 전문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글 / 조셉 피 쉐피로

역 / 이상진

작성자이상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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