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동정은 싫다(NO P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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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은 싫다.(No Pity)
저자 소개.
조셉 피 쉐피로(Joseph P. Shapiro)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U.S. World & Report 의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알리샤 패터슨 제단의 장학금을 받아 장애우 인권 운동을 연구했다. 장애 문제를 다룬 그의 기사는 U.S. World & Report 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유수한 언론 지에 소개된 바 있다.
서문 "당신들은 모른다."
장애, 더 이상 슬퍼하거나 연민할 필요 없다.
비장애우들은 장애우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미국의 장애우 인권 변호사, 티모시 쿡(Timothy Cook)을 위한 추도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오랜 친구가 일어서서 "나에게 그는 결코 장애우로 보이지 않았다." 라고 진심 어린 찬사를 한다. 또 한 친구는 말한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장애가 없었다."라고.
바로 이런 기념사가 38살에 대중 교통수단인 버스에 휠체어 리프트를 장착하게 하는 법정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장애우 변호사에게 비장애우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에서 이런 일률적인 찬사에 언짢음을 금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발언은 마치 흑인들에게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덜 까맣소."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또 예수에게 "나는 당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오. 여성 운동가에게 "당신은 전혀 여성처럼 행동하지 않는구려."라며 아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다.
약 15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이런 찬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장애우들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애우들의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혁명의 결과로 장애우들이 자아개념이 성숙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타인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장애를 극복하여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쿡은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렸고, 보조기를 신고 힘겹게 걸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장애에 자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사람들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은 사회에의 완전참여는 공통적 욕망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책은 많은 장애우 뿐만 아니라 비장애우들에게도 이 세상과 더불어 장애우의 자아 개념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소위 장애우 권익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장애에 대해 더 이상 연민하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는 장애우들의 사고에 의해 비롯된 것이며 장애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회의 잘못된 인식, 두려움, 그리고 고정관념임을 말하고자 한다.
편견, 차별의 대상이 아닌 장애우의 세계
장애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선천성 장애도 있으나 대부분은 후천적으로 발생한다. 근이완증, 세포섬유질화, 부분적인 시력과 청력 손상처럼 진행적인 것도 있고 경련처럼 일회적인 것도 있다. 복합경화증은 일회적이면서도 진행성이다. 사지절단과 같은 장애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암이나 마비 증상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간질이나 당뇨 같은 장애는 비가시적이므로 드러나지 않는다. 장애우법은 편견이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비만이나 말더듬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각각의 장애는 심함의 정도가 다르다. 보청기는 대부분의 농아와 난청자에게 소리를 확대시켜 줄 수 있으나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대부분의 자폐 청소년은 시설에서 일생을 보내지만,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도 있다.
장애우의 세계는 그리 빨리 변하지 않는다. 기술의 급속한 발달, 인권의 옹호, 일반학급에서 훌륭하게 교육을 받은 장애우 신세대, 새로운 집단의식, 정치적 활동 등을 통해 보다 많은 장애우들은 직장을 구하게 되고, 사회생활의 이모저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적인 편견과 구시대적 복지와 미비한 편의시설들에 의해 새롭게 싹트는 자립을 향한 시도는 좌절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장애우들의 오랜 숙원은 무시되거나 사회의 주도권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인식이나 심게 되는 것이다.
의학의 진보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여 장애를 퇴치할 수 있을 것 같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증가됨에 따라 장애우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입은 병사 중 단지 4백만이 생존했고, 그 중에 90%가 후송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는 하반신 마비 중 2천명이 살았고 60년대 후반에는 85%가 목숨을 구했다. 항생제를 비롯한 새로운 약품의 발달로 생존 기회는 점점 증가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척추손상 환자들이 호흡기, 방광, 또는 신진대사의 문제로 초기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거의 사라진 90년도에는 사지마비 환자들도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
한편 노인 인구도 장애의 범주를 넓히는데 한몫을 한다. 장애우 중 1/3이 65세 이상이다. 오늘날 미국 전 인구의 13%인 3천 2백만이 65세 이상이다. 2020년이 되면 17%인 5천백만 명에 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암 뿐만 아니라 심장 질환, 관절염 같은 만성 질환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노인들은 장애우 권익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장애우의 삶이란 슬프고 가치 없는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장애우란 사회적인 낙인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장애우와 노인이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자. 즉 양자는 자립을 추구하고 시설을 벗어나려 하므로 연합군이 될 수 있다. 우선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장애범주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다룰 수 있는데, 미국에는 3천 5백만에서 4천 3백만의 장애우가 있다고 추정된다. 1991년 의료기구(The Institute of Medicine)는 연방 보건 조사 자료를 인용하여 직장과 가정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장애를 경험하는 인구를 전체인구의 17%인 3천 5백만이라고 보았다. "장애는 국가의 가장 시급한 보건 문제로써 장애우 개인, 가족 뿐 아니라 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 이 보고서는 전한다.
미국 장애우법(Americans with Disability; ADA)의 논쟁 기간에 법률가, 부시 대통령, 변호사, 언론인들은 4천 3백이라는 통계 수치를 사용하였는데 이 수치는 한 연방 정부 보고서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심지어 이 4천 3백만에도 학습장애, 몇몇의 정신질환, AIDS환자, HVI양성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1994년 한 조사에 의하면 4천 9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흑자는 질병과 만성 질환까지 포함하여 1억 2천만 이상의 장애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3천백만의 미국인들은 관절염을 갖고 있고, 이중 7백만이 행동에 제한을 느끼고 있다. 미국내의 흑인은 3천명에 불과하다. 장애우 수를 최소한으로 잡아도 장애우 집단이 가장 대표적인 소수집단(Minority)이다. 그러나 모든 장애우들이 자신들을 소수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따라붙어 다니는 장애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이 장애우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장애우 문화, 인권 운동의 태동
장애우의 문화를 보는 나의 시각은 1968년 전미복합경화증협회(National Multiple Sclerosis Society; 이하 전복회라고 함)의 한 홍보부 여직원과의 우연한 전화통화에서 비롯된다. 전복회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여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뉴옥에 온 수상자에 대해 내가 기사를 써줄 수 있느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전화통화였다. 그 수상자는 시상식장으로부터 길 건너편에 위치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한길을 건넌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불록의 끝에는 경사진 보도가 없었고 따라서 이 호텔은 마치 맨하탄 중심에 떠 있는 섬과 같았다. 택시도 무거운 충전식 휠체어를 심으려 하지 않았고, 버스에도 리프트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전복회에서는 특별한 리프트 시설을 갖춘 벤을 빌려서 수상자를 운송했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건이지만 내가 소속된 주간지에 쓸 수 있는 성격의 기사거리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범국민적 관심을 유발하고, 전국에 걸친 모든 장애우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그 홍보부 여직원인 Arney Rosenblat 가 전화를 걸어 "장애우 권익운동"이라 불리는 전국적인 움직임을 언급했다. 바로 그 즈음에 워싱턴의 한 비공식 정부 위원회에서는 미국장애우 법안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 법은 이미 흑인, 여성, 종교적 소수에게까지 확대된 시민권을 장애우에게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워싱턴 호텔의 회의석상에 참석했는데 이곳에는 수십 명의 남녀노소가 미국장애우 법안을 마무리 짓기 위해 모여 있었다. 워싱턴에서 입법 활동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이 법은 익명으로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위원들에 의해 작성되고 있었다. 목표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들은 마치 그림의 떡과도 같은 법안을 재정하려는 것이다. 경제계의 로비스트들은 벌써 이 법을 반대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의회나 백악관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장애우들은 대표적인 소수 집단으로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이 인권 입법안이 비공식적 연방위원회에서 13인의 정치적인 보수파에 의해 작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삶들이며, 레이건 행정부는 시민권이라는 대의명분에는 항상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당시 장애우 문제 전국 위원회(National Council on the Handicapped)는 그들을 뽑아준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파격적인 시민권 법률을 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흥미로운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연 기사거리화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워싱턴 호텔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줄에 서 있었다. 내 뒤로 정창자림으로 밝은 오렌지색의 휠체어를 밀면서 젊은 청년이 다가왔다. 주차로에는 두 대의 택시가 들어왔고 도어맨이 첫 번째 택시를 불러주어 나는 그 택시를 탔다. 두 번째 택시도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유턴 하여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나는 택시에 오르면서 휠체어를 타 그 청년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전혀 노여움뿐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아 보였고, 그저 택시 운전사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인 것처럼 다른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인 뉴욕에서도 길을 건널 수 없고 교통수단이 없어 곤경에 전복회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문득 떠올랐다. 두 번째 택시 운전사는 그의 휠체어를 먼저 알아보았고, 휠체어를 접고 차의 뒤에 싣는 것이 귀찮았을 것이다. 만약에 택시가 없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그의 사무실 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워싱턴에 있는 버스에는 휠체어리프트가 없다. 지하철은 그가 내리고자 하는 역에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있다면 이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 교통수단에 의해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만 그는 살아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와 같은 사람이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는 사회복지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만약 사회가 장애우들이 일을 하지 않고 공공부조를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장애우 인권 문제를 다룬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약 이주 후인 1988년 3월. 나는 장애우 인권문제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대면을 맞이했다. 청각장애우를 위한 유일한 4년제 인문대학인 갤로뎃 대학교(Gallaudet University)의 학생들은 124년 역사이래 처음으로 농아교장을 선출하자고 강력히 요구했다. 청각장애우 대신 들을 수 있는 교장이 선출되었을 때, 분노한 학생들은 학교를 폐쇄하면서 항의하였다. 청각장애학생을 사회로 진출시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학교에서 청각장애교육자가 학생들을 이끄는데 부적격하다는 논리는 너무나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학교의 온정적인 태도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도덕적 확신에 의해 다시 한번 나는 장애우 인권 운동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미국 장애우의 새로운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후 5년 동안 수많은 삶들과 2천 차례 이상의 인터뷰를 했다. 나는 일년간의 안식년을 얻어 알리샤 패터슨 제단의 연구원으로써 장애우 권리 운동을 탐구했다. U.S. World & Report지의 사회정치 이슈를 담당하는 언론인으로서 보건, 노령화, 유산, 태아 문제, 교육, 고용, 복지, 시민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내가 취재하는 분야에 장애우의 시각이 자라남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장애우인권 운동이야말로 기타 사회 운동에 교훈이 됨을 발견했다. 장애우 운동은 90년대의 모자이크의식 운동으로서 다양성이 그 주된 특색이다 어떤 지도자나 단체도 모든 장애우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강력히 부각되는 지도력이 없이 장애우 운동은 주로 비장애우에 의해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함으로써 장애우 인권을 위한 캠페인은 많은 장애우, 가족, 장애 관련 종사자들을 강력하게 묶을 수 있었다. 장애우들은 숨겨진 혹은 잘못 이해된 소수집단으로서 가장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에게 조차도 당연히 주어지는 삶의 기본적인 선택마저 박탈당하였다. 지난 20-30년 동안 흑인, 여성, 동성연애인 등 다른 소수집단들의 인권 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운동이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주어져 있는 근본적인 권리를 장애우들에게도 부여하자는 요구였다. 이 운동들이 1970년대 후반까지도 전무하던 집단의식과 장애우의 문화를 태동시켰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는 장애우 운동의 형성 및 이슈들, 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의 연대기이다. 아울러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정치 사회적 쟁점들에 관심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한다. 운동의 성취와 목표를 위한 강력한 지원을 우리는 장애우, 가족, 친구, 심지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는 많은 자선 단체와 전문가 집단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계속)
글 / 조셉 피 쉐피로
역지 / 이은경 (시각장애우, 성심여대 영어영문학과와 미국 스미스대 사회사업 대학원을 졸업하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재활상담가로 일하던 중 도미해
현재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사회사업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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