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동정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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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은 싫다(NO PITY)
제1장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편견
(TINY TIMS, SUPERSCRIPT AND THE END OF PITY)
장애를 밝히고 그대로 느끼는 자기인식이 중요하다
미국인들에게 귀엽고, 용감한 "불쌍한 아이"보다 더 사랑 받는 장애의 상징은 없다. 또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스스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정은 압박감을 준다."라고 국립장애우잡지 편집자 겸 출판자인 캔디 존스(Cyndi Jones)는 불평한다. 어린이가 출연한 텔레비전의 자선기금모금 방송보다 더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은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또한 그러한 아이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존스는 1956년 다섯 살 때 세인트루이스에서 소아마비 구제모금운동에 뽑혔을 때 신데렐라 같은 느낌을 가졌다. 용감하게 웃으며 목발을 짚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시내 중심가의 커다란 광고간판에 인쇄되었다. 그녀는 텔레비전 명사가 되었고 또한 연초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세인트루이스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또한 그들의 지갑을 열게 하였다. 비록 그녀가 목발을 버리고 몇 걸음 걷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울고 말았지만 그것은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의 훌륭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런 신데렐라 주문(spell)은 몇 달 후 그녀가 1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에게 소아마비 예방 접종에 대한 동의서를 보냈을 때 사라져 버렸다. 그 동의서의 첫머리에는 <소아마비가 다시 증가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가족에게 소아마비 예방 접종을 하십시오>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한 장은 어린 남매가 손을 잡고 들판을 즐겁게 뛰어 다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위에는 "정상(THIS)"이라고 찍혀 있다.
그 옆에는 곱슬머리에 새 파티드레스를 입고 우울한 모습으로 목발에 기대어 선 존스의 사진이 보였다. 존스의 사진 위에는 "비정상(NOT THIS)"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병약한 모습에 애써 눈물을 감추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친구들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러한 쓰라린 현실을 이해한다.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는 특별하지 않았다.
존스가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것처럼 3천5백만에서 4천3백만에 이르는 미국 장애우들은 점차 장애우로서 자기인식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흑인이나 여성, 동성애자와 같이 그들은 미국이 그들을 보는 시각에 도전을 하고 있다.
구걸하는 "불쌍한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뿌리박힌 생각 장애 우는 어린애 같고, 의존적이며 자선과 동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거부된다. 장애우에게는 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권리가 요구된다.
존스에게처럼 돌아다니기 위해 휠체어가 필요한 소아마비는 비극이 아니다. 장애는 그녀와 역시 휠체어를 사용하는 그녀의 남편 빌 스토더스(Bill Stothers)가 그들의 휠체어가 "화제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레스토랑이나 극장에 들어갈 수 없을 때만 비극이 된다.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인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을까? 소아마비를 없애고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기적의 알약을 삼키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 그녀의 대답은 노우(no)다. "그것은 흑인에게 피부색깔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것은 장애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장애우 중 일부는 계속되는 고통과 만성적인 허약체질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축된 기대수명과 독립심의 약화를 인식한다. 그녀와 소아마비를 가진 다른 이들에게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근육이 약화되고 이동성이 줄어들며, 스스로 돌보는 능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는 주장한다. "장애우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장애를 밝히고 그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사회가 당신을 장애우로서 다루는 방식이 싫을지라도 그것은 당신의 경험의 한 부분이고 현재의 당신이 되기 위한 과정의 한 부분이다."
"불쌍한 아이" 동정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
조나스 솔크(Jonas Salk)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을 발명해서 소아마비에 대한 두려움을 감퇴시켰다. 그러나 백신은 존스나 필립스 같이 이미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치료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라고 필립스는 말한다.
장애 어린이들은 기술과 진보의 시대인 전후 미국의 신념에 대한 모욕이 되었다고 그녀는 비판한다. "목발을 짚고 걸으려고 노력하는 용감한 절름발이"라는 새로운 캠페인 이미지가 1950년대 중반에 생겼다.
이젠 장애 어린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선이나 사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학이 장애우를 치료할 수 없다면 사회는 그들 스스로가 치료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힘든 일이고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가치 있는 절름발이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도록 요구받는다. "당신은 비록 휠체어를 사용할지라도 계단을 뛰어 올라가야 한다."
1980년에는 의학자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소아마비 생존자들의 근육퇴화에 대한 연구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목발을 짚고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 휠체어를 사용하도록 권유받는다. 그리고 휠체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충전식 휠체어로 바꾸고 있다. "가장 훌륭한" 환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마치 그들의 근육이 빨리 약화되기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보이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의학적으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걷는 것이 좋다는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은 사회적으로 그렇게 기대되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라고 필립스는 말한다.
장애가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은 고무적인 장애우라는 또 다른 지배적인 이미지를 낳았다. 그것은 대부분의 비장애우들에게 감동적인 것으로, 그리고 장애우들에겐 압박감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애우 권익운동은 장애우들이 용감하고 영웅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던져 버렸다. 이후로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 위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많은 장애우들은 심지어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위대한 절름발이"라고 빗대어 부르고 있다. "위대한 절름발이"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의 약삭빠른 한 면이다. 그것은 상처를 준다고 존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애우의 비범한 업적을 통해 물리적·정신적 한계의 극복에 대한 능력을 증명할 때 존경이 아니라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위대한 절름발이"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지나치게 칭송되고 미화된 장애 역할 모델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반신마비 장애우로서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의 화강암봉우리를 등반하여 언론에서 유명해진 마크 월맨(Mark Wellman)이나, 인조다리로 캐나다를 횡단한 암투병자인 페리 팍스(Ferry Fox) 같은 비범한 장애우들은 텔레비전 스타가 되었다.
위대한 업적은 장애우든 아니든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시내로 가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가 있는 버스를 찾는다든지, 장애우는 일할 수 없고, 교육받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과 같이 삶을 즐길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대해 싸우는 것과 같은 조그만 도전을 위해 꾸준히 애쓰는 대부분의 장애우의 매일 매일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특별히 위대한 것은 아니다.
불쌍한 아이와 위대한 절름발이의 이미지들은 장애우와 비장애우 사이의 정상적인 상호작용에 가장 중요한 장애가 되고 있다.
장애우권익운동가 메리 로 브레슬린(Mary Lou Breslin)은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부딪치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말한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충전식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때 역시 사업가 모습의 한 여인이 그 옆을 지나가면서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컵에 25센트 동전을 던졌다. 그 동전은 컵에 빠져 그녀의 블라우스를 얼룩지게 만들었고 호의에서 한 자신의 행동에 놀란 그 여인은 당황해서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 사회는 자동적으로 장애우의 능력을 과소평가 한다. 성공한 리포터 학켄베리의 경우에서처럼 리포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그의 동료들의 온정주의적인 고정관념들이었을 것이다.
장애우 권익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변화가 필요한 것은 장애우 개개인이 아니라 바로 사회이다. 아마도 그것은 휠체어를 탄 장애우는 그의 일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닐 수 없다는 생각과 같은 자동적인 고정관념일 것이다. 또는 커피 잔을 들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인은 비록 그녀가 서류가방을 들고 잘 차려입은 변호사라 할지라도 자선이 필요한 거지일 것이라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무실이나 호텔, 상점을 건축하지 않는 사회적인 실패와도 같은 것이다.
장애우권익운동가인 조지 휴먼(Judy Heumann)은 말한다. "장애는 사회가 장애우를 위한 빌딩이나 취업기회와 같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지 못할 때만 어려움이 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장애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정상이라고 말한다. 편집자인 메리 존슨(Mary Johnson)은 장애우권익운동과 가장 유사한 것은 동성애자권익운동일 거라고 말한다. 1970년대 초의 동성애자와 같이 많은 장애우들은 그들의 상황에 대해 슬퍼하거나 부끄러워 할 것이 있다는 사회적 낙인(stigma)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장애우로서의 자아정립에 자부심을 가지며, 그것을 감추는 대신에 떳떳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간단하지만 인습타파적인 사고-장애 그 자체는 비극적이거나 동정적이지 않다-가 새로운 장애우권익운동의 핵심이다. 그러한 사고를 통해 장애우들은 어디서든지 차별을 재빨리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파괴해야 할 고정관념을 없애려고 함으로써 예기치 못했던 힘을 끌어내고 있다. (다음 호 계속)
저자 / 조셉 피 쉐피로(Joes P. Shepiro)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 월드 앤 리포트(U. S. World & Report)의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알리샤 패터슨 제단의 장학금을 받아 장애우인권운동을 연구했고 그의 기사는 미국의 유수한 언론지에 소개되고 있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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