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슬퍼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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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애우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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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여 슬퍼 말아라(2)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내일을 찾아...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를 차릴 구상을 하고 계신 분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나의 꿈은 실현되었다. "어떠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염원에 의한 초자연적 현상이 필연의 결과이다"라는 데미안의 말이 떠올랐다.
편집실장님의 역설적이고 위트 있는 언변에 익숙해지고 조금은 그런 분위기를 즐기면서 출판실무를 익히기에 열심이었다. 국어사전은 무겁더라도 늘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회사 근처에 싼 전세방을 얻었다. 아침마다 걸레를 빨아 책상을 닦았다. 걸레는 빠는 화장실의 위치가 내 무릎만큼이나 높았지만 요령이 생겼다.
"미스 김, 커피 좀 타라."
실장님에게서 무심히 나온 말이었지만 오히려 반가왔다. 실장님은 말을 해놓고 나를 보며 실소하셨다.
"차 타드릴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직원들 모두의 주문을 받아 기호대로 선심쓰듯 차를 탔다.
"누가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상철 씨가 운반해 줄래?"
남자 신입직원은 표정이 잠시 흐트러지더니 쟁반을 받아 갔다. 티타임을 가졌고 운반은 늘 남자 신입직원이 했다.
어느 날 그 직원은 내게 벌컥 화를 냈다. 자신은 남자고 디자인 학원을 졸업한 디자이너이며 누나가 몸이 불편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하지만 왜 번번이 자존심 상하게 자신을 부르느냐는 거였다.
"너 엄연한 디자이너가 바닥 청소는 왜 하니?"
"그거야 내가 제일 말단이니까 할 수 없죠."
"너 학원 졸업하고 여기가 첫 직장이지. 네 논리대로라면 지금부터 커피 심부름도 네가 해."
그때 실장님께서 들어오셨다. 전통적인 보수성향의 경상도 분이셨던 그는 "나는 지금까지 남자가 끓이는 차를 마셔본 적 없다. 미스 김이 힘들면 미스 조가 해라"라고 하셨다. 미스 조는 타 회사에서 중간 관리자로 대우받을 만한 경력자였고 설사 그녀가 서로의 편의를 위해 흔쾌히 응한다 하더라도 내 기분과 판단은 영 편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퇴근 시각 5분 전에 실장님께 모든 직원이 모인 가운데 임시회의를 갖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출판업무는 아니지만 나의 사회생활 경력을 인정해 줄 것과 때문에 미스 조도 선배 입장이니만큼 차 심부름 등의 일이 신참의 몫이라면 남녀 구별하지 말아줄 것과, "장애우이기 때문에 네가 힘들다면"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규정짓고 상황을 결론짓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미스 김,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자신의 장애에 대해 민감해질 필요 없어."
정말 장애에 대해 민감했더라면 난 그나마의 의견제시도 못했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남녀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니들 서서 오줌 쌀 줄 아냐?"
"남자는 앉아서 쉬 못하나요? 여자들도 서서 할 수 있어요. 엉거주춤도 분명히 선 자세니까"라는 응수에 모두 폭소하며 마무리되었지만 신입직원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정말 민감해지고 말았다. 내친김에 사장님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며칠 후 손잡이는 설치되었다.
편집일에 익숙해질 무렵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많은 출판사들이 등록했다가 문을 닫는다고들 했다. 결국 영업담당자와 나만 제외하고 모든 직원이 퇴사했다. 얼마 안있어 영업사원도 직장을 옮겼다. 일체의 잡념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내 삶의 기본적인 모습을 일하는 재미로 살면서 해소하고자 정립해가던 시기였다.
혼자서 편집, 제작, 기타 제반 업무까지 소화해내며 때로는 자정 넘어 두세 시까지 일한 적도 있었다. 제작단계에 들어가면 충무로, 을지로, 서대문 등의 번잡한 인쇄골목을 누비고 다녀야만 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기존의 거래선도 흔들렸다.
이곳저곳 공정별로 낯선 제작처를 찾아 거래를 할 것처럼 기본 부수에 따른 제작비를 산출해보고 비교하여 조정하고 진행시키면서 일일이 검토하는 일은 사실은 특히 육체적으로 벅차기도 했다.
일명 을지로 인쇄통이 대부분 건물은 지어진 지 오래되어서 나에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폭이 좁은 계단을 온몸을 긴장하고 오르다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이름을 느끼기 전에 누가 볼세라 얼른 일어나 자세를 수습하고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날까지 마쳐야만 할 일이었으니까, 회사가 3층에 자리했을 때도 어 느날은 두세 번씩 거래처를 다녀야 했다.
학교는 휴학했고 실력은 늘어갔다. 아는 체로라도 가끔은 거래처 담당직원을 부를 수 있게도 됐다. 편집이라는 일은 완벽성과 창의성에 있어 무한의 부분이었고 제작은 이제 알 만해졌다. 그런데 결국 사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러 해 근무하면서 회사는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의 역할이 중요해지곤 했다. 사장님과의 유대관계는 자연스럽게 돈독해졌다. 그분은 주위에 나는 장애우가 아니라고 소개한다고 했다.
나도 보호받아야 할 국민의 한 사람
사회복지와 관련된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역시 염원이 통했던지 천주교 산하의 어느 단체를 소개받아 이력서를 들고 면접 담당자와 마주 앉게 되었다. 그는 내가 해야 할 업무에 관계된 이야기는 하지 않더니 다음에 한 번 더 보자고 했다. 약속한 날에 다시 담당 신부님과 전의 그 담당자와 자리했다. 활발하게 움직여 줄 여직원이 필요하다며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망연해졌다.
곧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나의 의견을 얘기했다. 이곳에서 뜻하는 일이 무엇인지. 여직원에게 기대하는 일이 그저 마실 음료를 준비하고 청소하는 일인지. 의욕이 있는 한 장애우의 기대를 버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 처우인지를.
신부님께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리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됐다시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처음 나를 대했던 담당자 역시 장애우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 아팠다.
1년여 일복이 많았던지 바쁘게 보냈다. 새로 시작하는 곳이어서 체계를 잡기 위해 필요한 파일들을 만들고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낀 채로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손님대접을 할 때는 차를 준비해놓고 손님에게 직접 가져가시도록 양해를 구하는 배짱도 기르면서. 역시 사회의 여러 양상들을 배울 수 있었지만 출퇴근의 버거움으로 항상 피곤했고, 공부는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집은 봉천동이었고 직장은 길동이었다. 버스, 전철, 또 버스를 타야 한다. 지하철의 계단도 만만치 않았고 특히 출근시간이면 목발만 사람들의 발에 걸려 밖으로 밀려 나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더구나 장애우에 대한 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버스기사들의 고약한 인상과 내뱉는 말들에 비감해지기도 했다. 일의 양이 많은 것은 견딜만 했지만 대중교통에 대한 도전은 모험이었다. 나도 보호받아야 할 이 나라의 국민인데.
드디어 차를 장만했다. 기능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중고차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마라는 것은 나의 업무 영역의 확대에서부터 증명되었다.
나의 의식은 또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했다. 안면에 의해서가 아닌 낯선 곳에 취업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다시 꿈꾼다. 그러나...
공무원 수험서 전문 출판사에 입사했다. 입사를 결정하기 전에 회사 측은 어떤 자료를 제시하면서 4.6배판 4페이지의 분량으로 요약해 오라고 했다. 정해진 시점까지 최대한 내용을 함축하고 분량을 조절해서 제출했다.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었던 애초의 얘기와는 달리 상근을 하라고 했다. 급여는 초보자의 수준에서 책정되었다.
시간에 기대하기로 하고 출근을 시작했다. 사장은 공공연히 사회복지에 뜻이 있으며 궁극적 삶의 목표라고 등을 다독이곤 했다. 먼저 입사한 직원은 내게 편집책임자인 양 노골적인 시험을 해오곤 했다. 편집부의 관리자는 공석이었다. 잘한 공부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배운 전공을 최대한 응용해 국어 9급 요역집의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편집하는데 작은 실수라도 있을까봐 정성을 다했다. 역시 실력이 입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책상을 같이 안닦는다고 은근히 눈치를 주던 경리 아가씨, 편집 부호 하나도 시험문제를 내듯 하던 동료들의 의혹의 시선이 걷히고 있었다. 장애로 인해 능력까지 의심하는 편견에 대응하는 자세에도 이력이 붙었다. 요령도 생겼다.
두 달이 지나자 급여가 체불되기 시작했다. 이미 기존의 직원들은 체불임금으로 인해 사직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이 입사한 컴퓨터에 아주 능숙한 남자직원이 있었다. 그는 경미한 뇌성마비 장애우였고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었다. 사장은 그로부터 컴퓨터 관련 도서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의 소요를 다독이며 사장이 재기할 수 있도록 하자고, 그래야만 우리 모두도 뿌듯할 수 있고 앞으로 우리 각자가 잘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설득하기를 5개월. 급여 액수는 늘었지만 허무한 제시일 뿐이었다.
사실 제작과정은 제작업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다소 높은 급여를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자였기에 나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과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진 것 외에 출판사라는 견지에서 별다른 능력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제작 관계로 외근을 나갈 때 조용히 몇 가지 사항들을 내게 물어오기도 했다. 이를 사장도 그의 부인도 알고 있었다.
끝내 배반감을 느낄만한 일이 생기자 직원들은 노동부에 전정서를 넣자고 의견을 모으다가도 주저앉곤 했다. 단체행동에 대한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과정 속에서 사장은 출판사는 한동안 혼자 꾸려갈 것이니 그리 알아 달라며, 급여는 언제 시점까지 지급할 것이라 약속했다. 모든 사람들이 퇴사했지만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약속없이 회사로 찾아갔다. 새로운 직원들로 정예인원이 구성되어 있었고 같이 퇴사한 것으로 알았던 제작과정도 있었다. 짐작할 만했다.
"사장님, 하나만 여쭤보겠어요. 이미 회사가 부도 위기에 놓였는데 새로운 직원을, 그것도 장애우를 둘이나 고용한 것은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이니까 견디겠지 하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은 아닌가요?"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고 했다. 물론 좋은 뜻도 있으셨을 테니까 우리에게 유종의 미를 보여주시라고 했다. 새로운 직원들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약속날짜와 시간을 정하기를 여러 번, 번번이 바람맞으며 여러 달이 지났다. 사장의 집 앞에서 그의 승용차를 확인하고 불켜진 창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면 출장갔다고 했다. 그 즉시 집으로 찾아가면 방에 앉아서 TV를 보거나 누워 있었다. 번연히 누구나 알만한 행동으로 우롱당하는 느낌을 갖게 하곤 했다.
그날도 사장을 기다리며 제작 과장과 이야기하는데 뒤에서 한심한 소리가 들렸다.
"장애우를 써 줬더니…. 그러게 처음부터 쓰지 말자고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흥분했던 것 같다. 사장 부인에게 다가가 백지를 내밀며 차용증을 쓰라고 다그쳤다. 차용증이라는 말에 정색을 하기에 그럼 급여 미지급 확인증을 쓰라고 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오기가 치밀었다. 그도 못하겠으면 내가 편집한 책의 판권을 내게 넘기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은 아무 결정권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니 사장을 만나서 해결하라고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득하려 했다. 당신이 한 말에 책임이라도 지라며 편집물보관서랍에서 내가 만든 편집 완성물을 꺼내 목차를 비롯해 중요 부분들을 빼내려는데 제작과장이 말렸고 다른 직원들은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사소한 마찰에도 눈물이 앞서던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회사에서 바로 나와 관할 지방노동사무소를 찾아가 진정서를 제출했다. 여러 번의 출두 명령에도 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노동사무소에서조차 연락이 없기에 담당자를 찾아가 소홀히 하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다.
한 달여가 지나 이른 새벽에 사장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이 대구에 출장을 갔다가 전날 밤 수배자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있다고 울면서 봐달라고 했다. 전화 좀 해보라며 숨겨오던 개인 연락처와 경찰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렇게까지 극한 상황이 되다니, 오히려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나를 보고 동생은 질책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사장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수배까지 되는 사건인 줄은 몰랐지만 출두 명령을 어긴 결과이니 내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는 대로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그녀는 전화로 돈이 준비됐지만 다음날 꼭 만나서 전해 주겠다고 했다. 그들로서도 사람이 무섭다고 생각됐겠지.
다음날 노동사무소에서 만나 돈과 입금증명서를 교환하여 담당관에게 확인시키고 고기 몇 근 사서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서로 미안하다고 인사하며.
이 일로 세태에 부딪치면서 정서가 각박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소모시키고 감정을 궁핍하게 하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셈이었다. 장애우라고 비하시키는 말 한마디에 나와 그들, 큰 영향을 한 것이다.
같이 입사한 그 뇌성마비 장애우와 다른 동료들은 끝내 급여를 받지 못했다. 나와 인연이 되었던 사업장들은 안정되지 못한 소규모의 회사들뿐이었다. 앉아서 일하되 간혹 허리를 쉬어 줄 수 있도록 신체에 숨통은 튀어 줬지만 아! 그래서 무엇이 잘못 됐다는 것인가.
중국 대하소설 <춘월>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선택에 있어 나의 판단력의 부재? 장애우와 함께 사는 세상이 되기 위한 사회의 미성숙?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잘 헤쳐온 듯도 한데 역시 빈손이라는 느낌으로 서른 살이 넘어버렸다. 감수성은 세상이 표현해주는 것들에 둔감해진 것 같았다.
현실과 이상, 좁혀지지 않는 거리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세일을 해내면 무슨 일이든 자신감이 더할 것 같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정보도 얻고 싶었다. 물건을 들고 다니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로 보험을 생각했다. S생명에서 설계사 시험 전에 실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교육 3일째 면접이 있었다.
"어떻게 영업하실 겁니까?"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을 겁니다. 텔레마케팅, 엽서 띄우기, 그리고 이젠 시내 대부분의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다니다 보면 그런 건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구역인 용산만 해도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데요."
나를 증원한 사원의 전달사항은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아주 화가 난다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보험회사의 교육생들 중 몇 %나 실제 활동할 것인가!
나의 계획을 들은 지인의 소개로 다른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사람들을 만나 보험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신체적인 활동 부분보다도 가입자의 생명보장에 관한 일임에도 요청의 형식이 되어 어려웠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많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한 달에 평균 3,500㎞를 주행했다.
취업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살고 싶었다. 다니던 직장마다 박봉이었고 내 다리인 차를 유지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S생명 면접에서 탈락한 직후 고열을 동반한 지독한 몸살로 의식을 잃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의사는 아주 쇠약해진 상태라며 심신을 절대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다. 예상보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그동안의 과정들을 회상해 보았다.
80년대 초반에 생산직의 노동자 현실을 짧게나마 - 충격은 그 이상이었지만 - 겪었고 출판사, 사회복지단체 등 하고자 할 때 운 좋게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 기회에 있어 사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사회적 환경이라는 한계는 주어졌는데 이상을 쫓으며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의지가 시행착오만 거듭되게 한 것일까.
이제 나이와 나의 경력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입장에서 고급인력 아닌 고급인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내가 속했던 사회에서만큼은 장애우도 동료로서 함께 일할 만하다고 인식을 개선시키는 데 있어 인정받았고 어느 만큼 그것이 돈이 되진 않았지만 극복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허리까지 보조기를 착용한 장애우로서 욕구를 조절하고 어느 부분 체념을 해서 이 사회를 덜 보고 덜 겪었으면 이렇게 감정이 복잡해지진 않았을텐데.
<내 고백은 고발, 이제 주저하지 않으리>
그렇다면 나의 취업과 이야기는 개인의 부끄러운 고백이면서 고발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이 사회 전체를 피고로 삼은.
나이는 점점 또 다른 나의 꼭지점이 될 것이다. 40대, 50대… 죽을 때까지 만약 계속 마흔이라면, 더구나 여자로서, 더더구나 장애우로서 이 사회에서 버티어 내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새삼스레 스무 살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라도 외국에 나가 제대로 공부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을 내놓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개념을 확대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거창한(?) 희망을 가져보면서 무일푼이지만 도전해보고자 비자신청을 했을 때 미대사관의 반대이유는 그랬다.
"미국은 장애우의 천국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가면 오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너희 나라를 가보고 배우겠다는데... 다시 시도해야지. 될까? 좌절된다면 난 미련없이 또 여지없이 경제일선에 서기 위해 또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분명한 부분들에 있어 장애우라는 이유로 부당한 인식과 부딪히면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처럼 의연하게 보여주게 되겠지. 나를. 그리고 가슴이 먹먹할 때 마주하는 바다를 찾아 18번을 부르겠지.
"파도여 슬퍼 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 마라.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글/김광이 (33세, 지체장애1급, 여성장애우 모임 ‘빅장을 여는 사람들’ 회원이다.)
독자여러분께… 지난 한해 보내주신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변함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함께걸음도 독자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더욱 알찬 내용으로 찾아 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신 일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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