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의 사랑
본문
따갑게 내리쬐고 볕살은 눈이 부셨고, 높은 지대에 올라앉은 교회의 담장과 아파트 단지 철책에 올려진 줄 장미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학원이 들어서 있는 건물 앞의 화원에도 핏빛의 장미송이들 이 햇빛을 받고 있었고, 네거리의 모서리에 위치해 있는 약국의 유리문은 막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고 있었다.
입시학원 사무실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송진영 (宋珍英)은 돌아서서 한쪽 켠에 놓아두었던 하얀색의 둥근 챙모자를 머리 위에 엇비슷이 얹었다. 그리고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쳤다. 자신이 보기에도 하얀색 챙모자는 썩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햇빛이 고스란히 반사해 내고 있는 저 앞의 약국에를 다녀와야 될 것 같았다. 점심 먹은게 또 얹힌 것인지 속이 거북하고 쓰려왔다.
글세, 소화불량과 하얀색 챙모자와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였다. 소화불량과 하오의 햇빛이나 붉은 줄 장미 역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속은 더부룩하다 못해 묵지근하니 눌러왔다. 도리 없이 다시 약국신세를 져야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보며 하얀 챙모자가 적당한 기울기로 기울었는가를 확인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챙모자의 기울기에 신경을 쓰곤 했는데, 그기울기에 따라 자신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바로 앞의 약국에 가는 것임에도 거울을 들여다보고 챙모자의 기울기에 신경을 쓰게 되곤 하는 것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무실에는 아직 어느 강사도 나와 있지 않았다. 강사들은 오후 두시가 넘어서야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고, 학생들 역시 세시가 가까워져서야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다. 삼촌이 운영하고 있는 입시학원에 책임자 겸 강사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였다. 따라서 그녀는 맨 먼저 출근을 하여 학원의 문을 열고 강의가 시작되는 시간까지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맨 먼저의 출근이라 해도 정오가 지나서이곤 하지만.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고 있는 약국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약사는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약사의 그 가지런한 치열에 송진영은 벌써 체증이 내려가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약국에 드나들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약사 의 가지런한 치열이었다. 그 치열이 겨울이면 검은색으로, 여름이면 하얀색으로 바꾸어 머리에 엇비슷이 얹곤 하는 자신의 챙모자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던 것이다.
"또 소화불량이군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신경성인 것 같습니다"
약사는 그녀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알약과 물약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묘한 웃음을 짓는 약사의 치열은 마침 사선으로 비쳐들고 있는 햇빛을 받아 더욱 돋보였다.
"신경성이니 병원에 가 보라는 이야긴가요?"
진영은 약들을 챙겨 넣으며 약간 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내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닙니다. 내 얘기는 ……."
"저도 신경성이라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그 동안 병원에도 많이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소용 없었어요. 아무리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여기 이 약국에만 다녀가면 말끔해지는 거예요. 더군다나 며칠 전 학원으로 배달된 꽃바구니를 받은 뒤부터는 더욱 효험을 보게 됐어요."
진영은 그렇듯 의미 있는 말을 남기고는 약국을 나섰다. 모서리를 돌아서며 바라보았을 때 약사는 아직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영은 책상 서랍을 열고 방금 약국에서 사 온 약들을 집어넣었다. 서랍 속에는 그렇듯 하루에 한 차례씩 약국엘 들러 사다 넣은 소화제 따위들이 가득했다. 이상한 것은 약국에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어져 그렇게 쌓아 두기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만성 소화불량 증세는 약으로 치유될게 아니었는데,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자 대뜸 ‘자랑 아니냐?" 했다. 사랑?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 얼마 만에 가져보는 감정인가.
아무튼 그녀가 만성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스물 아홉 되던 해인 작년 초부터였다.
스물아홉과 소화불량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더러는 속이 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게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진단했다. 그러면서 연애를 하라는 처방까지 내리는 것이었다. 연애를 하면 모든 게 말끔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랑과 연애라니,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스물아홉을 넘기고 서른에 이르렀다면 어떤 절대 분수령을 넘어가고 있는 게 확실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도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성실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진영은 그 남자를 사랑했고 장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양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결혼 승낙을 받아 낸 터이기도 했다. 졸업을 하는 대로 식을 올리기로 하고서 약혼식까지 치렀다. 그리고 약혼식을 치른 며칠 뒤 기념으로 등산을 갔다. 둘만의 산행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남자가 실족하는 바람에 추락사를 한 것이다. 진영은 그 충격에서 오래도록 헤어나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진영은 다시는 사랑 따위를 할 용기를 갖지 못 했다. 아니, 그보다도 그 남자를 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만성 소화불량이 사랑의 부재 탓이라며 연애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절대 분수령인 서른은 혼자서 넘길 수가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하오의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곤 하는 약국의 약사 이야기를 했을 때는 바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약사의 가지런한 치열을 보고 나오면 더부룩했던 속이 말끔 해져 번번이 약들을 서랍 속에 쌓아둔다면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들의 그런 말들을 부인키는 어려웠다. 만성 소화불량 증세가 그 약국에만 다녀오면 사라지곤 했으니 말이다. 하고 보면 그 약사는 약사 중의 약사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오래 전부터 드나들던 그 약국에서 새로 온 그 약사를 처음 보았을 때 진영은 뭔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약사에게서 저 아득한 시절의 약혼자였던 남자를 보았으니 말이다. 물론 새로 온 약사는 약혼자였던 남자와는 전혀 달랐다. 굳이 찾자면 가지런한 치열이라고 할 수가 있을 터인데, 그것도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약 혼자였던 남자에게서는 치열이 그렇게 감명 (?)받지 않았었다. 아니, 약혼자였던 남자의 치아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었는지 거의 기억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사에게서 약혼자였던 남자를 떠올리게 된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친구들의 말마따나 이건 사랑일 거야. 가슴 속에 켜켜이 묻어 두었던, 그래서 다시는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하리라 했던 사랑이 발아(發芽)하는 것인지 모르지. 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뒤 진영은 한 묶음의 붉은 장미를 사들었다. 그리고는 하얀 챙모자를 머리에 얹고서 거울에 비춰 보며 그 기울기를 가늠한 뒤 길을 나섰다. 형식은 얼마 전에 학원으로 배달되어 온 꽃바구니에 대한 답례이었지만, 그게 그 동안 깊이 잠들어 있었던 사랑의 발아라면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절대분수령인 서른에 달해있지 않은가. 고른 치열을 갖고 있는 약사에게 한 다발의 장미를 안겨주며 말할 작정이었다. 나의 명약(名藥) 이 되어주시지 않겠어요, 당신 이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다시는 소화불량 따위에 시달리지 않을 겁니다라고 약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매번 소화제 따위를 사다가 먹지도 않고 서랍 속에 쌓아두고 있으며 또한 그러고도 약국을 다녀가면 속이 말끔해지곤 한다는 것을, 그랬기에 학원으로 꽃을 배달시켰던 것일 터이고 말이다. 또한 출근을 하노라면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 약국 앞을 지나야 되었는데 그럴 때면 약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곤 한다는 것도 진영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진영은 약국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약사가 진열장 너머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그녀는 들고 있던 한 다발의 장미를 내밀려다가 멈칫 했다. 들어서면 언제나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환히 웃곤 하던 약사가 어딘지 표정이 굳어 있었으며 입이 꽉 다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의 뒤켠에는 비만증으로 뒤룩거리는 여인네가 약사의 뒷꼭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진영은 가슴이 꽉 막혀왔다. 급체를 한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배반감도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들고 있던 한 다발의 꽃으로 약사의 면상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고 약사가 말없이 내미는 소화제 따위만 집어넣고서 돌아섰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만증으로 뒤룩거리는 제 마누라 두고도 꽃바구니를 배달시키는 따위의 수작을 부려? 더군다나 마누라의 눈치를 보는 꼬락서니라니… 진영은 소화제를 입 속에 털어 넣고 또 털어 넣어도 좀체 뚫리지가 않았다. 그 며칠 뒤의 일이었다. 두 번 다시 약국은 쳐다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약사가 학원 사무실로 찾아왔다. 막 출근을 한 참이라 사무실에는 그녀뿐이었다.
"이젠 소화제가 필요 없게 된 모양이죠? 그건 그렇고 한 다발의 장미를 받으러 왔는데 주시겠습니까. 지난번의 그 장미, 저를 주려고 가져왔던 게 아닌 가요?“
그렇게 말하는 약사의 얼굴엔 뭔가 알듯 말듯 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영의 생각은 약사가 그 고른 치열을 드러내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다만 미소뿐이라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장미라고요? 왜 날더러 달라는 거죠. 그 비만증의 부인님한테나 달랄 것이지"
진영은 쏘아 부쳤다. 엊그제의 그 장미 다발이 한쪽 구석에서 볼썽사납게 시들어 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생각 같아서는 그것으로 면상이라도 갈겨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약사가 의외의 정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부인님이라뇨? 누가 누구의 부인이라는 거죠? 누구 혼인길 망칠 일 있습니까?"
"엊그제 뚱뚱보 아줌마가 약사님의 부인이 아닌가요? 제가 들어가자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그러자 약사는 크게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아하, 난 또 뭐라고.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여자는 빚 받으러온 사람입니다. 약국을 인수하면서 무리를 했는데 갚겠다는 날짜에 갚지 못하다 보니"
그 이야기에 진영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흐렸던 게 활짝 개는 느낌이었고, 그야말로 막혔던 속이 시원스레 뚫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빚 받으러 온 여자일지라도 왜 그렇게 눈치를 보았던 거죠? 아니, 다른 때처럼 저를 보고서도 왜 환히 웃지 않았던 거죠?"
"그건 눈치를 본게 아니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말하기가 좀 뭐한데 실은 그때 마침 치과에 가 이빨을 뽑았었거든요. 그러니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할 밖에요. 더군다나 진영씨 앞에서는요"
"이빨이라구요?"
아뿔사 싶었다. 이제도록 그 고른 치열이 체증을 식혀주곤 하지 않았던가. 약사는 전과 마찬가지로 환 히 웃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의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되는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난감해 하고 있는데 약사가 채근하듯 말했다.
"한 다발의 장미를 주실 겁니까 안 주실 겁니까?"
진영은 망설이다가 결심이라도 하듯 "좋아요"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란히 학원 건물 을 빠져나와 화원으로 향하는데 약사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진영씨의 만성 소화불량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이제 다시는 소화불량 따위 는 없을 것입니다"
진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약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미더워 보이는 어깨 너머로 하오의 햇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글 / 김재찬 (뇌성마비장애우, 1957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사막의 꿈’ 당선, 장편 소설집 ‘비어 있는 오후’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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