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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봄, 향수, 버들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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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봄, 향수, 버들피리

 

 

어린시절 버들피리 생각을 했다. 이때쯤 학교가 파하면 제일 미끈한 버들가지를 차지하기 위해 양철필통이 들어있는 책보를 허리춤에 메고 쏜살같이 시냇가로 달리곤 했다. 곧은 가지에선 퉁소처럼 무게 있는 저음의 소리가 나고, 가는 가지에서 피리처럼 높고 맑은 소리가 났다. "부~~" 하는 길게 한 음만 가진 소리, "삐리 삐리 삐리 삐리"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봄날이다. 점심을 마치자마자 대문을 나섰다. 오늘처럼 봄기운이 더한 날이면 힘든 발걸음도 즐겁기만 하다. 진달래 만발한 산머리 허리와 그 아래 펼쳐진 과수원이 함께 시야에 들어오고, 저 숲 속 어디 춤에선가 뻐꾸기가 한가롭게 울음 울고 있다. 낮게 무릎 괴고 앉아 봄볕에 뻐꾸기 소리를 들으려니 옛날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어린시절 생각이 나서다.
 오빠에게 새장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댄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도 뻐꾸기의 슬픔이 묻어나듯 정한이 배인 울음이 나는 좋았다. 목소리가 고운 뻐꾸기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꿩과 종달새보다 더 예쁠 것이 분명했다. 사람 앞에는 좀 체로 나타나질 않고, 깊고 깊은 골짜기로만 숨어들어 저리도 가슴 저리게 울음 우는 뻐꾸기였다. 새장 속에 넣어두고 피울음에 목을 매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자 했던 어린아이의 엉뚱한 발상은 끝내 오빠의 묵살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예쁜 목소리와 달리 뻐꾸기가 배은망덕의 대표적인 새이니 사람이 배울 점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높고 멀고 아득한 목소리.. 그러고보니 내 나이 삼십이 넘도록 아직까지 뻐꾸기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변함없이 내 향수를 불러오는 저 소리가 오늘 또 다시 궁금증을 불러온다.
 과수원 아래론 계단식 논이 있고 억새풀이 무성한 그 속에서 사내 아이 셋이서 개구리 사냥을 하고 있다. 검은 염소 한 마리 새끼 염소를 거느리고 한가롭게 풀을 베는 모습을 지켜보는 새 벌써 2시,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왕복 1시간, 제 기능을 다 못하는 "나의 왼발"을 위해 산책 겸 걷는 운동을 하고나면 오후에 아이들과 만날 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고 산뜻해서 좋다. 30여 분 힘들어 걸음에 지쳐 잠깐 쉬어가는 곳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이곳, 앉아서 쉬는 동안 오늘처럼 산과 들을 구경하다 잠시 내가 앉은 주위를 보라. 토끼풀은 또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하는지. 도시 외진 곳에 이런 자연이 있음은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 네잎크로버를 찾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가끔 아이들 올 시간에 대지 못 할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아이들은 내 손에 들린 네잎크로버로 내 실수를 눈감아주곤 한다.
 가로수 수양버들에도 물이 오른 지 오래다. 연록색 버들가지가 하루가 다르게 짙어간다. 무심히 늘어진 가지 하나를 잡아 휘어본다. 약하나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기세다. 그냥 지나치려다 문득 어린시절 버들피리 생각을 했다. 이때쯤 학교가 파하면 제일 미끈한 버들가지를 차지하기 위해 양철필통이 들어있는 책보를 허리춤에 메고 쏜살같이 시냇가로 달리곤 했다. 곧은 가지에선 퉁소처럼 무게 있는 저음의 소리가 나고, 가는 가지에서 피리처럼 높고 맑은 소리가 났다. "부~~" 하는 길게 한 음만 가진 소리, "삐리 삐리 삐리 삐리" 가락이 잇는 소리, 여덟 구멍을 내어 불어보기도 했었다.
 버들피리도 피리거니와 어린 마음을 더욱 신이나게 했던 것은 살이 적당이 찐 버들강아지를 껌 대신 씹는 재미였다. 꼭 꼭 오래 씹으면 껌이 된다고 아구가 아프도록 씹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던 친구도 없지 않았다.
 어린시절 마을 앞 시냇가에 자라던 버들강아지에 비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 가로수 수양버들에서 연필크기의 가지 하나를 어렵게 잘라냈다. 물이 올라 쉽게 끊어졌다. 어린 아가의 속살처럼 뽀얗고 매끈한 속대는 버리고, 둥근 관모양의 껍질만을 취했다.
 혀 부분을 손질할 마땅한 도구가 없어 근처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산책길에 종종 마주치는 여자 아이가 학교가 파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에게 연필깎이 칼을 빌려 5개의 버들피리를 완성했다. "삐리 삐리 삐리 비리 ~" 흥분, 설레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세월이 흘렀건만 버들피리를 부는 방법은 잊고 있지 않았다.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맑은 눈을 깜박이는 어린 소녀에게 몽당연필 크기의 버드피리 하나를 건네주니 아이가 금세 제 입으로 가져간다. "삐- 삐- 삐-" 몇 번 불어보지만 내 것처럼 가락이 붙지 않자 금방 실망하는 눈치다. 어린시절 동안 경험하고 숙련한 내 기교를 단번에 따라할 수는 없는 모양, 아이는 뒤를 몇 번씩 돌아보며 삐-삐-삐 그렇게 사라지고, 나도 버들피리를 불며 신이 나서 일터로 돌아왔다.
 낯선 소리를 듣고 이번에도 먼저 와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 서로들 먼저 불어보겠다고 아우성이다. 버들피리 합창, 도시의 아이들에게서 내 어릴적 시냇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얘들아, 내일은 피아노 교습 없이 야외 학습이다. 버들피리 만들러 가자."
"야! 신난다."
열어놓은 창문을 넘어 들어 온 방안 가득한 오후 본 햇살이 더욱 정겹다.


글/ 전현자 / 1960년생 지체장애, 한국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 졸업.

창작수필 신인상 수상, 현재 "한성산업"에서 근무하며 틈틈이 수필을 쓰고 있다.

작성자전현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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