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예산 추사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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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추사의 숨결이 깃든 따뜻한 마을
예산 추사 고택(古宅)
하루걸이 학질도 아침저녁 두차례를
한얼이 어울리네
산승(山僧)은 부처님의 손
아껴서 뭘 할껀고
관음의 구고단을
빌려주지 않으니
▲예산추사고택의모습 |
추사가 동갑나기인 초의를 만난 것은 30세 초반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평생을 예술과 다선으로 지낸 평생지기였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을 때 초의가 동행하여 반년이나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의 인간적인 교감이 얼마나 깊었나를 알 수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서 배운 것은 불법과 차였다.
추사는 평소 불심이 돈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을 통한 수행도 만만치 않았다. 당대의 선승이었던 백파 궁선과 초의가 논쟁을 벌일 때 그 사이에 끼어들 만큼 불교에 해박하였다. 백파가 열반하였을 때 그의 비문(고창 선운사에 있다)을 써주었는가 하면, 그 자신이 정계 은퇴 후 봉은사로 들어가 잠시나마 장삼을 걸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초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추사가 차를 배운 것도 역시 초의에게서다. 그래서 그는 초의에게 여러 차례나 편지를 보내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명선>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초의의 다선일여를 보여주었다.
이번 걸음은 추사의 숨결이 베인 예산의 추사고택을 찾아 나선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으로 들어와서 온양을 거치면 바로 신례원이다. 추사고택은 신례원에 있다.
추사는 경주 김 씨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조 훈척가문으로, 고조부는 영의정, 증조부 김한선은 영조의 부마, 아버지 노경은 병조판서를 지낼 만큼 도도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으면서 도도하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노경이 유배 중에 죽음을 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추사의 벼슬길이 명성에 비해 늦은 것도 그 때문.
추사는 지금의 추사고택에서 노경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백부가 자식이 없어서 그 앞으로 양자로 가면서 이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서른 넷 비교적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시강원보덕,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생애에 유배가 두 번 있었는데 1840년 윤상도 무옥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그 후 1851년에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2년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후에는 역시 안동 김 씨 세도의 기득권에 밀려 더 이상 뜻을 펴지 못하고 은둔으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한 나라의 문신으로보다 예술가로서, 실사구시에 철저했던 학자로서 더 명성이 높았으며, 인격 또한 명성에 못지 않았다. 비교적 인물평에 후덕하지 않던 조선의 사관들도 그에게만은 독설을 퍼붓지 않았다.
추사고택은 중조부인 김한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에 비해 그렇게 으리으리한 규모는 아니다. 공간구조는 안채와 사랑채로 대별되며, 안채는 동향건물, 사랑채는 남향건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안마당을 링자형으로 되어있고 안채는 대청과 톳마루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과 맞배가 섞여 있는 홑처마이며, 기둥에 추사글씨의 주련들을 걸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석년>이라고 쓴 석주가 서 있다. 이것은 추사가 손수 만든 것으로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일종의 해시계로서 추사의 실사구시 일면을 보여준다. 현재 추사의 유물, 유품들은 모두 구립박물관으로 옮겨 가고, 현재 몇 점 남아 있는 것들은 모조품이다.
임종지인 경기도 과천에서 이장해온 그의 묘소는 고택 옆 야산자락에 있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도 가까이에 있다.
옹주란 임금의 후궁 소생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로 정조에게는 고모가 된다. 정조는 일찍 남편을 잃고 정절을 지킨 고모에게 열녀문을 내린다. 정려각 솟을대문 위에 정조임금이 내린 열녀문 명정(��이 걸려 있다. 명정은 나라에서 효자나 열녀, 충신 등에게 내리는 일종의 상패 같은 것이다.
추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열여섯살 때 아버지의 소개로 만난 박제가이다. 그는 당대 시서인 뿌리는 모두 그에게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추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스승의 권유로 추사는 등지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과 인물들을 접하였는데 그는 거기서 청의 고증학을 접하게 되었다. 연경에서 돌아온 그가 금석학에 몰두하여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읽어낸 것도 그 결실.
추사 고조부의 묘역에는 흔치 않은 백송(천연기념물 제 106호)이 한 그루 있다. 이 백송은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갖고 와 심은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제 화암사로 간다. 화암사는 고택에서 5분쯤 되돌아나간 야산 중턱에 있다.
이 절의 창건연대는 삼국시대로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면서 하사받은 땅의 일부를 이 절에 보시했으며, 그 후 김한신이 중건한 대웅전이 소실되었고, 추사가 모친을 잃고 한때 낙향하여 이 절에서 머물었다는 등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절은 추사 집안의 원찰이었던 것 같다. 또 추사가 제주로 유배 시에 편지를 보내 전각의 중건을 지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경내 전각에 몇 점의 친필 편액과 주련이 남아있고, 대웅전 뒤 오석산 절벽에는 봉래, 시경이라는 친필이 각자되어 있다. 역시 추사체 특유의 웅혼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내친김에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보러 이웃마을 덕산으로 간다. 남연군 묘는 덕산 삼거리에서 국민학교를 끼고 가야산 기슭으로 10여분 달려간 곳에 있다.
남연군은 홍선대원군이 하응의 아버지이다. 원래 남연군은 경기도 연천에 묻혔다가 충남 덕산 명당으로 이장을 하며 2대에 거쳐 왕이 나온다는 정만인 이라는 풍수의 말을 들은 아들 대원군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우리 같이 풍수에 눈 어두운 사람도 남연군의 묘자라는 명당을 쉽게 느낀다. 원효봉을 좌청룡으로 하고 오양봉을 우백호로 한 가운데 석문봉이 자리하고 있다. 남연군 묘는 석문봉의 기가 알맞게 흐르고 있는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대원군이 이 묘를 이장해 올 당시 그 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야망에 품은 청년 흥성대원군이 자기 아버지의 묘를 쓰기 위해 그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고종 5년(1868) 그 묘에 도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발굴해서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묘가 워낙 견고하여 실패하고 오히려 소문이 나서 국제적인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할아버지요,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훼손되자 홍선대원군은 노발대발하여 쇄국양이정책과 천주교탄압을 더욱 가중하였다.
글/ 김재일/ 소설가, 경실련 중앙위원이며 시민모임 「두레」회장이다.
문화역사기행모임 「두레」는 수시로 문화유적지 담사를 실시하고 있다.
참가하실 분은 전화 02)712-5812~3으로 문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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