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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의 영화이야기]채플린, 고독한 천재의 사랑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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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 고독한 천재의 사랑과 인생

<금세기의 천재 배우 채플린>
 영화 "채플린"은 리차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uogh)의 연출로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이다. 리차드 아텐보로는 "간디"로 그의 섬세하고도 중후한 연출력을 보여준 바 있다. "채플린"도 "간디"와 같은 구조적 특성을 갖고 있다. 현실에서 시작하여 과거로, 그리고 그 과거가 현실로 다시 맞물리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채플린"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조금 더 복잡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가공의 인물은 조지 헤이븐(영화 속 채플린의 자서전 편집인)을 등장시켜 그의 질문과 그에 대한 채플린의 대답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물론 "간디"에서도 미국인 기자를 등장시킨 것은 같은 수법이었으나 현실로 계속 돌아오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수법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강조하려고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영화 속의 조지는 채플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이것은 자네의 자서전이야, 자네 마음대로 할 수밖에…"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더욱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인물의 경우 더욱 큰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채플린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는 금세기의 천재 배우이며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와 같은 천재적 연기를 해낼 수 있는 배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로버트 다우니(Robert Downey)는 훌륭한 연기자이다. 그가 비록 늙은 채플린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젊은 채플린의 모습은 완벽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도 충분히 보여주었다.
 다음은 모든 전기적 작품이 갖고 있는 공통적 문제인데 즉 영화 속의 인물과 실존했던 인물과의 객관적 일치를 만들어 내는 문제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물론 이 영화는 채플린의 자서전과 모든 자료들을 망라하여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역시 채플린의 검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 속의 채플린은 아텐보로의 채플린인 것이다.
 아텐보로는 채플린의 정신을 이 영화를 통하여 모든 관객에게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를 사랑한 한 천재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간디"에서 보여준 한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와 천착을 "채플린"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의 잦은 결혼과 이혼을 통하여 그의 영화에 대한 광적인 열정을 보여 주며, 그가 영화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 때의 나약함을 여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방랑자 채플린>
 이제 구체적으로 영화 내용을 살펴보자.
 영화는 채플린이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모자와 그 콧수염과 그 옷차림으로 들어온 채플린은 화면을 가득 채운 큰 얼굴에서 콧수염을 떼어 내고 크림을 듬북 바르고는 분장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슬픔이여 안녕" 이후 우리에겐 낯익은 장면이나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어 진부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리고 채플린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채플린이 어머니가 쫓겨난 무대로 올라가 대신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 회상은 채플린과 가공의 인물인 조지와 대화하는 현실의 장면으로의 회귀를 거듭하며 진행된다. 채플린의 사랑과 성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재자"를 만드는 시점에서 전환한다.
 채플린을 끈질기게 조사해 오던 에드가 후버(FBI의 국장이었던 실존인물)는 이 영화를 보고, 때마침 미국을 뒤흔들었던 매카씨 선풍과 영화계를 강타했던 휴악(HUAC : 비미국인적 행동에 대한 하원의 청문회)의 힘을 입어 채플린을 미국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인의 채플린에 대한 등돌림은 이전에 일어난 한 여인의 채플린에 대한 소송에서 비롯된다. 그 여인이 낳은 아이가 의학적 친자 확인 방법을 통하여 채플린의 아이가 아님이 증명되었어도 여론은 채플린을 유죄로 판결한다. 채플린의 망명생활은 미국인들이 채플린에게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줄 때까지 계속된다.
 휠체어를 탄 채플린은 대형화면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눈은 서서히 젖어가며 반짝이고 관중들은 환호한다. 영화 속의 트램프(tramp, 떠돌이·방랑자의 뜻 : 채플린의 영화 속 인물을 말함)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먼지를 털고 일어나 그 특유의 걸음으로 터덜터덜 멀어져 가고 화면은 중앙으로 졸아든다. 그리고 앤드 마크가 떠오른다.
 트램프가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트램프가 화면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저질 코미디가 판치는 시대에 돋보이는 영화>
 이것은 아텐보로의 채플린을 잘 설명하고 있다. 채플린의 인생과 사랑은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누구나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채플린은 영원히 트램프로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트램프로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적 위대함은 그가 발레에 뛰어난 배우라 자유자재로 넘어지고 일어나 "슬랩 스틱 코미디"의 천재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세익스피어의 경구("인생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비극이다.")를 이해하고 그것을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아텐보로는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와 "독재자"를 만들게 되는 동기와 그의 고뇌를 보여 줌으로써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채플린이 후버가 참석한 만찬에서, 후버의 극우적 발언에 맞서 햄을 포크로 썰어 가지고 춤을 추는 것처럼 재주를 부려 무언의 시위를 하다가, 그의 영화 속에서 이민국 관리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장면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토로하는 장면 등을 통해 채플린의 인간적 고뇌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이나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것은 곧 공산주의자로 몰리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채플린은 어느 파티에서 히틀러의 위대함을 열변하는 나치당원을 만나 그의 악수를 거절하며 자신이 유태인임을 밝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채플린의 당당함은 그의 사회 고발적 코미디의 의미와 그가 휴머니스트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채플린의 영화 속에 나타나는 빈자와 부자의 관계, 그들의 과장된 희화적 묘사는 익살맞고도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진정한 희극의 진수이다.
 "채플린"은 요즘처럼 저질 코미디들이 기승하는 때에 진정한 코미디가 무엇인가 알게 해주는 좋은 영화이다.

작성자이영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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