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영화의 성도덕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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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영화의 성도덕이란 무엇일까?
강우석 감독의 "마누라 죽이기"
언젠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에 관한 원고를 함께걸음에 싣고 나서 담당기자로부터 독자의 불평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불평은 다음과 같았다. "도대체 "투캅스"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불평을 필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하나는 볼 가치가 없는 한국영화 전반에 대한 언급으로 또 다른 하나는 "투캅스"라는 외국영화를 표절한, 볼만한 가치가 없는 영화 자체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전자의 경우는 받아들이기 거북한 불평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필자가 주로 좋은 외국영화들을 소개해 왔었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우리 영화에 대한 책임은 우리 관객에게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치와 영화 나아가고 모든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질적수준은 구성원의 질적 수준을 능가하지도 또 미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전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목격했다. 또한 구조작업의 진행에 있어 혼란이 빚어지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영화의 관객이 우리 자신들이 아니고 외국인들이라면 또 우리 건축이나 토목 구조물의 건설자나 사용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저 동정어린 눈길로 수수방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부정공무원이나 악덕기업주 혹은 부도덕한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가 많은 관객을 유치할 수 있고 쓰레기 같은 영화들이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런 사회가 올 수는 없을까? 필자는 가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필자는 항상 슬픈 대답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이 질문이 유토피아의 실현을 듣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물음인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 강우석의 "마누라 죽이기"를 보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영화였다. 관객동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화가 반드시 예술행위로만 존재가치를 갖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키득거리며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개그코너와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도덕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삼풍백화점의 업주가 고객의 안전을 무시하고 자신의 돈에 대한 욕심만으로 영업행위를 강행한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그의 파렴치한 도덕심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제작행위도 상업적인 행위의 범주에 속한다면 상인의 도덕심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연출자가 공석에서 "관객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영화" 혹은 "외국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 일확천금의 한 방법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같은 결과가 두려운 것이다.
" 마누라 죽이기"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한 영화제작자가 어느 여배우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죽이려한다. 그러나 그 여배우는 감독과도 성적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이고, 그는 그의 마누라를 살해하는 일에 실패한다. 급기야는 살인청부를 의뢰하지만 그의 킬러는 저능아이며 코메디언이다.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미혼인 연출자는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한 유아적 희롱과 남녀간의 성에 대한 단세포적 사고로 이야기를 꾸려간다. 이런 성에 대한 유아적이고 삼류 주간지적 시각으로 일관된 대사들로 점철된 영화를 천재적 발상처럼 생각하는 영화업자들이나 관객이 없지 않겠지만 실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폭력 지상주의 영화들을 경계하며 매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영화들의 해독이 더욱 심각함을 목과해서는 안된다. 돈을 버는 행위로서만 영화제작이 존재한다면 한국의 영화계는 다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바라는 남편의 심리는 매우 미묘한 것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 낸 집단증후군이다. 한국의 경우 축첩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었던 조선조까지는 이런 신드롬은 존재하지 않았었고 한 세대 전까지도 그랬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신장되고, 가정에서의 경제적 지배권을 여성이 장악하게 되면서 남편들의 이러한 심리적 강박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술좌석이나 모임에서 아내가 죽은 남편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그리고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면 항상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이라고 기원한다고 한다. 그래야 꿈을 깨고 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 유아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아이들은 무섭거나 보기 싫은 경우에 눈을 가린다. 대상에 대한 회피이다. 아내의 죽음을 바라는 심리는 이러한 유아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내와의 대화가 불가능하거나 이혼을 원하나 이혼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감당하기 힘들 때 아내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자주 경험하는 것인데 처리가 곤란한 인물의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인 " 그 인물의 죽이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의 유치함이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누라 죽이기"라는 명제는 희극의 소재이지 비극의 소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희극의 소재는 채플린이나 세익스피어의 "어처구니 없는 운명에 대한 생각하는 자의 시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연출자 자신은 "나는 그저 돈벌기 위해서 재미있게 만든 영화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영화란 대중예술이기에 문학이나 다른 예술행위와 구별되어진다.
왜냐하면 영화는 "주인공과의 동일시"가 가장 쉽게 이루어지는 매체이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필자가 이 칼럼을 시작할 때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부분이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정권하에서의 영화에 대한 검열이 지엄한 것이다. 우리는 소위 문민시대를 맞아 영상이나 대사에 있어 성적 묘사에 대한 많은 제약이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리라 본다. 영화에서의 성적 묘사는 극적 상황이 요구하는 동기에 따라 아름답게도 참혹하게도 또 외설적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극적 필연성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필두로 성행위에 적극적(?) 묘사가 난무하는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관객이 우리가 정치인을 심판하듯 우리의 영화를 심판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다수의 저급 관객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그러나 다수의 저급이 그 사회의 미래를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영호/ 영화인이며 현재 시각장애우 극단 "소리"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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