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문제다]‘입’과 ‘발’로 그리는 참그림,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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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발’로 그리는 참그림, 참세상
- 다국적기업에 맞선 구족화가들의 홀로서기 -
“…카드판매 수입금은 저희 구족화가들의 작업활동 및 자립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들의 애절한 사연 뒤에는 다국적기업 ‘구족화가 협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있었다. ‘문화적 종속’의 굴레를 끊고 홀로서기를 시도한 한국구족화가들의 진정한 인간승리 ‘그날’은 언제인가.
전흥윤 (함께걸음 편집부장)
<인간승리의 대명사(?)>
‘…그동안 저희 카드를 꾸준히 애용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춥고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어느 틈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젠 정말 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새봄을 맞이하여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그린 그림으로 이때쯤 기쁜 행사에 꼭 필요하실 만한 봄카드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카드판매 수입금은 저희 구족화가들의 작업활동 및 자립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 가을이면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빼뚤삐뚤하게 쓴 편지와 함께 우편함에 꽂혀 있는 생일카드나 축하카드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손으로 그린 것보다 훨씬 잘 그린 이들 카드의 그림을 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장애우들이 발이나 입으로 힘겹게 그린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처음 불쑥 카드뭉치를 받았을 때의 불쾌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감탄과 함께 부러움까지 느꼈던 그런 경험 말이다.
‘구족화가.’ 선천적 혹은 뜻하지 않은 질병이나 사고로 손을 대신해 발이나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 말은 때로는 장애우의 삶의 영역을 넓히고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인간승리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승리의 대명사로까지 비쳐 왔던 구족화가협회가 장애우 예술작품을 이용,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다국적기업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그동안 장애우의 작품을 빙자해 목공예품이나 도자기 등을 강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장애우 예술단체인 ‘협회’의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해 온 업체는 없었으며 더욱이 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이 장애우를 빙자해 사업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4월 27일 ‘제 4회 구족화가 열림전’의 마지막 날 전시장인 ‘백악예원’은 그동안 구족화가협회라는 거짓 이름 뒤에 숨어서 막대한 이득을 챙겨왔던 구족회화와 결별,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화가들의 열기로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오후 2시 김영수, 박종관씨 등 8명의 구족화가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속해 있던 ‘주식회가 구족회화’ (지부장 이미봉)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하고 ‘한국구족화가협회’를 새롭게 결성하며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구족화가와 구족회화 사업의 전모를 폭로했다.
이들은 ‘한국구족화가협회를 새롭게 결성하며’라는 발기선언문을 통해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지부는 화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자율적인 결사체가 아니라 카드판매사업을 통해 한 해 10억이 넘는 수익을 올리는 주식회사”라고 밝히고 자신들은 본부에 개인적으로 고용된 상태였으며 장애인이기에 매월 받는 소액의 지원금이라도 끊어질까 불안해 그동안 서울본부가 자신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고백했다.
이들은 그동안 구족회화 한국지부가 판매이익금의 80퍼센트를 세게본부협회에서 가져가며 한국 지부장은 월급 외에 이익금의 10퍼센트를 갖는 등 과다한 이익을 챙겨왔음에도 “그동안 자금운영 내역에 대해 단 한 차례도 화가들에게 알리거나 감사를 받은 일이 없다.”고 지부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한국화가들이 세계본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의 총액은 한국에서 가져간 돈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화가들에게 지급하는 지원금도 지부로부터 평가를 잘 받아 지원금을 더 받는데 신경을 쓰도록 하는 등 수익을 올리는데만 몰두했다.”고 한국지부와 세계본부의 운영실태를 비판했다.
주식회사 구족회화에 소속된 12명의 화가(이중 두 사람은 현재 외국유학 중) 가운데 8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발기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김영수 (근육디스트로피·구필화가)씨는 “구족화가 협회의 주인은 구족화가”라고 밝히고 “그동안 물의를 빚어온 무작위 카드판매 사업을 지양하고 수익금은 미술에 재능있는 중증장애우를 비롯 한국 장애우를 돕는데 사용하겠다.”고 운영방침을 밝히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경이적인(?) 판매실적>
그렇다면 과연 ‘협회’라는 가면을 쓰고 영업을 해 온 ‘주식회사구족회화’는 도대체 어떤 단체이길래 한국에서 불과 4명의 직원과 12명의 구족화가 그리고 한 세트 6천 6백원짜리 카드만으로 연간 매출액 10억 원이 넘는 경이적인(?) 판매실적을 올릴 수 있었을까.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 인구 3만 명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바두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구족화가협회는 1926년 설립된 구족화 전문 유통업체로 전 세계 수십개국에 지사를 둔 장애우 화가들의 모임이다.
구족화가협회는 자신들이 정관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재능을 방치하고 신체적 장애로 작품을 상업목적으로 이용하는 어려움을 겪는 화가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걱정이나 불안 없이 예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구족화가의 발굴 및 적절한 출판업자들과 접촉, 구족화가들의 그림을 인쇄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1921년 설립되었으며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 인구 3만에 불과한 리히텐슈타인에 본부를 두고 있다.
세계협회는 화가들을 정회원, 준회원, 명예회원의 3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정회원이 될 경우 매달 6천 스위스 프랑(우리 돈으로 약 3백만원)을 준회원의 경우 2천 5백~3천 스위스 프랑(약 1백 30만원~1백 50만원)을 받으며 인반인들도 참여하는 명예회원의 경우에는 보수가 없다.
1984년 김준호씨가 처음 구족화가협회에 가입한 이후 구족화가들의 숫자가 7~8명으로 늘어난 88년 가을 세계협회는 시장조사 기관에 한국에서 구족화 카드사업에 대한 한국에서 구족화 카드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으며 조사결과 시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당시 이 조사에 참여했던 이미봉씨에게 지부운영권을 넘겨주고 한국시장 개척에 나섰다.
자본금 5천만 원에 문구류 업체로 등록한 주식회사 구족회화는 세계협회가 다른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형태와 마찬가지로 무작위 우편판매 방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시장개척에 나섰다.
카드 한 장 한 장마다 그린 사람의 이름과 자필 서명 그리고 ‘이 카드는 구족화가들을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은 물론 입과 발로 쓴 화가들의 편지와 작업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을 함께 보내 처음 우편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작품의 신뢰도와 함께 은연중에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더욱이 구족회화는 각종 홍보물에 “구족화가협회는 장애우 화가들의 모임이며 협회는 화가들이 제작한 카드와 달력을 제작 판매하며 그 수익금은 구족화가들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한다.”고 적어 놓아 구매자들에게 마치 주식회사 구족회화가 화가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우편물을 받은 구매자들은 대부분 1만 원이 채 넘지 않는 만만한 가격에 깔끔한 인쇄 그리고 무엇보다 화가들의 얼굴과 이름이 직접 들어있는 카드를 보면서 ‘이왕이면…’하는 생각을 갖고 카드를 ‘사줬던’ 것이다.
매년 봄과 겨울 두 차례 축하카드와 생일카드, 달력 등을 묶어 6천 5백 원에서 9천 5백 원을 받은 구족회화는 한 번에 20만 명 이상에게 우편발송을 하는 모험(?)을 감행했는데 제작, 발송에만 적어도 2억 가까운 돈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자본금 5천만 원의 회사규모에 비해 ‘배보다 배꼼이 큰’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구매자의 감정을 적절히 이용하는 판매방식으로 한국지부는 급격한 매출 신장을 보여 지사설립 4년 만에 고정 고객 10만 명에 연간 12억 원이 넘는 매출액을 올리는 소리 없는 황금시장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협회와 구족화가는 명목상 일대일로 계약을 맺고 임금을 지급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미술작품 활용에 대한 모든 처리문제를 영국의 ‘화인 아트’라는 미술품 전문유통업체에 맡겨 처리하도록 하는 ‘분업화’로 소수의 인원으로 전 세계의 구족화가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한국 화가들의 반란>
소리 없이 ‘잘 나가던’한국의 구족화가 카드판매 사업은 김영수씨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부터 서서히 그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설계사무실에게 일하다 근육디스트로피가 발병,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던 김영수씨는 91년 12월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구족화가의 모습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구족회화와 인연을 맺게 돼 93년 3월 가입신청 1년만에 학생회원이 된다.
김영수씨는 처음 협회가 화가들의 결사체인 줄 알고 이미봉 지부장과 협회 활성화 계획을 논의하던 중 협회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협회를 화가들의 결사체로 만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으며 지부장도 김씨의 이런 생각에 동의해 세계협회를 탈퇴하고 한국구족화가협회 결성에 합의했다.
주식회사 구족회화는 속해 있는 장애우 화가들은 정회원인 오순이(중국 유학중)씨를 비롯 준회원인 김희정(인도 유학중), 한미순, 안종협씨 등 3명의 준회원과 김영수, 박종관씨 등 8명의 학생회원으로 이중 오순이씨가 매달 3백만 원, 준회원 3사람이 1백 30~40만원정도를 받고 있다.
한편 이들 4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회원은 대부분 20만원 내외의 지원금을 받고 있어 정회원과 무려 15배의 임금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지부장인 이미봉씨의 경우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카드판매 수익금과 월급을 합해 혼자 7천만 원 가까운 수입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이를 알게 된 화가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판매 이익금과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는 과도한 수입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독자적인 운영방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판매수익금을 늘리기 위해 무리하게 구매자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편판매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이러한 움직임이 구족화가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인식으로 이어지자 3월 초 김명기, 김영수, 안종협씨 등 5사람이 모여 한국 내의 카드판매를 화가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자는데 합의하고 세계협회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이미봉 지부장은 3월 9일 세계협회에 한국 화가들의 이런 움직임을 담은 보고서를 보내 자신 역시 “그들의 의견이 이성적”이라고 밝히고 “지난 4년 동안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느꼈던 비슷한 생각을 모든 화가들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 놀라왔다.”고 화가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선언했다.
한국지부의 반란(?)에 당황한 세계협회는 답신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금까지의 투자가 이익을 거두고 있는 시점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밝히고 “독립운영의 결과가 좋지 않아 손실이 생길 경우 화가들의 수입이 줄어 피해가 클 것”이라며 독립운영을 가로막고 나섰다.
세계협회는 3월 말 한국구족화가협회 설립을 준비 중인 화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운영을 주도하던 김영수씨와 박종관씨에게 “당신의 그림을 미처 몰라봐서 미안하다.”며 각각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격상시켜 주겠다.”는 말과 함께 통장에 6백만 원을 입금시키는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협회의 위협과 설득에 대해 이미봉 지부장은 자신이 이익금으로 받는 6천여만 원의 보너스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4월 초에는 김영수씨와 함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찾아와 세계협회 탈퇴 이후 독립적인 협회운영방안을 함께 논의할 정도로 한국구족화가협회 설립과 독립운영에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4월 초 독립운영을 못미더워하는 몇몇 화가들이 한국구족화가협회 설립과 독립운영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화가들이 독립운영체의 주인으로 나서면서 상황은 또다시 바뀌고 말았다.
4월 초 이미봉 지부장은 김영수씨와 독립협회의 운영방안에 대해 논의하던 중 “화가협회의 주인은 구족화가이며 사무실 직원은 화가들의 필요에 의해 채용된 직원”이라는 말에 반발해 “독립운영에 나선 화가들이 돈을 더 받기 위해 문제를 일으킨다.”고 비난하면서 돌아서고 말았다.
<설탕을 주고 꿀을…>
이미봉 지부장과 독립운영을 추진했던 구족화가들이 독립운영 체계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갈라서자 세계협회는 4월 21일 대표단을 한국에 보내 전체 화가들과 면담을 실시해 △화가들의 회원 자격 격상과 급여인상을 위한 추천권을 한국 화가들에게 위임 △94년 카드판매량을 25% 감축 △학생회원의 최소장학금 40만원으로 인상하는 등의 8개 항목의 타협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4월부터 임금지급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세계협회와 한국지부의 운영실태를 알게 된 구족화가들은 세계협회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한국 화가들이 협회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기본구조를 인정치 않고 서구화가들과 협회에 대한 일종의 경제적, 문화적 종속상태를 지속시킬 뿐 아니라 한국의 실정법을 어기는 무작위 우편판매업을 고집하고 자체감사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더이상 세계협회의상업적 수단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며 순수한 장애인 화가들의 자립단체를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협회는 한국 구족화가들의 대거 탈퇴에도 불구하고 ‘향후 5년간 작품에 대한 판권을 가진다.’는 조항과 ‘남아 있는 구족화가들로 카드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구족화가들의 자율적인 모임으로 새롭게 태어난 한국구족화가협회와 치열한 시장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세계협회의 회유와 협박을 넘어서 새로운 길찾기에 나선 한국의 구족화가들은 안정된 수입과 개인적인 안락의 달콤한 유혹을 ‘경제적·문화적 종속’으로 규정하고, 말라붙은 붓을 더욱 힘주어 무는 것으로 그늘 속에 숨어있는 이 땅의 모든 장애우들 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與糖維奪蜜 (여당유탈밀) 성탕을 주고 꿀을 빼앗아 가니
蜂覺恨三秋 (봉각한삼추) 벌이 깨달으매 한이 3년을 가네
義道當當法 (의도당당법) 의로운 길은 당당하나니
何溜透彼猷 (하유투피유) 저들의 꾀를 훤히 알고서 어찌 머무를 수 있으랴
족필화가 최구인씨가 세계구족화가협회의 횡포를 고발하고 한국구족화가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발로 써내려간 이 한시는 14명의 구족화가가 아니라 이 땅의 4백만 장애우 모두에게 던지는 또 다른 ‘출사표’인 것이다.
<인터뷰 -한국구족화가협회 김영수 회장->
- 구족화가라는 이름이 조금은 낯선데 구족화가들이 활동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며 어떤 계기로 입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 한국에 처음 구족화가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84년 김준호씨가 처음 세계구족화가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89년까지 6명의 구족화가가 세계본부에 더 가입했으며 세계본부에서는 이 6명에 대해 매달 20~40만원씩 지급해 왔다.
구필화를 하게 된 동기는 대학 졸업 후 건축디자인 일을 했으나 근육디스트로피가 발병해 직장생활이 불가능하던 차에 텔레비전에서 구족화가들의 모습을 보고 그림을 시작하게 됐다.
- 주식회사 구족회화의 설립 과정과 서울지부의 그간 운영은.
= 89년 가을 세계본부에서 카드판매 사업에 관한 시장조사를 위해 시장조사기관에 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돼 시장조사를 의뢰했던 조사기관의직원을 중심으로 한국지사인 주식회사 구족회화를 설립했던 것이다.
화가들은 그동안 서울지부의 운영내역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협회 가입은 세계본부와 일대일로 맺었으며 지원액도 세계본부에서 개인통장에 직접 입금해왔다. 한국지사는 화가들을 매출액을 올리기 위해 홍보하는데만 이용해왔지 화가들의 복지를 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전시회를 할 때 장소를 옮기기 위해 다른 곳에서 지원을 받거나 각자 알아서 해야 할 정도였으며 화가들의 모임도 1년에 전시회 할 때 단 한 차례 모이는 것밖에 없었다.
- 그동안 작업은 어떻게 해왔는가.
= 소속화가는 협회에 1년에 10작품 이상 의무적으로 보내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화가들의 작품은 이미봉 지부장을 통해 평가받고 점수가 매겨지기 때문에 지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주식회사 구족회화가 막대한 이익금을 남긴다는 점은 언제 알았나.
= 처음 가입했을 때 한국지부가 화가들을 위해 카드도 판매하지만 화가들을 위해 활동하는 모임인 줄 알았다. 그래서 모임을 활성화하자든지, 차를 마련하자든지 하는 등의 얘기를 지부장인 이미봉씨와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구족회화 한국지부의 매출액과 이익금이 예상외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세계본부 탈퇴로 임금 지급을 거부하는 등 어려움이 클 텐데.
= 독립을 하면서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화가들이 현재 6천여만 원 정도 자본금을 마련했는데 부족하지만 이 돈으로 사무실 운영과 카드제작 등 운영비에 충당할 생각이다. 인쇄소 등에서도 후불 제작 등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 앞으로 계획은.
= 먼저 주식회사 구족회화의 실상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고 아직까지 가입을 유보하고 있는 회원 4명 모두 참여시켜 단일화된 협회를 만들어 카드뿐만 아니라 문구류 등 좀 더 광범위한 사업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중증 장애우들에 도움이 되는 모임을 만들 생각이다.
<세계 구족화가 협회 어떤 단체인가>
스스로 ‘민주적 합동체제’라고 표현하는 구족화가협회는 1956년 협회의전 회장이며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에리히 스테그만(1912~1984)이 독일과 스위스계 화가 7명을 찾아냄으로써 첫발을 내딛었다.
자신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상품화하여 판매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모임을 결성한 지 40여 년이 지난 현재 협회는 40개국에 지부와 4벽여 명의 외원을 거느린 거대조직으로 자라났다.
‘협회는 자선기관이 아니므로 어떠한 자선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표현처럼 세계협회는 철저하게 구족화가들의 생활을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한해 어느정도의 매출액을 올리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90년 8월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한국 지부의 경우 12명의 구족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카드로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난해 매출액이 10억 원이 넘는 것으로 밝혀져 규모에비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달의 시>
지금 박 영감의 대장간에서는
김상만
……
운거산 중턱에 아시아나 비행기가 떨어졌을 때
박 영감은 벌겋게 단 쇳물을 거푸집에 부으며
「양키놈이 그따우로 맹근 비향기니 안뿌서지는감!」
했다.
달구고 달굴 풀무질, 담금질에
어깨뼈가 세 치나 늘어났다며 보습하나 주문 없는 한여름이지만
아는 이는 안다며
찾는 사람은 요새 싸가지 않는 젊은 것들이 아니라
나맹키로 늙어빠진 쭈글탱이 영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테레비에서도 찍어갔다고
그 젊은 지자양반 요새 아그들하고는 다르다고
하나 남은 과년한 막내딸년, 팍! 지자양반 줘 버릴까보다고
넋두리를 하였다.
삽, 호미, 괭이, 그 좋은 황새목 낫이 공장에서 엄청 쏟아져 나오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요즘에는
아그들도 학원 공장에서 존놈으로 맹글어준다는디
어디 자석 키우는 재미가 있겄냐고 구시렁거리셨다.
그런 박 영감의 대장간이 문을 닫았다.
박 영감이 살던 청도리 그니 집 뒷울 대밭에서
박 영감처럼 시퍼렇게 자라던
올곧은 놈으로 열댓 개나 베어진 대나무에 반장들이
묶어지고 있었다.
대장장이 박 영감이 단근질도 안하고 구시렁을 그치고
얼렁뚱땅 맹근 비향기처럼
그니가 살던
대장쟁이 박 영감 동무들 남아있는 이승의 운거산 중턱에
떨어진 것이다.
살아 생전 존놈이라고는
대장쟁이 취재하며 옛것을 소중히 하자고
목에 젊은 피를 몰아대던 지자 양반 한 명밖에 못보고
풀무불 불씨가 아직 가느다랗게 살아있는데
늙은 박 영감 동무 하나가 황새목 낫 하나 벼리자고
문을 두드렸는데
다시는 돌아와 우렁찬 망치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
김상만씨는 1963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고 청각장애우이며 도배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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