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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못다 부른 해방의 노래 시인 정희수 지다1]"가난"과 "장애"의 짧은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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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부른 해방의 노래 시인 정희수 지다

"가난"과 "장애"의 짧은 비망록
 
 간신히 함께걸음 원고를 넘기고 코앞에 다가온 장애교육권 범국민 결의대회 준비로 한숨 돌릴 시간조차 없어 책상 위에 흩어진 신문스크랩과 사진조차 손대지 못하던 11월 초, 옆자리 오숙민 기자가 "정희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대요"하면서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난장판이 된 책상처럼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선뜻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벌써 장례까지 다 치뤘다는데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
 매달 책이 온통 시뻘겋도록 지겨우리만큼 꼼꼼한 교정으로 함께걸음에 쏟는 애정을 대신하고 소주에 젖은 늘 반쯤은 풀려버린 목소리로 삼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전화통이 떨어져 나가 퍼붓던 욕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그를 비웃으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가난, 고독과 싸웠던 정희수.
 그리고 평생의 화두로 꿈속에서도 자신을 괴롭혔던 "장애"라는 자기만의 성에서 언젠가 크게 한판 벌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칼을 갈던 정희수 시인은 한 무더기의 손때 묻은 책과 누렇게 바랜 원고지 몇 장을 남기고 그렇게 문득 우리 곁을 떠났다.
 정희수 시인은 10월 30일경 어머니와 함께 살고있던 영등포구 신길6동 3658번지 자신의 집에서 "급성 간경화증"으로 마흔 살의 아직 짧은 삶을 마감했다.
 10월 30일 오전, 옆집 사림이 문밖에 쌓여 있는 신문을 집안에 넣어 주면서 처음 발견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가족들에게 알려졌는데 당시 어머니는 일본에 살고 있는 정희수 시인의 막내 동생을 만나기 위해 집을 비우고 있었다.
 정희수 시인의 장례식은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발견하지 못해 가족 친지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11월 3일 화장으로 치러졌으며 12월 17일 구룡사에서 49제가 치러진다.
 1954년 경남 마산에서 양화점 집 장남으로 태어난 정희수 시인은 돌을 지나면서 갑자기 "중풍같이 수족을 못쓰는 병"에 걸려 부산, 마산, 진주의 용하다는 병원은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침 한번 맞는데 당시 집 한 채 값인6만원이라는 거금을 쓰기도 했으나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결국치료를 포기하고 말았다.
 진해에서 가장 좋다는 도천초등학교에 들어간 정희수는 당시 넉넉했던 집안 덕에 자전 차로 등교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해주는 귀빈대접을 받아 "절름발이"라는 소리한번 안 듣고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게를 정리하고 칠성양화점 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소년 정희수는 남대문 초등학교에서도 우수 반, 우수 줄에 앉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으나 그 즈음 노름과 술등으로 낭비벽이 심해진 아버지 때문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선린중학교 때까지 우등생이었던 정희수에게 최초로 좌절과 장애우로서 자기 존재를 깨닫게 해 준 사건이 일어난다. 선린고등학교를 권유하는 담임의 뜻과는 다르게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용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우수한 시험성적에도 "낙방"의 고배를 마신 정희수는 자신의 낙방이 "소아마비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포기하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이듬해 다시 한번 용산고등학교에 도전한 정희수는 또 한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스스로 "고등학교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고시 공부에 들어간다.
 청파동과 마포의 셋방을 전전하면서 점차 기울어져 가는 집안의 맏이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자괴감 때문에 오로지 책에만 매달리던 86년 여름 청파동에서 불을 만나 또 한번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이때 받은 충격으로 3년 뒤인 88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 가족들이 모를 정도로 자기 세계에만 몰두하던 이즈음 신동아를 통해 등단한 정희수 시인은 88년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서울의 양심」을 발표했다.
 가족들의 기억으로 정희수 시인은 이즈음 출판사에 다니면서 받은 돈을 몽땅 "데모대에 갖다 바치고"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면서 "최소한 잠잘 데는 있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이 되어서도 나아질 줄 모르는 집안형편은 끊임없이 그의 삶과 문학을 위협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마지막 도피처럼 "소주병"을 들곤 했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며 소설로 새로운 승부를 준비하던 정희수 시인은 93년 10월 30일 그의 삶을 서서히 갉아먹던 "소주"와 함께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가난"과 "장애"를 훌훌 털어 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이 태어난 곳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는 말처럼 분신처럼 여기던 때묻은 워드프로세서에는 그토록 쓰지 않겠다던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을 위한 그의 시(時)들이 어둠 속에서 용트림 할 그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글/전홍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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