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못다 부른 해방의 노래, 시인 정희수 지다3]장애우문학의 가능성 그리고 정희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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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문학의 가능성 그리고 정희수 문학
<1. 희수형에 대한 기억>
희수형과 나는 우리 나이로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동년배 사이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나이라고 세상은 말하고 있다. 그런 나이에 희수형은 아무도 모르게, 단 한 사람 지켜봐 주는 사람도 없이 가장 처절하게 삶을 뛰어 넘어 세상을 등졌다.
마흔 살이 되도록 거의 혼자 살다시피 한 희수형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시집 한 권과 몇 편의 소설, 밥벌이로 해야했던 번역서 한 권이 전부이다. 소아마비로 지독하리만큼 절뚝거리면서도 사지가 멀쩡한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문학과 삶의 현장을 누비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내가 희수형을 처음 본 것은 제5공화국 철권 통치시절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있던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에서였다. 당시는 성명서 한 장을 내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때였는데, 그는 호헌철폐라든가 창작과비평사의 복간을 촉구하기 위한 서명 작업에 매우 열심이었다.
기억하건대 희수형의 바둑실력은 프로 급 수준이 열 명은 된다는 문단 내에서도 최고수준을 유지했다. 아마도 프로 바둑계로 진출했다면 상당한 기량을 발휘하며 몇 개의 주요 타이틀을 차지했을 것이다. 문단 내에서 그와 바둑을 겨룰 수 있는 문인은 소설을 쓰는 송영이나 김성동 정도가 고작이다.
흔히 아마추어 5단이라고 불리는 강1급 수준인 희수형의 바둑스타일은 보기 드물 정도로 호쾌한 행마가 특징이다. 그러나 자신의 바둑이 위기에 몰릴 떼는 끈질긴 접근 전으로 상대방을 물고 늘어져 기어코 뒤집기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희수형의 바둑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보다 급수가 낮은 사람하고 둘 때는 언제나 이겨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경우 희수형은 승패보다 상대방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는 심정으로 바둑을 둔 것이다.
또 희수형이 졸업하지 못한 대학시절에 법학을 공부했고, 한때 사법고시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희수형은 언젠가 필자와 단둘이 한 술자리에서 그의 과거를 캐보려는 나의 끈질긴 유도심문에 넘어가 잠깐 과거를 술회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 때 지독하게 열심히 법 공부를 했었으며, 또 목표도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자신의 장애를 국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고 말했다.
나이가 비슷한 탓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다. 희수형은 언제나 폭음이었고, 그런 음주 스타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그 같은 인연으로 가까워져 나는 희수형의 첫 시집인 "서울의 양심"에 감히 발문까지를 쓰게 됐다.
<2. 희수형의 문학>
희수형의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애인 문제에 대한 "포옹"으로 일관하고 있다. 첫 시집 "서울의 양심"에서부터 주기 얼마 전에 쓴 소설 "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장애인들의 삶과 그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에 대해 물고늘어지고 있다.
필자는 희수형의 문학을 감히 장애인문학이라는 독립된 장르가 나올 수 있을 만큼 향도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의 작품에서는 감정의 절제가 안돼 실패한 경우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희수형만큼 장애인 문제를 문학적으로 싸안으려고 노력한 문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적 가치는 충분히 인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그의 서정시 한 편을 살펴보자.
고향 가는 그림자
먼저 이는 논다랑 부둥켜안고
자갈길 넘어가다 뒤뚱이는데
밭은 가슴 웅크리며 흐느끼는 듯
오지마라 고향엔
사람이 없어
그래도 고향 길목은
가난살이에 때절은
눈물자욱으로 다가와
허이 허이
갈래길 더듬으며
그림자를 끌어간다
<"고향 가는 길" 전문>
굳이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시이다. 아마도 희수형의 체험을 형상화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향을 떠난 한 장애인의 쓸쓸한 귀향 길을 묘사한 이 시가 읽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부채감을 환기시켜주는 작용을 하고 있다.
"논다랑 부둥켜안고" "넘어가다 뒤뚱이는데" "웅크리며 흐느끼듯" 등 초반 3행을 읽으면서 시적 화자인 장애인의 귀향을 떠올리게 되고, 여기서 일어선 감정이 "오지마라 고향엔 사람이 없어"에 이르면 오늘날의 농촌의 피폐한 삶과 겹쳐 한층 더 울림을 크게 한다.
희수형의 문학적 감수성의 더듬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삶이자 4백만 장애인의 삶과 그 정서적 연대 속에서 시작된다. 그는 장애인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부조리와 반장애인적 정책과 이익집단들이 벌이는 범죄행위에 문학적 매스를 댄다.
희수형은 첫 시집에서 장애인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집단들을 도덕적인 재판장에 세우고 단죄를 한다.
그는 먼저 종교인들의 거짓과 기만, 탐욕을 폭로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두 번째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증인신문 2" 일부>
하느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절거리기만 하면 다냐
그래서 아멘 아멘 소리만 지르면 다냐
<"증인신문 3" 일부>
아시아 제일의 교회당에는 기어코 부자 하느님이 임하고
삼양동 비탈길 지붕 낮은 교회당에는
가난한 하느님이 임할 수밖에 없는
(‥‥‥)
거짓 예언자들의 주주총회 날이 되어 버렸음을
<"증인신문2" 일부>
내 나이는 두 살이고 엄마는 맹인이래요
하느님이 만드신
작은 악마니까요
<"증인신문 8" 일부>
오늘 대형화, 물신화되어 가고 있는 종교계 특히 기독교에 대한 희수형의 분노는 첫 시집 도처에 깔려 있다. 그 불신은 처음 인용한 시에서처럼 부활한 예수와 만나 대화하는 성서 속의 삽화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 시의 핵심은 예수가 종교지도자인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는데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성서 속에서 베드로가 예수의 존재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이를 현재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연결시킨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네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예수의 질문에 번번이 "더 사랑한다"고 대답하는데, 예수는 그때마다 "내 어린양을 잘 돌보아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인간사랑에 대한 절정으로서 이른바 "암하레쯔"로 불리는 "땅의 사람들" 즉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 하라는 정신의 표현이다. 질적 성장 없이 양적 성장에만 매달려온 우리의 교계를 볼 때 희수형의 이런 지적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희수형 문학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 점은 "문학적 자기 학대"에 있다. 이는 작품의 형상화 과정에 문학적으로 채 거르지 않은 언어가 많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단점이고, 오늘날의 그야말로 비참한 장애 현실에 대해서는 그냥 그대로 써도 충분히 문학적인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만큼 현실이 엄혹하기 때문에 굳이 말을 줄이거나 비트는 기교를 끌어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깟 손꾸락 발꾸락 모두 잘린들"(증인신문 3) "풍뎅이 마냥 차라리 뱅뱅 돌아라"(증인신문 13), "이 증오스런 몸뚱어리…가봐야 밉살 덩어리지"(증인신문 16) 같은 표현이 바로 그 같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표현방식 자체가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을 훨씬 더 명징하게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다.
시에서 시작한 희수형의 문학은 몇 년 전부터 써온 소설에서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맹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어려운 현실과 싸워 가는 모습을 담은 단편 "길군화"는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로마 교황의 한국 방문 때를 시점으로 한 이 소설은 이른바 비장애인 중심의 국가행정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교황의 방문으로 안마나 껌 등을 팔러 나가지 못하게 된 맹인들이 이를 봉쇄하는 경찰과 맞서 싸움을 벌이다, 너무 고지식하게 막는 경찰 때문에 결국 2층에서 떨어진 맹인의 아들 영철이가 병원을 가지 못하게 돼 죽는 것으로 끝나 다소 도식적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는 점등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또 몸이 성한 잡지사 기자와 두 다리가 완전히 자린 채 앉은뱅이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하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상인과 장애인의 깊은 우정을 형상화한 "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같은 작품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3. 정희수형에 대한 또 다른 기억>
희수형은 처 시집 후기에 다음과 같은 당시의 소회를 풀어놓았다. 죽은 희수형의 정신이 장애인들을 비롯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장애현실의 극복에 나서도록 "추임새"를 해대기를 바란다.
"분명히 말하건대, 장애인들은 4백만명이 넘는다. (….) 장애인 문제는 결코 시혜 수주에서 노닥거릴 일이 아니다. 장애인 올림픽이니, 장애인 취업이니 하는 텔레비전 대담프로를 보고 있으면 기가 막혀 숨이 딱 멎는 기분이다. 화 있을진저! 장애인을 이용해 이권이나 챙기는 자들이여!"
<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 중>
글/고광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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