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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영호의 영화이야기]"영화보는 줄거움"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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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는 줄거움" 찾기

지금까지 영화의 이론적 배경과 제작 일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아보았다. "비전문가를 위한"이라는 단서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달의 글을 마지막으로 영화 전반에 관한 이론적 탐색을 마치고 영화텍스트의 비평을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영화를 감상하지만 제각기 다른 시각과 정서로 영화를 이해하고 비평한다. 이것은 필자가 자주 언급했던 영화매체의 씨그니 파이어(Signifier)가 갖고 있는 의미의 잉여성(Cinematic Excess)과 소설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빌어온 구조적 특성을 갖고 있는 수많은 영화의 영향임으로 이 지면에서 토론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만은 밝혀둔다.
 물론 영화는 소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범주를 넘나들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일반적 비평인 경우 "나는 문외한이지만"이란 단서를 항상 붙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영화를 대중문화의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우리가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가요를 보고 들으면서 비평하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귀족문화에 대한 향수로 어처구니없게 우리의 전통음악을 밀어내고 고급문화로써 자리잡은 서양의 고전음악, 시, 연극, 소설, 무용, 미술 등에 대한 일반대중의 비평은 상당히 저자세이다.
 흔히 사람들은 여러 예술 장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내가 문외한이긴 하지만" 하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미리 변호한다. 이것은 일반대중의 소위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부언하고 영화를 저급문화의 범주에 귀속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 영화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문제를 사치하고 관객론적인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해란 거의 모두가 무지에서 기인한다. 영화를 단순한 대중예술로만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이러한 오해를 하는 부류의 관객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영리한 영화수입업자들이 들여온 상업주의 영화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기초단계인 "자기 동일시"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장 순진한 관객이며 영화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영화 속의 주인공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같이 울고 웃는다.
 두 번째 부류는 영화를 "볼거리"로 간주하고 영화가 간접경험의 매체임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며 눈물도 흘리고 웃기도 하지만 자신과의 완전한 동일시는 거부한다. 이러한 부류의 관객은 자신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정보에 귀를 기울이며 신중한 선택을 한다. 이들은 소위 예술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하며 그에 필요한 정신적 투자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술영화의 제작도 가능하다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이 부류의 관객의 수준이 그 나라 영화의 수준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첫 번째 부류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구조적으로 또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미숙하며 많은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간단한 무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커다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를 통한 간접경험을 세상을 인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며 영화감상의 즐거움 이면에 있는 메시지를 감지하기도 한다.
세 번째 부류는 소위 씨네화일(Cinephile, Cinemane)이라고 하는 영화광들이다. 이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영화를 만드는 능동적 자세로 전환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 영화에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열렬한 영화의 광신자로 시작하여 차츰 영화의 이론적 학습과정을 거쳐 비평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부류의 관객이 항상 정확한 판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영화라는 마법의 숲에 빠져 있어 숲을 보지 못하고 숲속의 나무들의 배열만을 보게 되는 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중의 일부는 영화를 통하여, 바꾸어 말하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기호학, 역사학, 사회학, 미학, 철학 등의 학습을 통하여 백과사전학적 지식과 문명비판적 의식을 바탕으로 냉철한 비평가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화의 갈 길을 제시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와 동일시"의 부류가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유도한다면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은 이 부류에 의하여 제시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란 어떤 부류의 관객이든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며, 또 영화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작성자이영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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