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김예경과 함께하는 민요기행]민중들의 한풀이 한마당 "송파산대놀이"
본문
민중들의 한풀이 한마당 "송파산대놀이"
잠실 아파트단지 한 쪽으로 꽤 널찍하고 시원스러운 선촌호가 있다. 이 호수는 몇해 전 까지만 해도 메기, 붕어 같은 민물고기를 잡아 매큼하게 끓인 매운탕을 먹으려는 이들이 즐겨 들리던 곳이며 또 요즘에는 쫒기듯이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이 산책 삼아 찾아 오는 곳이기도 하다. 삭막한 시멘트건물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서울에서 몇 안 남아 있는 자연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석촌호 일대가 그 옛날 뭉뚝코와 주먹코, 넙죽입과 히죽입을 한 괴상한 탈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민중의 응어리진 가슴을 후련히 풀어주었던 송파산대놀이의 고향이다.
<옛 송파장의 영화를 찾아>
옛날 염씨라는 어부가 한강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강 건너에 있는 좋은 솔밭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강을 건너와 그 솔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강물이 불어 강 언덕이 무너져 내렸다. 잠에 빠졌던 염씨는 미쳐 몸을 대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염송파 또는 송파라고 불렀다.
이런 전설이 내려오는 송파는 원래 지금의 잠실대교 근처에 있었던 송파나루를 끼고 석촌호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든 물자의 운송을 주로 뱃길에 의존했던 옛날에 큰 나루를 끼고 있었던 송파는 닷새마다 장이 섰는데 이날이면 강가에는 몇 백 채의 돛배가 밀집했으며 장바닥은 전국에서 몰려온 뱃사람과 행상들로 발디딜틈조차 없었다고 한다.
본디 장날은 하루였지만 그 전날은 물건을 들여 오느라고, 장이 선 이튿날은 물건을 퍼나 가느라고 붐벼 실제로는 사흘씩 장이 섰다고 한다.
그즈음 송파에는 되나 말로 곡식을 파는 되쟁이, 마쟁이를 위시하여 배에 화물을 싣고 푸는 임방꾼, 잡심부름꾼들로 늘 북적댔고 송파거리에는 화물창고와 주문처, 연초 가공하는곳, 땔나무와 숯을 파는 신탄상, 쇠전 술집들이 즐비하였다.
심지어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나루를 거친다"는 속담까지 생겨났으니 이 곳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렇듯 목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던 송파는 명절 때나 장날이면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장꾼들을 중심으로 씨름을 벌이고 줄을 타는 등 산대놀이를 벌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조선조 때 비변사에서 논의된 중요한 사항을 기록해 놓은 <비번사등록>에 "명생은 한달에 여섯 번 장을 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각 진의 물건들을 마을에 쌓아두고 매일 장을 연다"고 쓰여 있는 대목에서도 송파장의 흥청대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던 것이 1900년을 전후하여 경인선 경부선이 부설되어 뱃길에 의존하던 운송수단이 하루아침에 바뀐데다가, 그 무렵 동대문 밖과 천호동에 들어선 시장에 돈줄을 빼앗기는 바람에 송파장의 경기는 나날이 시들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송파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숱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토박이들 말고는 살 길을 찾아 저마다 나무장사, 꼴장사, 그릇장사들로 나서 서울 장안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놀이였던 산대놀이도 점점 그 흥을 잃어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25년 즉 을축년의 큰 물난리 때 송파의 온 민가들이 쓸려 내려가 버려 산대놀이는 아예 그 설자리를 버리고 만 셈이 되었다.
현재 가락동에 있는 "대홍수 기념비"에는 "증수 48척 유실 273호"라고 새겨 있어 그때의 피해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송파산대놀이의 기능보유자였던 문육지씨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7월 중순 이삼일 비가 오자 강물이 언덕까지 찼다가 서서히 빠지자 이제는 끝나나부다 했는데 다시 퍼붓기 시작했어. 물이 송파장까지 들어와 사람들은 지금의 잠실고층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광성보통학교의 높은 돈산으로 피신했었지. 그래도 계속 물이 불자 석촌보통학교 오봉산(지금의 석촌동산)으로 대피했으나 역시 물이 차 가락리에 있는 공동묘지까지 피신을 했었어. 다행히 배가 많아서 사람은 죽지 않았지만 집이 모두 떠내려 가고 말았지. 이때 삼전리 60가구도 함께 떠내려 갔어. 물이 빠지고 나서 보니 마을과 장터가 모두 모래사장으로 바뀌었고 마을에 보관했던 가면들도 모두 없어지고 말았지."
물난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송파사람들은 옛놀이를 벌이려 했으나 송파장의 옛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한편 송파주민들이 대피했던 또 다른 마을인 "돌말" 곧 지금의 석촌동에서는 마을 어른들이 춤을 추면 물이 들어 온다고 하여 산대놀이를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마을 주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옛 탈춤꿈들이 주고 받았던 구수하고 텁텁한 채담들은 자꾸 잊혀져만 갔다.
그러던 중 1973년 민속학자 이두현의 고중으로 이 송파산대놀이는 무형문화재 49호로 지정되었고 옛날 이 산대놀이패에 있었던 이충선, 한유성, 문육지, 이범만씨가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구수하고 텁텁하며 거침없는 가락>
산대론리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방에서 하던 민속놀이로서 구파발, 녹번, 애오개(지금의 아현동)일대에 본산대가 있었고 양주구읍, 퇴계원, 노들(지금의 노량진) 일대에 산대놀이가 있었다. 그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뿐이다.
송파에서는 대개 정원대보름, 사원초파일, 오월단오, 칠월백중, 팔월 한가위 같은 명절때에 산대놀이를 벌였으나 장이 설 때도 그 흥에 겨워 이 놀이를 벌였다.
산대놀이는 우선 놀이꾼들이 송파장을 중심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아오는 길놀이를 했으면 이어 돼지머리와 시루떡 등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낸 뒤 시작했는데 보통 점심을 먹은 뒤부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놀이를 벌이고는 하였다.
산대놀이는 열 두 마당으로 상좌움, 옴중, 먹중, 연닢, 눈금재기, 애사당의 북놀이, 팔먹수, 취발놀이, 샌님, 말뚝이, 미얄, 포도대장, 신할애비, 신할매의 순서로 짜여져 있다.
산대놀이에 등장하는 모든 배역들은 거의 남자가 하였으며 대사에 거침없는 상소리와 음담패설이 많아 여자는 감히 구경을 못했다고 한다.
육칠십년대에 불어닥치기 시작한 경제개발의 거센 물결은 우리에게 거대한 빌딩숲과 손쉬운 문명의 이기를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빛나는 문화유산을 조금씩 갉아 먹은 결과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가 송파산대놀이를 배스린 땅이 송파인줄 알면서도 그곳이 서울의 어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치와도 똑같은 것이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