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2]김예경과 함께하는 민요기행 우리 가슴에 숨겨진 슬픔의 정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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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슴에 숨겨진 슬픔의 정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음악사를 보면 작곡가가 작곡 중에 죽어서 그 작품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우선 모차르트가 그의 걸작인 "레퀴엠"을 채 끝나기 전에 갑자기 죽었는가 하면 베르디도 "레퀴엠"을 작곡하던 중에 죽어서 그것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는 그의 여덟 번 째 교향곡 제목 자체가 "미완성"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이 여덟 번째 작품을 만들다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 미완성 교향곡을 작곡한 이후로도 많은 음악생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을 더 살다 갔다. 슈베르트는 모두 10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제9번 교향곡의 악보가 분실되어 이 "미완성 교향곡"은 교향곡 10번 "더그레이트" (이 곡은 제9번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바로 전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 교향곡 8번 "미완성"은 아주 재미있는 우연으로 미완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데 이는 세계 음악사로 볼 때 극히 드문 일로서 하나의 멋진 "숙명의 연극"과도 같다.
슈베르트는 1824년 그의 나이 26살 때 오스트리아 그라쯔시의 "쉬타르엘마르크" 음악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었다. 이것은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에게는 매우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이 음악협회의 회원으로 추대되면 그 때의 관습으로서 으레 자신의 작품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
마침 8번째 교향곡 1, 2악장을 써두었던 슈베르트는 급한 대로 이 두 악장을 음악협회 담당직원인 안세름 피텐브렌넬에게 보냈던 것이다. 안세름 피텐브렌넬은 슈베르트가 보내온 교향곡이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보내올 3, 4악장을 함께 음악협회로 보내줄 생각으로 1, 2악장을 그의 책상서랍 깊숙이 보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간은 그날 그들 곁을 무심히 흘러갔다. 만일 음악회 직원인 안세름이 슈베르트에게 나머지 악장에 대해 한번이라도 문의했다면 슈베르트도 나머지 악장을 서둘러 완성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두 사람은 서로 바쁜 탓이었는지 이 교향곡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것이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쉬타이엘마르크" 음악원에서는 그 나머지 악장에 대해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슈베르트의 8번 교향곡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이 차차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숨어 있던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숨어 있던 작품들도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 교향곡 8번은 1865년 5월 1일, 당시 활약이 두드러지던 비엔나 음악협회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요한헬베크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 악보를 마침내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씌워진지 43년만의 일이었다.
이후로 슈베르트의 제8번 교향곡은 여러 연주자에 의해 연주가 되었다. 당시의 작곡가들은 이토록 훌륭한 곡이 미완성이라는 것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다투어 1, 2 악장의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고 제 3악장의 짧은 일부 스케치를 소재로 하여 작곡하여 덧붙여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슈베르트의 넘쳐나는 서정성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한편 모차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긴 "레퀴엠"은 그의 제자에 의하여 나중에 완성되었다. 우리 음악사에는 후에 제자나 다른 작곡가가 곡을 마무리 시켜 주어 성공한 곡이 종종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걸작인 오페라 "보리수 고두노프"나 보르딘의 "이고르 공" 등도 그러한 예이다.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정감이 넘치는 슈베르트의 이 교향곡을 비롯한 그의 많은 곡이 명곡이라는 칭송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엔 늘 어떤 아쉬움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베토벤에 대한 것이었는데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누구보다 존경했다. 그는 늘 베토벤의 악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많이 괴로워했다.
미완성 교향곡은 베토벤이 가지지 못하는 새로운 음악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음에도 슈베르트는 감히 베토벤에 견줄 수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죽은 후 베토벤의 옆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그런 그의 소원은 비엔나의 중앙묘지가 조성되고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슈베르트의 본래 성격은 몹시도 내성적이었다.
이런 그의 성격이 서정과 낭만으로 대표되는 미완성 교향곡을 낳았음에 그 누구도 반론을 재기하지는 않았다. 한 일화로 슈베르트가 그의 작품을 발표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음에도 그는 무대로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그의 남루한 옷이 창피해서 그러나 하고 그의 옷을 빌려주려 하였으나 정작 슈베르트가 무대로 오르지 못한 이유는 정중 앞에 나가는 것이 부끄러워서였다고 한다. 그런 그도 친구들과는 서슴없어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과 자신의 이름을 단 "슈베르티아나"란 모임을 만들어 결혼을 하지 않는 계약을 맺었었다는 일화도 있다.
슈베르트, 그의 내향적 성격은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음에도 프로포즈를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끙끙 앓다 보낸 사람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그의 10곡, 교향곡 안에 잘 나타나 있다.
슈베르트는 늘 그의 스승이었던 베토벤이 되고 싶어했다. 베토벤은 휴머니즘을 외향적으로 나타냄으로서 그의 모든 작품에 그 같은 휴머니티가 깃들어 있는데 비해 슈베르트의 이 작품에는 그에 대한 경외심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교향곡은 슈베르트다운 서정과 낭만과 개성이 넘치면서도 그 저류에는 베토벤을 향한 추앙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미완성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뉘앙스가 풍부한 화성법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으로서 수많은 서정적인 가곡을 지었지만 이 미완성 교향곡처럼 연연히 흐르는 정서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뜻에서 볼 때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최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향곡이 작곡된 것은 1822년 가을 비엔나에서였다. 이때 슈베르트의 나이 25세로 그 이듬해에는 가곡 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완성시키는 만큼 그의 예술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때였다.
슈베르트가 이 교향곡을 착수한 해에 베토벤은 같은 비엔나에서 그의 최후의 교향곡이 된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쓰기 시작했다. 인류애를 노래한 베토벤과 겸허하게 자신의 낭만적인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던 슈베르트는 동시대를 살다간 음악가임에도 뚜렷한 대조를 이른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이켜 보면 왠지 슬픔부터 다가서는 것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정서가 아닐까, 슈베르트, 그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그의 그 연약한 심정은 모든 이들의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그 슬픔의 알갱이와 동일하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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