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 작은 기획/내 삶의 책들]순진한 결심에서 삶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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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결심에서 삶의 중심으로
김주영 (명혜학교 교사)
<토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 크리슈나무리티에 심취했던 20대 초반>
나눈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초등학교 5학년을 제외하고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정규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나는 농장의 머슴으로, 중국집 배달 소년으로, 신문 배달원으로, 때로는 여관 종업원으로 대부분의 소년기와 청년 초기를 전전하였다. 돌이켜보면 그건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그 시절 내 가슴 한 켠에는 늘 학교를 다니고 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될 짐이기도 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책을 읽음으로써 서서히 그 짐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나의 독서는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책 살 돈이 궁했던 나는 자연히 시간만 나면 시내의 큰 서점을 단골처럼 찾아 온종일, 또는 서점 문이 닫힐 때까지 꼼짝 않고 책 속에 빠져 있곤 했다. 그 북적대는 사람들의 소음과 어지러운 분위기에도 나는 빼떼르부르그의 다락방에서 나폴레옹을 꿈꾸는 라스꼴리니꼬프를 걱정하고, 계몽주의자 허숭을 숭배하고, 로마의 앗삐아 가도를 거닐고, 독방의 뫼르쏘를 만났던 것이다.
초기의 독서는 주로 우리나라 근대소설을 중심으로 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외국의 고전문학을 읽는데 그쳤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작품보다는 개인의 삶의 태도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작가나 철학자, 성인들의 사상을 접하기 시작하였다. 석가,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를 태두로 내려오는 사상의 흐름과 변이 그리고 현대 서양철학의 한 주류였던 쇼펜하우어, 키에르 케골, 야스퍼스, 니이체, 사르트르, 까뮈, 그들과 영향 관계에 있었던 주변 인물들을 읽어갔다. 또 한때는 크리슈나무리티와 같은 신비부의 명상가들의 사상에서 많은 공감을 얻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종교, 철학, 교육 정치, 경제, 예술 등 인간활동의 모두를 역사라는 시간으로 망라하는 문화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뚜렷한 개성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자각 일깨워 준 「당신들의 천국」>
독서는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십대 후반에 읽었던 슈바이처의 전기는 주어진 생을 자기 의지로 새롭게 설계하고 개척해가는 용기 있는 삶의 표상으로, ‘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였다. 또한 그의 ‘생의 외경사상’은 지금도 불교의 ‘자비’와 더불어 존재에 대한 나의 태도를 굳건히 대변해 주고 있다.
현재의 내 일에 뚜렷한 입장을 갖게 해준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이 그것이다. 이 책은 장애인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며, 교사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의 문제로 고민하던 대학초기의 나에게 중요한 해답을 던져 주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누구도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장애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과, 또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특수교육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결국에는 ‘누구나 예비 장애인, 몸은 멀쩡하지만 마음은 장애인’ 하는 식의 말로 장애인과 나 사이의 억지 동질성을 강조하며 아이들에게 접근해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을 통하여 나는 내가 가르칠 아이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란 나의 손과 발을 절단할 때나 부분적으로 가능하며, 그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너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말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가ㅔ 되었다. 다시 말해 나의 아이들에게 ‘너는 나와 다르다.’는 뼈아픈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으로부터 가르침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관념 아닌 행동으로 존재하는 막시즘, 유물론의 실체 접해>
대학에 들어와 나는 그 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얼마나 정치적인 현실에 의해 왜곡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사르트르가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지만, 그의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의 의미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만나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서의 거의 책을 읽지 못하였다. 읽는다고 해야 전공서적이 고작이었다. 강의와 아르바이트, 연에 그리고 학과활동 등 대학생의 전형적인 생활이 나를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늦물이 들어서였을까. 대학 3학년이 다 지나가던 겨울부터 나는 내내 금기시하고 관망만 하였던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들에 미친 듯이 몰입하였다. 그해 겨울 도서실에 들어앉자 70여권의 서적들을 읽었다. 막시즘의 맹아로부터 마르크스·레닌의 전기와 그 실천적 계보, 주체사상, 네오막시즘, 제삼세계와 종속이론, 그리고 해방신학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는 네오막시즘의 다원론적 계급론을 적용한 ‘막시즘과 장애자’라는 단문을 교보(校報)에 실었다. 그 여세를 몰아 막시즘적 교육이론의 전개과정을 정리한 또 한편의 글을 교보에 내고 나서야 어느 정도 막시즘에 관한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그즈음 막시즘은 관념이 아닌 행동과 함께 할 때에만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이 시종 나를 주눅들게 하였다. 그것은 주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여지는 것이었고, 나의 용기없음을 조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막시즘은 편안한 관념론에만 젖어 있었던 나에게 유물론의 실체를 알려주었고, 아주 불안하지만 사상의 균형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나마 자체의 모순으로 자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19세기 말 마르크스의 예언과 충고가 주효했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사회전반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단순히 옛 소련과 동구의 몰락 가지고 부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책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스승이다. 그 스승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 나는 책을 쓴 사람을 존경한다. 그가 평생을 기울여 연구하고 고민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정확한 말을 찾아 심혈을 기울여 집대성한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순진한 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들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신념과 나의 판단과 내 정서와 내 사고의 하나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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