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장애우 예술가들] 소설과 원명희
본문
소설가 원명희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원명희 연보
1952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90년 장편 ‘바늘반지’로 문단에 나옴
1990년 중편 ‘먹이사슬’ 창작과 비평에 게재
1991년 장편 ‘높새부는 바다’ 냄
1993년 장편 ‘신들의 초상’ 냄
1994년 장애우 문제를 다른 장편 ‘달개비’ 냄
얼마나 많은 갈등이 나를 괴롭혔는지 모른다. 글은 지식인이나 쓰는 것인데… 나 같은 놈은 현장에서 몸으로 싸워야 하는 것인데… 과연 나 같이 무식한 놈이 글이란 걸 쓸 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도저히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마치게 된 것은 나의가슴에는 너무나 많은 아픈 한들이 있었다. 채 7살이 되기도 전에 당해야만 했던 철거… 엄마의 눈물, 아버지의 좌절… 그리고 내 아들이 보는 앞에서 또 다시 당해야만 했던 강제 철거의 되풀이. 이런 아픔들이 나에게 빈민으로서 글을 써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쳐댔다. (원명희의 첫 장편소설 <바늘반지> 중 작가의 말에서 인용)
소설가 원명희를 소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뽑아낸 위 인용문에는 원명희가 왜 글을 쓰게 됐는지 그 이유가 미약하나마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한 가지 빠진 부분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원명희의 ‘한’에 관련된 부분이다. 원명희는 철거에 대한한 이전에 장애로 인해 겪어야 했던 아픔에서 파생된 더 큰 한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적어도 신작 <달개비>를 낸 최근의 원명희에게는 이 표현이 매우 적절해 보인다.
철거투쟁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바늘반지>로 문단에 나와 저 악명높은 새우잡이어선 멍텅구리배의 실체와, 호구를 위해 떠도는 빈민들의 실체를 <먹이사슬> <높새부는 바다> 등을 통해 폭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장애우 소설가 원명희가 이번에는 장애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른 장편소설 <달개비>를 펴냈다.
<장편 <달개비> 펴내 >
교도소 감방 안에서 시작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씌어진 ‘달개비’의 대충 줄거리는 이렇다.
역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지금 살인 교사죄로 감옥에 들어와 있다. 그가 살인 교사죄를 뒤집어쓴 것은 한 장애우에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결과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끔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검사와 감방 동료에게 그 장애우가 왜 사고를 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골에서 오라온 그 장애우는 서울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꾸 궁지에 몰린다. 이유는 하나, 그가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제대로 취직을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야기 중간 중간 하충민들 이야기가 나오고, 문정동 장애우 아파트에 얽힌 이야기도 나오고, 그러다가 절망에 빠진 그 장애우는 주인공에게 “형, 정말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겁니까?”라고 묻고 마침내 사건을 일으킨다.
휴일 날 인파로 넘치는 명동에서 차 양쪽에 쇠파이프를 달고 그대로 거리를 질주해 많은 사람이 다리를 짤리고 세 사람이 사망하는 끔찍한 참상을 빚는 것이다. 사건의 배경에는 “장애우를 무시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겠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식의 복사가 과연 현실성이 있고 타당한지의 판단 여부는 책을 읽은 독자들이 생각할 몫이다. 어쨌거나 사고를 친 그 장애우는 잡혀서 사형을 당하고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주인공도 결국은 살인교사죄로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암시하고 이 소설은 끝난다.
- 이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뭡니까.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비장애우들이 장애우들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스런 현실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 겁니까.
= 그건 욕심이고, 최소한 겁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너희들 장애우를 깔보지 마라, 그러면 너 죽고 나 죽는다는 장애우들의 극단적인 절망감을 표현한 겁니다.
- 작가가 왜 이 소설을 쓰게 됐는지 배경이 궁금하군요.
= 언젠가는 내가 해야 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장애우 문제를 소설화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나도 장애우입니다. 그런 내가 내 이야기를 써야지 누구 이야기를 쓰겠습니까. 여태까지 내가 쓴 소설은 엇비슷하게 내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 비록 상상에 의해서, 물론 내 경험도 가미됐지만, 나름대로 장애우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그린 겁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있는 장애우들의 문제에 관해서 모든 장애우들이 공감해 주기를 바라고 이 소설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장애우들은 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될 사람이다. 라는 말로 압축되는 비극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보니 치열한 자기투쟁이 없는 거죠.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치열하게 사는 한 장애우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자부합니다.
- <달개비>라는 소설 제목이 낯선데, 아무래도 꽃 이름 같은데, 이 제목이 장애와는 어떻게 연관되는 겁니까.
= 달개비꽃은 우리 산하에 널려 있는 흔한 들꽃입니다. 주로 닭장 밑 등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는 꽃이 달개비인데 내가 보기엔 이 꽃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꽃입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꽃잎이 다섯장인데 전문가가 보면 나다 만 작은 꽃잎이 한 장 더 달려 있거든요. 이 작은 꽃잎이 장애를 연상시킵니다. 이 꽃은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는 일을 많이 합니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 이 꽃의 순을 먹습니다. 척박한 땅, 불완전한 꽃잎,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실체 등을 연상해내 장애우들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꽃으로 생각돼 소설 제목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
원명희는 1952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를 가지게 된 원명희는 이후 서울 창신동 빈민촌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원명희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정규교육과 결별을 고한다. 그렇게 된 것은 장애가 상당부분 이유를 차지하고 있다. 원명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멸감한 토막.
왜 정식 교육이 아직 청산되지 않고 기승을 부리던 당시 체육시간에 체육 선생은 원명희를 불러 차렷 자세를 하도록 강요했다. 장애로 인해 다리가 붙지 않았던 원명희는 쩔쩔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체육선생은 매시간 차렷, 차렷, 능글맞게 웃음을 띄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체육 선생의 얼굴이 원명희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들은 장애우를 심하게 놀렸다. 원명희가 그 놀림감이 되었던 것도 원명희가 학교를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학교를 떠난 원명희는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 문제아로 자라난다. 소년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운명적으로 얘기하면 역마살이고 좋게 얘기하면 세상 경험인 이러한 가출은 20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원명희가 전전한 직업은 가장 주종이 노가다 였는데, 어머니가 십장으로 일했던 인조 대리석을 갈아내는 공사 현장에 소년 때부터 따라다녔고, 그 후로는 바다가 너무 좋아 16살 때 처음 배를 탔으며, 공원 생활과 노점상으로 나서기도 하는 등 밑바닥 경험을 철저하게 했다.
한편 원명희는 어릴 때부터 ‘책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나치게 책을 탐독했는데, 이는 소외감을 충족시켜 줄 대상이 책 밖에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가출에서 돌아와 집에 있을 경우 원명희는 다락에 틀어박혀 끼니도 거르며 책을 독파해냈다. 이때 읽은 토이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자작들은 엄청난 감동으로 원명희를 전율케 했다.
성인이 된 후 원명희는 창신동에 살면서 철거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 지역 초기 정착민이었기 때문에 원명희네 집은 가옥주였지만 원명희는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세입자 입장에서 철거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된 것은 원명희가 감방 안에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원명희는 두 번째 학교 (교도소)를 다녀오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즉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민중의 힘으로 타개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명희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이 땅 철거민사에 기록될 몇 가지 중요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 투쟁은 산재해 있는 철거 현장의 사람들을 모아 ‘서울시철거민협의회’를 결성하는 데까지 이어졌고 이른바 서철협에서 원명희는 초대 총무를 맡았다. 그 후 서철협 시위가 있을 때면 깃발을 들고 절뚝거리며 앞에 나선 이가 바로 그 원명희였다.
- 철거 투쟁 와중에서 작가는 글을 썼습니다. 첫 장편소설 <바늘반지>가 그때 쓴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서두에 약간 언급은 했지만 당시 왜 글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는지요.
= 87년 그 엄혹한 상황에서 철거투쟁에서 이길려고 글을 썼습니다. 당시 나는 철거투쟁으로 두 번째 구속됐다가 나온 몸이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때 학생들이 넣어준 책을 읽었는데 그전에도 책은 읽었지만 종류가 틀린 책이었죠. 아무튼 학생들이 넣어준 책을 읽으면서 현실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는데 싸움이 붙으면 나는 장애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어요. 가봐야 몇 발자국 못가는 거죠. 그전에 건달 생활을 할 때도 용감한 게 괜히 용감한 게 아니고 도망가지 못하니까 붙을 때는 죽을 각오로 싸웠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그래서 철거투쟁에서 물리적인 힘의 대결이 아닌 지혜롭게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글이라는 무기를 생각해내 소설을 쓰게 된 겁니다.
- <바늘반지> 이후 작가의 작품에서는 바다가 주무대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바다와 연관지어 작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사실 바다 생활은 통 털어서 1년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멍텅구리배는 타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내가 바다 이야기를 상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겪었던 조그만 경험에다 살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 작가의 세 번째 장편 <신들의 풍차>를 보면서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경향이 예전의 작품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던데요.
=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자였어요. 골수 천주교 신자입니다. 신자이면서 지금은 성당을 나가지 않고 있는데 천주교에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죠. 개선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욕을 하는 거지만 아무튼 이 작품에서 나는 사제도 사람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난 이상 제도로 사제를 규제하는 건 잘못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원명희는 한때 수도자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철거투쟁을 시작하기 전 원명희는 만 3년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수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꿈꾸었다. 그러면서 시립병원에서 행려환자를 돌보기도 했는데 80년대 초반, 당시 시립병원에 수용돼 있었던 행려환자들의 참상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원명희는 시립병원에서 행려환자들의 몸을 씻어주고 청소도 해주면서 자신이 버려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종교도 비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종교는 버려진 사람들을 외면했고 이로인해 받은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그 후 철거투쟁으로까지 이어져 종교 즉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나온 작품이 바로 <신들의 풍차>였던 것으로 읽혀진다.
<작가는 변화가 생명>
- 작가는 창신동 철거민 이야기를 다룬 <바늘반지>에서 시작해서 바다 이야기를 다룬 <높새부는 바다>와 <먹이사슬> 그리고 종교문제를 소재로 한 <신들의 초상>을 쓰고 이번에는 장애우 이야기를 다룬 <달개비>를 썼습니다. 이런 작품 경향의 변화는 뭘 의미하는 겁니까.
= 나에겐 작품을 쓰면서 체득된 고집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처음 <바늘반지>를 썼을 때 출판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내가 빈민소설을 계속 쓰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죽어도 싫었어요. 그 고집이 어디서 나왔냐면 나는 배운 것 없는 소아마비 걸린 장애우입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장애우는 반드시 이걸 해야 된다고 고정 지어지는 걸 제일 싫어했어요. 작가적인 의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쓰게 될 때 쓰더라도 작가가 한군데로 치우쳐선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장애우 이야기라도 늘 새로워야 하는 겁니다.
- <신들의 초상> 외에 나머지 작가의 작품에서는 모두 다 장애우가 등장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장애우이기 때문입니까.
= 내가 장애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는 게 장애우만큼 이 세상 밑바닥에서 열악하게, 그리고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나는 만일 우리나라 작가들이 글을 제대로 쓸 줄 안다면 반드시 장애우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그 정도로 작가 자신이 장애를 인해 서러움을 많이 겪었습니까.
= 엄청나게 많이 겪었습니다. 나는 자라면서 장애우들하고 있은 적이 없으니까 장애로 인한 서러움을 더 많이 맛보아야 했습니다.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건 감옥에서 있을 때의 경험인데 한번은 결투를 하는데 내가 처절하게 깨졌습니다. 상대가 요리조리 도망가는데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내 장애를 많이 비관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장애우들이 겪는 서러움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능력이 없으면 도태시키는 겁니다.
- 지금 작가는 현장을 떠나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장을 떠난 작품활동이 가능한가, 이런 의문이 드는데요. 쉽게 말해서 지금 작가는 과거를 파먹으면서 글을 쓰며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나는 지금까지 써온 것 외에 치뤘던 경험이 많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한데, 막말로 지식인 작가들 경우도 대학 나와서 그 지식을 활용해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거 아닙니까. 요는 지식인들은 계속 써먹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한두 번 써먹으면 바닥이 나니까 현장을 떠나면 어렵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형평에 어긋난 지적에 다름 아닙니다.
원명희는 최근 마산생활을 정리하고 상경해 경기도 남양주군 팔야 산리에 둥지를 틀었다. 여전히 집필활동에 여념이 없지만 한 가지 치열하지 못한 게 흠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더 낳아 “입이 하나 더 늘었으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반대로 딸아이의 재롱을 보며 늘어지는 게 있어 고민이다.”라는 것이다 이 점 외에는 소설 쓰는 데는 막히는 게 없다는 원명희는 앞으로도 장애우 문제를 비롯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하는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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