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의 영화이야기]문민시대와 패배주의의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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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시대와 패배주의의 사생아 - 강우석의 투캅스 -
<또 하나의 흥행(?)>
‘서편제’의 흥행이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둔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요즈음 강우석의 ‘투캅스’가 다시금 기록적 흥행에 도전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시장성을 다시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좋은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현상이 미국 영화의 횡포로 비틀거리는 방화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줄 수 있기에 더욱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60년대 초 군사 정권이 시작된 후 얼마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반면에 우리가 정신적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돈을 버는 것,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영화는 상업적 요소가 가장 많은 예술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한 영화작가가 흥행만을 고집하고 그 성공에만 집작하여 관객 (그것도 언젠가 필자가 분류했던 ‘저급한 다수’)의 취향만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다면, 그는 그가 얻고자 했던 재정적 풍요를 얻는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결국은 자신의 수렁을 파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의 영화작업이 어떠한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작가가 돈줄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다른 연예와 달리 ‘SIA" (State Ideological Apparatus : 국가적 이념장치)로서의 기능이 무시 될 수 없는 대중예술인 것이다. 환언하면 언젠가 필자가 인용했던 고다르의 말처럼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사회적 현상‘인 것이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베껴먹기>
우리는 ‘투캅스’라는 제목에서 강우석이 어떤 부류의 관객을 의식하고 제작에 임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캅’(cop)이란 영어의 ‘슬랭’(slang)으로 ‘경찰’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우리 관객이 ‘로보캅’이라는 영화로 처음 알게 된 단어이고, 영어를 제법 잘 아는 사람이거나, 미국 구경을 한 사람 외에는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하긴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교육열에 불타는 어머니가 많은 나라이고 보면 이것 역시 필자의 무지의 소치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독자들이 강우석의 전작인 ‘미스터 맘마’ 역시 영어로 된 제목이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필자의 논지가 무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요즘 영화관객이 누구인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영리한 감독이자 제작자이다.
요즘 텔레비전의 소위 코미디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공·영 3사가 모두 똑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모두가 십대를 의식하고 제작된 프로그램이다. 외화의 줄거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꾸미고, 그것을 보는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좋아한다. ‘투캅스’는 이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길들여진 아이들과, 좀 지능이 떨어지는 어른들에게는 재미있는 영화일 것이다.
‘영화란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평범한 진리이다. 그러나 영화는 독창성이 생명이며 영화의 재미는 이 독창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특히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진가는 소설이나 만화를 각색한 시나리오와는 달리 독창성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비 무비’(B Movie : 다른 영화를 희화적으로 모방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혹은 작품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 영화에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하는 미국인들을 은근히 경멸하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도 관객이 무궁무진한 미국의 시장을 부러워했다.
우리는 폐쇄된 정보 속에서 살아온 오랜 세월의 덕택(?)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선보인 김수현의 ‘야망의 계절’ (어윈 쇼의 ‘부자와 빈자’ : The rich man and the poor man)과 , 송지나의 ‘우리 마을’ (Apache Precint : 리차드 위드마크가 서장역을 열연) 을 보고도 그냥 웃어넘겼다. 물론 시청률은 대단했었다.
저작권 시비도 면제받은, 또 수천의 선량한 동포를 학살한 살인마도 쉽게 용서하는 관대한 백성이니, 외국영화를 베껴먹는 것 정도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못하는 자가 바보이다. 하여간 텔레비전 드라마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사회적 풍토가 오국의 광고를 공공연히 복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철면피함을 가능하게 하고, ‘투캅스’와 같은 영화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 속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써라.”, “꿩 잡는 게 매.” 아직도 독자들은 필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런 독자들은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 (My New Partner)를 보기 바란다.
<패배주의와 적당주의의 산물>
영화의 표절 시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디슨 시절, 그들은 저작권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재판을 한 적이 있으나, 영리한 에디슨은 자신의 영화를 페이터 스트립(paper strip)으로 만들어 국회도서관에 보관하여 그의 저작권을 주장하였고, 그 덕분으로 승소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에디슨의 초기영화는 이 페이퍼 스트립을 다시 촬영하여 만든 것이다.) 이렇듯 저작권이 쟁점이 되는 경우에만, 표절문제가 말썽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그러니 우리도 그 문제는 덮어두고 영화자체에 관한 것만 살펴보자.
이 영화는 두 명의 부패한 경관의 이야기를 익살맞게 그린 영화다. 그러나 재미있게 만들어진 영화이기는 하나 텔레비전 개그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코미디란 운명적인 비극적 요소가 없이는 개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채플린의 영화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연민과 페이소스(pathos)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이 영화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관객을 통해, 부패한 우리의 현실이 당연한 것이고 전혀 치유될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살아야지 하는 적당주의(conformism)가 우리 대중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의아하면서도 기쁜 것은 경찰청에서 협조해 주었다는 사실과 개신교에서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문민시대인가.
영화제작이 일확천금의 수단일 수도 잇다는 것은 자명해졌지만, 필자는 향후 몇 년 동안은 제작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흥행에 성공한 강우석 감독이 앞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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