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의 이어가기 글]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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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짓궂은 이야기 (3)
정희수의 풋사랑
1
동동주 한 사발로 목을 가다듬고 바야흐로 다음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참인데 지난 5월 미국으로 늦깎이유학을 떠난 "함께걸음" 발행인 이성재 변호사가 주책없게도 나의 술사랑을 걱정하는 잔소리를 팩시밀리로 보내왔다. 하여. "사랑을 받는 놈이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술·담배를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일종의 질투끼 배인 경고문이다. 고약한 친구 같으니!
그러나 내가 큰소리 칠 수 없는 까닭인즉 요 며칠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희수 시인이 "술사랑"의 배신행위가 얼마나 매몰차냐 하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독자분은 11월호의 "산울음" 이야기 편을 읽어서 익히 아시겠지만 술을 "까는" 정희수의 버릇은 술의 배신행위로 짓밟힌 풋사랑이 자기학대라는 반작용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닐까. 그 사랑이 오죽했으면 목숨까지 바치랴… 하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 젊은 시인의 지순한 사랑을 확인케 된다.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이 애오라지 사랑타령으로 시종 해 왔음에도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아 박용수에 이르러서는 이따위 잡문에까지 사랑이야기를 주절대도록 마련이니, 생각건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옛날옛적에 공룡시대가 마감되었던 것처럼 이 땅위에서 인종시대가 끝장이 나기까지는 아무래도 "사랑, 그 짓궂은 사랑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지 않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가슴 아픈 일은 "정희수"라는 젊은 시인의 속절없는 인생이다. 정희수의 머리가 어느 정도로 비상하냐 하면 몇 년 전 서봉수 프로와 6점의 접바둑을 두고 아깝게 진일이 있는 나의 바둑실력을 문단 선후배가 지켜보는 앞에서 완전히 묵사발을 만든 데서 확인할 수 있다.
80년대 말이었다. 재야의 어느 인사가 활동비를 조달할 수단으로 기원을 차린 날 기념대국장에 온 서봉수 프로 9단과 내가 접바둑을 둔 일이 있었다(당시 여러 사람이 급수만큼의 검은 돌을 놓고 서봉수 9단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대국을 하는, 뭐라나, 그런 바둑이었다.)
이겨보겠다는 한 가지 욕심에서 6점을 놓고 사력을 다한 끝에 근소한 차이로 아깝게 진, 그렇다, 아깝게 진 원통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 강1급이니 4점 놓으슈!" 하는 건방진 놈을 상대했다가 너무도 화끈한 참패! 중원에 한 점을 놓고도 완패! 견디다 못해 6점을 놓자니 체통이 말 아니지. 주위에는 늙고 젊은 문단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지, 일대 오기를 발동하여 내기를 건 것이 큰 실책이었다. 그 날 하루는 족히 즐길 수 있었을 액수의 술값을 몽당 털렸으니 말이다. 그 뒤로는 정희수를 상대로 절대 바둑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비상한 머리를 가진 천재시인이었기에 "함께걸음" 11월호의 글이 채 발표도 되기 앞질러 나의 음흉한 속내를 낌새챘음이 뻔한 일이고 귀찮은 선배의 험한 욕지거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다는 것이 저승까지 달아난 결과에 이른 모양이다.
농담이 사람 죽인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일컬은 말인가 보다 아무튼 긴 시를 쓰고 싶다던 젊은 시인이 그 한을 펴보지도 못하고 떠났으니 가슴이야 오죽이나 답답했으랴, 이 척박한 땅에서 못다 한 사랑이기에 저승에서나마 화려히 꽃 피우거라.
정희수 시인이여, 영생을 누리소.
2
정희수(鄭喜髓)는 195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한쪽 다리가 마비된 장애우 시인이다.
내가 정희수와 가깝게 지낸 것은 서로가 장애우여서가 절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전우(戰友)이다.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회원이었기에 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흔한 문인과 문인 사이의 만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러그러한 사이였던 우리 관계가 급작히 가까워진 계기는 6. 10 큰 싸움 덕분이었다.
86년의 대 탄압으로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폐쇄될 때 농성 주동자로 몰려 감옥까지 들락거려야 했던 내가 잔뜩 독이 올라서는 데모대를 따라다닐 때 미도파 앞의 그 자욱하던 최루탄 안개 속에서 정희수를 만났으니 어이 반갑지 않았으랴.
"민통련"을 박살낸 뒤고 기고만장해진 5공이 아예 싹쓸이를 한답시고 공안수배자 검거에 기관원이 총동원되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수배학생과 친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서울대학생 박종철군을 끌어다가 수배학생의 행방을 대라고 물 고문을 하던 끝에 애꿎은 젊은이를 죽여서 반전되어가던 때였다.
거리는 연일 시위대가 휩쓸고 다녀간 시가지가 최루탄 안개먼지에 휩싸여 있던 그런 날 오후에 미도파 쪽으로 나갔더니 눈가에 치약을 바르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절룩거리는 꼴이 한눈에 정희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녀석이 불편한 몸을 뒤척거리며 열심히 짱돌을 던지고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연신 돌을 꺼내어 던지던 녀석이 돌이 떨어졌는지 돌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알아보고 뒤뚱거리며 달려와 얼싸안는 것이었다.
"녀석아! 맵지도 않냐? 그만하고 목구멍이나 씻자."
애시당초 5공이라는 군사독재정부는 민중의 피로 멱감고 나타난 살인집단이었다. 12. 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손아귀에 쥔 뒤 재야인사를 닥치는 대로 잡아넣고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총칼을 휘둘렀다. 광주에서는 수천 명의 민주시민을 살상했다. 그리하여 피 묻은 군화발로 민족역사를 짓밟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시민의 저항은 줄기찼다. "문부식"을 대표하는 부산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한 한 떼의 학생들이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힐 것과 군인의 시민 학살행위와 5공을 인정한 미제국주의자들의 사과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군사정권은 공안세력을 총동원하여 민청련 의장 김태근씨를 잡아 가두고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에도 항복을 않자 "이안근"이라는 고문기술자를 시켜 전기고문까지 자행했고, 부천 경찰서 형사 "문귀동"은 수배학생의 친구인 권인숙양을 불법 연행하여 수배학생의 거처를 거짓으로 댄다고 성 고문이라는 짐승 같은 행위를 하는 따위, 온갖 재주를 다 부리던 끝에 역시 수배학생의 친구일 뿐인 박종철군을 고문 치사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김근태가 이근안으로부터 정기고문을 받았고 박종철군이 물 고문을 받다가 죽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데는 박종철군이 횡사하기 한 달쯤 전에 내가 열흘동안 고생고생하며 조사를 받은 곳이라 박종철군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고문 받다가 어디에서 숨을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6년 11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은 한 통의 공문을 "민통련" 사무실로 보내왔다. 당시 민통련은 5·3 인천사태의 모든 책임을 덤터기 쓰고 간부진 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 중이어서 집행부는 모두 새로 보충된 사람들이었고, 나 또한 보도실장이라는 직책이 빌미 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지 사흘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공문의 수신자는 "민통련 의장"이었지만 문익환 의장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몸이기에 보도실장이 "수신"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1986년 11월 8일까지 민통련 폐쇄명령".
대응해 싸워야겠는데 인력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긴급히 "지운협"(지방조직)에 전통을 띄우고 시내에 산재한 부문조직의 연락망을 가동시키고, 고참 신참 간사들을 들볶아 플래카드를 내걸고 스피커를 설치하고 성명서를 인쇄하는, 벼락치기 준비 끝에 6일 오후부터 "민통련 사수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7일까지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던 경찰이 8일이 채 밝아오기도 전인 오밤중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철제문을 부수고 밀어닥쳤다. 덕분에 나는 농성주동자가 되어 두 눈을 가린 채로 어딘가에 끌려갔는데 거기가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악명을 전승 발전시키고 있는 대공분실, 남영동 전철역 바로 옆의, 좁다란 창문(창문이 좁은 까닭은 창문을 통한 탈출 투신을 막자는 것이란다)이 촘촘한 잿빛벽돌집이 그거다. 이곳이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고문으로 마음과 몸을 찢기우고, 민족사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겨놓은 산실이다.
조사실 안은 우선 첫눈에 섬짓하다. 네 벽이 온통 진한 황토 빛인데 벽마다 1㎝간격의 토큰구멍 크기의 자잔한 구멍이 뚫려있어 가만히 앉아있어도 소름이 끼칠 풍경이다(뒤에 안 일이지만 이 구멍은 고문을 받으며 지르는 비명이 밖에서 들리지 않도록 막는 방음장치란다). 가로 4m, 세로 5m 쯤에 한쪽 벽에는 예의 그 좁다란 창문이 둘, 이 창문을 통해서 아침 햇살이 늘 서쪽에서 들어왔다. …는 것은 이 건물로 들어오는 통로가 S자 모형으로 이리저리 에돌아서 사람의 방향감각을 마비시키도록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시간관념을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출입구 쪽에 철제 책상을 사이하여 의자가 둘이 놓였는데 회전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책상다리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책상과 경계하여 두자 높이의 칸막이 벽이 있고 그 안에는 양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커다란 욕조, 욕조 곁에는 1인용 침대가 있다. 첫날에는 밤을 새워 조사를 받고 "서쪽에서 해가 뜰" 무렵에야 그 침대에서 잠깐 단잠을 잤다. 두꺼운 스펀지를 깔고 담요를 덮어서 꽤나 폭신했던 이 침대가 스펀지만 드러내면 일명 "칠성판"이라 불리워지는 고문기구가 된단다.
3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원인무효 시키려는 고수급 수사관들과 아옹다옹하며 보낸 대공분실 시절을 열흘만에 마감하면서 얻은 "국보"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서대문구치소로 이사한 뒤 0.75평의 마룻청 독방에서 삼동의 살바람으로 단련까지 받아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87년의 큰 싸움 마당에서 아예 살기 버릇했었다. 더욱이 얌전하고 고운 얼굴의 박종철군이 내가 다녀온 그 조사실에서 죽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치떨리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왼손 집게손가락에 낀 로사리오반지를 부지런히 굴리면서도 5공의 살인마들과 사생결단을 하리라 이를 갈고 또 갈았다.
우리 조직은 87년 봄부터 5공의 심장부에 칼을 들이대는 싸움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나갔다. 6월 10일 오후 6시 국기하강식의 애국가를 신호로 삼아 전국적인 "동시다발 시위"를 결행키로 정하고, 지방은 지방단위로, 서울은 각 부문단체별로 학생은 대학별로 나뉘어 일정한 장소를 택해 일시에 가투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자실" 소속으로 "민통련"에 파견된 형식이었기에 문화단체 성원들과 남대문으로 진출할 시위대에 배치 받고 중앙일보 뒷골목에서 집결하여 6시를 기다리다가 경찰에게 선수를 빼앗겨 사과탄선물부터 먼저 받은 꼴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기다릴 형편도 아니어서 준비한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주 구호)
"사천만은 하나됐다. 군부독재 각오하라!"(부 구호)
"독재조정 호헌지지 미국놈들 몰아내자!"(부 구호)
당시의 구호는 이랬다. 주구호는 플래카드로 만들고 부구호는 피켓에 붙여 들었다. 서울역 쪽에서는 남부지역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퇴계로 쪽은 청년단체가 그리고 농민단체, 노동단체, 빈민단체, 또 무슨무슨 단체가 어디어디를 점거해 싸운다는 식으로 같은 시간에 거리를 메우자 시가지는 삽시간에 최루탄 가스와 화염병 연기로 뒤엉켜 하늘까지 어둡게 가리웠다.
다음 집결지는 명동성당, 남대문에서 밀린 우리가 명동성당으로 갔더니 무슨 발빠른 사람이 그리도 많았던지 성당입구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메워진 뒤였다. 하나 어이가 없어서 멍청히 바라보고 섰는데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돌아보니 정희수가 아닌가.
"너, 잘 만났다. 목이 따가워 죽겠으니 딱 한 잔만 마시자."
우리는 성당 앞 골목 가게로 들어가 캔 맥주 꼭지를 기세 좋게 땄다.
"아까는 안 보이드만 어디 있었냐?"
"퇴계로에서 싸웠어요."
"그쪽은 많더냐?"
"수천명은 됐어요."
"녀석아! 거긴 청년단체인데 기껏 백명도 안될 거 아녀?"
시위군중을 헤아린다는 것이 대개 이러했다. 자기 한 몸이 인파 속에 묻히면 온 천지가 사람으로 꽉 메어진 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6·10 큰 싸움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초저녁에 모인 사람들도 밤이 되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인데도 6월 10일의 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기만 했고 분위기도 전에 없이 활기 넘쳤다. 자정이 되자 성당 앞 뒷마당은 완전히 사람으로 메꾸어졌고, 젊은 패들은 끊임없이 짱돌을 던지고, 사과탄과 지랄탄이 성당 입구까지 날아들고…
정희수는 밤새도록 싸움패에 섞여 짱돌을 던져댔다. 그러다가 지치면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새참을 달라는 것이지.
"너 고되겠구나."
그때마다 나는 그 녀석을 끌고 골목으로 내려가 술을 샀다. 짱돌을 던지는 일은 싸움이기보다 노동이었기에 말이다.
술잔을 드는 정희수는 여느 때 아니게 신나 했다. 두 눈은 핏발이 설대로 서서 도깨비 눈처럼 빨갛게 치약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은 도무지 봐줄 형편이 아니었지만 입은 연신 히히거리며 술을 받아넘겼다.
"저두요. "바람소리"같은 긴 시를 쓸거예요."
"바람소리"란 내가 쓰다가 중단했던 장시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뭐가 그리도 한이 많냐? 짤막짤막하고 밝은 사랑노래나 읊조릴 일이지."
"보쇼! 선생! 저에게 한이 없다면 어떤 놈이 한이 있겠어요. "바람소리" 열 권을 써도 풀릴 것 같지 않은데 말예요."
나는 안다. 그 한이 절뚝거려야 한다는 장애의 한이 아니라는 것을. 천재시인의 빼어난 머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시대의 아픔을 느껴야 하는 이 땅의 시인이기에 가져야 하는 한임을 나는 알고 있다.
민족으로 향한 끈끈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짱돌을 던지게 했겠지만 짱돌 하나로서는 깰 수 없는 군부독재의 완강한 벽을 확인했을 때 정희수가 느꼈을 좌절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오죽했으며 사랑하는 술을 "까는" 원수처럼 씹어서 먹고 입에서는 한시도 담배를 떼지 못하는 울분으로 그 허구한 젊은 날을 보내었으랴.
그러나 갔다.
정희수 시인은 떠나갔다.
끝내 긴 시를 쓰지 못한 채 가고 말았다.
그는 떠나면서 울었을 것이다. 울어도 서럽게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화염병이 불바다를 이룬 거리에 쓰러지지 못하고 병으로 넘어진 자기의 건강을 울었을 것이다.
박종철처럼, 이한열처럼 독재의 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지 못하고 배반당한 풋사랑으로 쓰러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젊음을 울었을 것이다.
긴 시 한편 쓰지 못한 사랑의 통곡으로 구천에 메아리치고 있겠지.
어쩐다?
모든 것이 끝났다.
괴롭기는 하였지만 사랑했던 이 땅이기에 되돌아보지 마라.
다만 쉬고 있거라.
고이고이 쉬라.
나 또한 언젠가는 너를 찾아가서
이 땅에 태어난 갑갑증을
시원히 씻어낼 소주 한 잔 나누기
기약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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