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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경과 함께하는 민요기행]차가운 대륙의 멜랑콜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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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대륙의 멜랑콜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라흐마니노프,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피아노의 거장이지만 자기의 기교를 중심으로 한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의 독창성을 개척하여 피아노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실내악곡, 성악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의 본령은 역시 피아노 음악으로 4개의 협주곡, 24곡의 전주곡은 피아노곡의 에센스라 할 수 있다.

 겨울에는 라흐마니노프를 듣는 것이 제격이다. 장엄하면서도 멜랑콜리한, 그래서 때로는 소녀처럼 눈물을 쏟게 하는 피아노의 선율 말이다.
 현재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그 웅장한 오케스트라 속을 누비는 피아노 소리는 바람찬 거대한 대륙을 달려가는 러시아 유목민들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차가운 겨울바람 사이로 날리는 하얀 눈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장작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찻집에 앉아서 쪽창 밖으로 몸서리를 치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듣기라도 한다면 아주 제격일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4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4곡이 모두 뛰어났지만 그 중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2번이다. 한 평론가는 그 2번을 가리켜 "우울한 가운데 그지없이 달콤한 낭만성과 심오한 사상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장엄하기까지 한 곡이다. 그래서 온 인류가 즐겨 듣는 곡"이라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를 잘 치는 어머니에게서 재능을 받고 태어났다. 그런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다니던 1891년 그의 나이 18세 때 이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커다란 몸집에 비해 섬세하고 여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작품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절망한 나머지 그만 심한 노이로제에 걸리고 만다. 그 노이로제는 그로 하여금 아주 많은 고통 속에서 살게 했는데 바로 이 병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낳게 한 장본인이다.
 1900년 어느 날 심한 병상에 있던 라흐마니노프는 정신과 의사인 N. 달 박사를 만나게 된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노이로제를 고치는 독특한 최면술 방법이 발견되어 러시아에서도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워낙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어서 별반 치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N.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의 병은 고지식한 그의 성격이 주원인이라고 생각, 치료의 방법을 달리했는데 그것은 바로 라흐마니노프로 하여금 스스로 위대한 작곡가라는 인식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병은 깜쪽같이 나았다.
 그가 오랜 병마에서 빠져나온 1901년, 그의 나이 27살 때 그는 드디어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고해 낸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N. 달 박사에게 헌정하였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작곡 양식으로 보아 1860년 전후의 모양새를 띠고 있는데 20세기의 첫 해가 되는 1901년에 이런 형식의 곡이 씌여 졌다는데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쓰여진 1901년은 드비시의 걸작인 "야상곡"이 파리에서 초연 되었는가 하면 독일의 뮌헨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4번"이 발표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낡은 기법으로 곡을 썼던 것이다. 
 협주곡(콘체르토)이 16세기 중엽 처음 생겼을 때는 이탈리아어의 뜻인 "협력, 일치, 조화"로서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러가 하모니를 이루는 약식으로 쓰였으나 17세기부터는 본래 라틴어의 뜻인 "경쟁, 대항, 투쟁"이라는 상반된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이 두 가지 뜻이 합쳐진 것과 같이 한 피아노가 약 1백명의 오케스트라와 맞서서 처음에는 "경쟁, 대항, 투쟁"을 일삼다가 나중에는 "협력, 조화, 일치"를 이루어낸다. 음악적인 투쟁도 아름답지만 그 조화는 더욱 찬란하다.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으나 1917년 그의 나이 44살 때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 그 해가 저물 무렵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망명은 하였지만 한시도 그의 고향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1943년 미국 켈리포니아의 비버리 힐즈에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음악의 거장인 그가 미국 땅에 묻히고 만 것이다.
 폴란드의 음악가로 프랑스에서 숨을 거둔 쇼팽은 파리의 묘지에 묻혔으나 자신의 심장만큼은 고향인 폴란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해 쇼팽의 심장은 지금 폴란드에 묻혀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살아 생전 고향을 그리워했음에도 그런 유언은 하지 않았다. 후에 라흐마니노프를 가장 존경하던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러시아를 다니러 갔던 중 러시아 흙과 평소 라흐마니노프가 좋아했던 라일락을 가져와 그의 무덤 가에 뿌리고 심어주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에는 한 줌의 러시아 흙과 라일락 나무가 자라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피아노의 거장이지만 자기의 기교를 중심으로 한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의 독창성을 개척하여 피아노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실내악곡, 성악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의 본령은 역시 피아노 음악으로 4개의 협주곡, 24곡의 전주곡은 피아노곡의 에센스라 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유수한 음악가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던져준다. 베토벤을 비롯한 대개의 음악가들이 구렛나루 등을 기른 것에 비해 항상 수염을 짧게 깎고 다닌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결벽증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들게 했다.
 차이코스키보다도 더 염세주의자였던 그는 언제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그의 세상살이는 오직 음악 하나에만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의 음색은 매우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는 엄청난 힘과 아름다움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영원히 살아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유난히 영화음악에도 많이 쓰였다.「여수」「7년만의 외출」「랩소디」… 그러나 이들 작품보다도 먼저 그의 음악을 영화에 쓴 작품이 있는데 바로 1946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밀회"이다. 바로 이 밀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삽입되면서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선율은 "밀회"의 타이틀백이 비치면서 시작되어 영화 끝까지 전곡이 점철된다.
 라흐마니노프, 그의 몸은 갔지만 그의 정신이었던 음악은 아직도 이 세상의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작성자김예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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