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희의 연작소설] 완전한 반(8) 여판사의 죽음
본문
"정말 더러워서 못 살겠네."
"여자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여자는 사람 아네요?"
나는 있는 대로 악을 썼다. 전화 섭외에 실패한 나는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그 실패를 조롱하는 것 같아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미스호, 오늘 시작했어."
여성 잡지사에 근무하는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정말 이상한 집단이었다. 면역이 될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헐크처럼 인상을 쓰게 된다.
"부장님이 부르셔."
나는 얄밉게도 부장을 방패로 삼았다. 나는 폭발 일보직전이었지만 폭발시킬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 호출은 반갑지 않은 일이라 부장실로 가면서 자꾸 한숨이 나왔다. 또 무슨 트집을 잡을까를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어, 어서와. 미스호!"
부장 표정이 아주 밝았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미스호, 지난번 특종 기사 아주 반응이 좋아. 사장님께서 특별히 칭찬을 하시더군. 수고했어."
사장이 좋아하건 말건 내가 하고 싶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취재를 하고 소신껏 기사를 쓰겠다고 천명을 했건만 사장이 칭찬을 했다는 소릴 들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사장이 뭔가 싶어 석소가 흘러나왔다.
"미스호, 제주도 아직 못 가봤지."
"네, 아직."
서른 살이 되도록 제주도 한번 못 가본 것이 자존심이 상해 그 좋은 기분이 싹 가셨다.
"제주도 바람 한 사날 세며 머리 좀 식히고 와."
"네에?"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에 귀를 의심했다. 특종 기사에 대한 보너스치고는 너무 커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특종 기사가 잘못되어 사직서를 내게 하려는 선심이 아닌 가도 싶었다.
"미스호 성격에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취재 아이템은 줄게. 제주도 신혼여행의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라는 건데 신경 쓰지 말고 눈에 보이는 대로 스케치를 하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가서 미리 답사를 하라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갈 결혼이면 아예 안 가고 말 거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부장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대꾸이기 때문에 참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 계획을 세워 놓았다가도 취재가 갑작스럽게 걸려 포기해야했던 나는 신혼여행 때는 하면서 제주도를 보물섬으로 남겨 놓았었는데 그런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라 취재로 보물섬을 찾게 된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동경의 섬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공항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효도관광을 떠나는 노인 대학 학생들, 졸업여행을 가는 진짜 대학생들, 007 서류 가방을 든 비즈니스맨들 그리고 촬영을 하러 가는 영화배우같이 치장을 한 신혼부부들, 난 이제부터 그 신혼부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눈길을 고정시켰다.
비행기 안에서 신혼부부와 같은 좌석이 되길 간절히 빌었다. 그래야 그들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기도는 효험이 없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한 장애인 아가씨가 자리를 찾아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 안 좌석으로 자리를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이 손님이 들어가시기가 불편해서요."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다 알 텐데 승무원은 그 아가씨를 미안하게 만드는 설명을 했다.
"아 그러세요."
나는 아주 흔쾌히 자리를 바꿔주었다. 비행기는 창가가 더 좋은 법인데 양보 덕분에 나는 오히려 좋은 자리를 얻게 되었다.
승무원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승무원이 목발을 가져가려고 하자 몹시 언짢은 듯 그냥 바닥에 두겠다고 앙칼지게 저지시켰다. 승무원은 바닥에 둘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착륙을 하면 잊지 않고 갖다 주겠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승무원은 아주 친절했다. 짜증기가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서비스 수준이 언제 이 정도가 되었나싶어 놀라웠다.
승무원과의 목발 실랑이를 본 나로서는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 차가움에 몸을 움츠리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가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맨몸으로 이렇게 떠오른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싶었다.
옆에 앉은 그녀도 창 밖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앞으로 숙여 창밖을 보려했다. 난 얼른 내 머리를 뒤로 재껴 비켜주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정순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마비 여자 판사였던 정순희. 그녀를 취재했던 나로서는 그녀의 죽음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가족들의 주장에 그녀의 죽음의 의혹을 풀기 위한 취재를 하려고 했었지만 데스크에서 허락을 하지 않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개인적으로라도 취재를 해서 의혹을 풀어보려고 했었는데 일에 밀려 또다시 포기했어야 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그 의혹을 풀기로 결심했다. 부장 말대로 신혼부부 취재는 대충해버리고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정순희 판사의 죽음을 규명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정순희 판사가 제주지방 법원으로 발령을 받고 제주도에 온 것은 1990년 3월이었다. 제주 발령을 받은 그녀는 동료들과의 송별회에서 아주 기분 좋은 듯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주도에 가서 한 3년 쉬다 와야겠어요. 제주도까지 가냐고 걱정들 많이 하시지만 전 오히려 잘 됐다 싶어요."
그 당시 정순희 판사의 나이는 서른 여섯 살이었다. 여자, 그것도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갖고 서른 여섯 살에 이루어 놓은 여 판사라는 직함은 대단히 빛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모 또한 빛났다. 너른 이마는 명석해 보였고 크고 빛나는 눈동자에는 상대방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꼭 다문 입술은 차가운 기운이 감돌면서 도 이지적이었다. 그녀가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작게 축소될 만큼 그녀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는 힘이 들었다. 정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때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정신없이 뛰어오다 보니 정상에 오르긴 했는데 너무나 숨이 차서 더 강행군을 했다가는 쓰러질 것 같아 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정판사는 제주도 행을 그렇게 기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그녀에겐 가장 복잡한 시기였다. 바로 밑에 동생이 교원 노조로 맹렬히 정부와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이 어수선했다. 동생이 교원노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 판사에게 무게를 실어주었다.
"정판사 동생이 교원노조라면 서요?" 라고 묻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동생이 빨갱이라면 서요? 라고 확인하는 사람처럼 굳어있었다. 해방이후 정치 노선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편견적 시선이 정 판사에게 쏟아졌다. 동생 때문에 삭탈관직이라도 시킬 양 은근히 교원노조를 물고 늘어졌다.
"내가 동생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불의를 보고 불 구경을 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잿더미가 되고 있어요. 불을 끄는 일을 돕지 못할망정 불을 끄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은 불 구경꾼보다 더 양심이 썩어있는 사람들이겠죠."
정판사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너무나 단호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녀의정연한 논리에 입도 뺑긋 못하고 돌아서고 나서 그들은 영락없이 그녀가 교만하다고, 잘난 척을 한다고 그녀를 평가했다. 그녀의 교만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녀에게 진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이길까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그녀를 지게 할까를 연구했다. 그들은 곧 그녀의 적이었다.
그녀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제주도 신문들은 일제히 그녀의 발령 소식을 기사화 했는데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입시 경쟁에 의해 경기여중과 경기 여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는 것, 게다가 현재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어 머지않아 박사님이 된다는 나무랄 데 없는 학력이제주도 사람들의 기를 죽였다. 더군다나 여자이고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기분 나빴다. 여자한테 지다니, 그까짓 장애인한테 지다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생각은 법원 동료들 사이에 더 강했다. 그녀 때문에 패배감, 더 나아가서 위기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느덧 그녀의 적이 되어 있었다.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육지에서 오는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는 습성이 있어 그 누구도 반기지는 않지만 특이나 그녀의 조건이 제주인 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를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제주인 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울 사람들과 다른 인간미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했다.
그녀는 제주도를 무척 좋아했다. 우선 맑은 공기가 더없이 귀하게 느껴졌다. 서울의 탁한 공기만 마시다가 제주도 공기를 마시니까 마치 청량음료처럼 가슴을 톡 쏘아주었다.
그리고 바다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녀는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산은 그녀의 장애 때문인지 싫어했다.
그녀는 제주도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 아이처럼 설렜는데 그것은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발령을 받고는 왔지만 관사가 아직 비지 않아 그녀는 법원 근처에서 하숙을 해야 했다. 판사님의 하숙생활이 모양새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제주도생활이 익숙해질 때까지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낫다고 까지 생각했다.
"판사님은 무신 반찬을 잘 드시는강 몰랑 밥상 초리기(차리기)가 어렵수다."
그녀는 제주도 방언이 재미있어 깔깔 웃으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되묻곤 했는데 그것이 제주인 들에게는 더 경계심을 갖게 했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제주인 들은 그 노력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녀가 제주도 방언을 배우려고 따라하면 자기네들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들의 오해는 깊었다.
"참, 제주도는 어디부터 구경해야 좋아요?"라고 사람들에게 묻곤 했는데 그것이 또 흉이었다. 판사가 일 하러 오지 않고 놀러온 모양이라고 쑥덕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에서 계획했던 대로 제주도를 알기 위해서 제주도 구석구석을 가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관광지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이 놀러온 판사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제주인 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권유한 일출봉, 만장굴, 산금부리, 산방굴사 등은 모두 그녀에겐 너무 힘든 난코스였다. 산으로 올라가거나 굴속으로 내려가는 그런 등산 코스였다. 한라산도 중턱까지는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고 다른 곳도 다 편하게 잘 되어있다는 얘길 듣고 안심을 했었는데 막상 다녀보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소개를 해준 사람들이 야속했다. 어쩌면 그렇게 남의 사정을 몰라주나 싶어 약이 올랐다.
"판사님, 구경 잘 하셨어요?" 라고 물을 때 그녀는 올라가지 못해 내려가지 못해 발길을 돌리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곤 그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일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제주인 들을 가슴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혼자 시간을 보냈다. 관사로 이사를 한 후는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너무나 답답하면 그녀는 바다를 찾았다. 마침 자동차를 구입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다 구경을 갈 수 있었다. 동 서 남 북 어느 쪽으로 가도 바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길을 모르면서 겁없이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그러면 영락없이 바다가 그녀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것이 제주도 생활의 큰 기쁨이었다.
그럴 때쯤 그녀에게 닥친 일은 교원노조 재판에 대한 판결문을 쓰는 것이었다. 교원노조에 대한 판결문은 그녀가 판사가 된 이래 가장 힘든 과제였다. 법에도 규정이 없을 뿐더러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소신껏 할 수만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 소신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그녀는 우선 판결문 초안을 양심껏 썼다. 그리고 나서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수정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당신이 교원 노조 판결문을 쓴다고. 기대해 보겠소."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전화통을 통해 흘러나오곤 뚝 끊겨버렸다. 아무런 내용은 없었지만 그 음흉한 음성 때문에 협박을 받은 것 이상으로 무서웠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 그 전화는 법원에 뿐만이 아니라 관사로도 걸려와 하루 종일 그 목소리에 시달렸다.
판결문 발표 시기가 다가오자 정부 기관에서도 심심지 않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깍듯이 인사를 하곤 판결문에 의해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간곡한 사정을 했다. 말은 사정이었지만 내용은 강력한 요구였다. 어떤 때는 그녀의 목숨이 걸려있음을 암시하며 은근히 그녀의 숨통을 죄었다.
그녀는 갈등했다. 지금까지 그토록 어렵게 쌓아온 탑을 무너뜨릴 것이냐, 양심을 속일 것이냐를 놓고 그녀는 방황했다. 진리의 편에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가 지금의 자리를 얻기 위해 쏟았던 땀은 단순한 땀이 아니라 피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기 혼자라면 얼마든지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진리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를 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기에 마음 같아선 진실이 담긴 판결문을 공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부모에게 그녀는 생명이었다. 돌 지나 찾아온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후 그들은 딸의 다리가 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업어서 등교를 시키면 어머니가 업어서 하교를 시켰다.
경기여중에 입학을 한 후는 택시로 등하교를 시키다가 아예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할 정도로 딸에게 정성을 다했다. 워낙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그들은 힘든 줄을 몰랐다. 그들의 꿈대로 판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치 대통령이 된 듯이 기뻐했다. 정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넉넉한 가정도 아니었고 딸만 셋을 둔 데다 아들 맞잡이인 그녀가 완전한 몸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가 죽었다. 그녀가 판사가 된 후 지금까지 받았던 그 모든 설움을 설욕할 수 있었다.
정순희 판사는 정말 집안에서 대통령이었다.
집안의 모든 생활이 그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져야 할 책임이 많아졌다는 뜻도 되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삶은 없었다.
가족들의 지나친 경호 때문에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제주도로 내려올 때 그녀는 그 경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눈물은커녕 콧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다 성숙해서 부모의 보살핌을 원치 않고 독립적인 삶을 갈망하는 성인이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장애 위에 얹혀진 또 하나의 장애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번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자기 하나만 믿고 있는 분들인데 실망시켜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아이로 살고 있었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는 효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일도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잘못되면 그녀집안이 잘못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양심은 진실을 왜곡시킬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판사님, 판결문은 어떻게‥‥‥‥"
법원 직원들도 모두 그 교원노조 재판에 대한 판결문 때문에 경직되어 있었다.
"야유회나 갔다 온 다음에 생각합시다. "
그녀는 직원 야유회를 망칠 수 없기에 판결문 발표를 그렇게 야유회 뒤로 미루었다. 그녀는 판결문이 활자로 형상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프린터로 뽑지도 않고 그냥 디스켓에 보관해 놓았다.
법원 야유회 날은 1990년 5월 20일이었다. 그녀 자신의 차를 몰고 갔다. 부임해 온 지 두 달이 좀 지난 후라 아직 직원들과 서먹한 상태였다. 정판사는 이번 야유회를 통 해 그런 서먹함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같이 어울리려고 애썼다. 잘 하지 않는 농담 도 하고, 따라주는 맥주도 받아 마셨다. 노래도 한 곡조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런 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야유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그녀의 차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다. 갈 때는 여직원이 탔었는데 돌아올 때는 방향이 맞지 않아 그녀 혼자 타게 되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가 함께 출발을 했는데 그녀가 앞장서게 되었다. 예우에서인지 자꾸 먼저 가라고 했다.
그녀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속도를 냈다. 혼자 다닐 때는 마냥 갔었는데 자기 때문에 빨리 가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니 천천히 갈 수가 없었다. 또 운전도 못하는 게 하면서 흥을 늘어놓을 생각을 하니 더욱 속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직원들은 그녀의 흥을 보기 위해 근무하는 사람들 같았다. 약간의 실수도 그들은 허 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뻔 그 완벽 함조차 홈이 되어 그들의 흉보기에 오르곤 했다. 남의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처음에는 정으로 느껴졌지만 모든 일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에 불편하고 지겨웠다.
서울에 있을 때는 가족들의 관심에 시달렸었는데 제주도에 와서도 여전히 그 감시성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팔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의 관심을 거부하지 않고 그냥 그 관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도 그랬다. 처음에 속력을 낼 때는 두려웠지만 일단 속력을 내고 나니까 두려움 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오히려 쾌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깐이었다. 야유회가 끝나면 하며 미룬 일이 그녀를 짓눌렀다. 야유회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 룰 수 없는 일이었다. 내일이 운명의 날이었다. 판결문에 대한 파동을 어떻게 수습해 같지만 남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옷을 벗게 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거듭했다. 막내 동생도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을 하니까 시집을 보내면 되고 부모님이 야 어떻게 한들 못 모시겠나 싶었다. 그렇게 자기 정리를 하고 나니 편안했다.
그때였다. 검은 잠바 차림에 검은 안경 검은 헬멧을 쓴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그 오토바이는 정순희 판사와 레이스를 하듯이 옆으로 바짝 붙어 속도를 맞추며 달렸다. 가끔씩 힐끗 힐끗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그녀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젊은이들의 장난기스러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조소하는 악의적인 흐들거림이었다. 정판사는 그 오토바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빨리 가라고 말이다. 양보의 뜻을 전했지만 그 오토바이는 그녀의 양보를 바라고 있지 않았다. 더 크게 웃으며 야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오토바이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력을 더 냈다. 그런데 그 오토바이는 겁도 없이 그녀 차 앞으로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그 오토바이와 충돌을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핸들을 있는 대로 꺾었다.
하늘을 찌르는 굉음이 한산한 도로를 매웠다. 그리곤 곧 조용해졌다. 그때의 시간이 저녁 7시였다. 그런데 그녀가 병원으로 옮겨진 시간은 무려 3시간이나 흐른 밤 10시 무렵이었다.
그녀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은 법원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도로를 지나가던 택시 기사였다. 법원 직원들은 그녀의 차가 곤두박질 친 것을 못 보았단 말인가. 그 길로 지나간 것이 분명하고 그녀의 차가 바다 속으로 다이빙한 것도 아니고 돌 벽에 코를 박고 있었는데 그것을 못 보았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녀의 차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고 그녀 차가 포니 액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모르고 지나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방관한 살인 동조자들이다. 사고는 막을 수 없었다하더라도 출혈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절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숨이 끊어졌다고 하니까 조금만 일찍 병원으로 옮겼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는 다분히 고의적인 요소가 있다. 교원노조 판결문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 그녀는 음해 당한 것이다. 운전 미숙에 의한 교통사고라는 그럴듯한 올가미를 씌워 그녀의 양심과 그녀의 지성을 송두리째 뽑아 가버린 것이다.
"개자식들!"
나도 모르게 목이 스며 나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옆 좌석의 여자는 안내 책자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더욱 더 다행스러운 것은 제주도 도착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어 내 욕은 그 소리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먼저 내리세요. 저는 제일 나중에 내릴 거거든요."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야 그녀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범인을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제주 공항을 달음질쳐 빠져나왔다. 이제 내 눈에는 신랑 신부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추리가 사실임을 입증해 가는 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었다.
서울과는 달리 택시 잡기가 수월했다. 공항 밖에는 서울 손님들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오히려 손님을 잡고"있었다.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는 힐끗 쳐다보며 "혼자세요"라고 서울말로 물었다.
"네, 제주지방법원으로 가세요."
그는 다시 나를 힐끔 쳐다보며 제주지방법원이냐고 확인을 했다. 그렇다고 힘주어 말하자 출발했다.
나는 법원에 가서 정순희 판사의 70일 동안의 짧은 제주도 생활의 흔적을 찾아낼 참이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도 그녀가 지나갔던 길이기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뭔가를 찾아낼 양 열심히 쳐다보았다.
"법원에 재판할 일 있으세요?"
기사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빨리 대답해주지 않으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더 이상한 행동을 할 것 같아 대답했다.
"친구가 있어요."
"누구요?"
그 기사는 유난히 궁금한 것이 많았다. 나는 귀찮았지만 대답을 하기로 했다.
"정순희 판사요."
"네에? 정순희 판사요?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친구라면서 죽은 것도 몰라요? 쯔쯔."
기사는 혀를 한없이 찼다. 헛걸음친 것이 안타까워서였겠지만 그녀의 죽음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한 듯했다.
친구라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했을 때는 얼굴이 후끈했지만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난 그에게 얼굴을 바싹 붙이며 물었다.
"정 판사 왜 죽었어요?"
"교통사고였지요. 차를 뽑은 지 한 달도 안 되셨거든요. 그리고 제주도는 사고나기 쉬워요. 신호등이 없어요."
"정판사가 죽은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요. 신문보고 알지요."
"신문에 났었어요?"
"신문에 나다 뿐이에요? 아까운 양반 돌아가셨다고 제주도가 떠들썩했었어요. 쓰레기 같은 놈들은 안 잡아가시고, 아무튼 하느님도 문제라니까."
"하느님이 잡아간 게 아니겠죠."
"어이구 교인이시군요."
"아뇨, 정판사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말씀이에요."
"의혹? 아녜요. 그런 거 없어요. 교통사고에 무슨 의혹이 있습니까,"
그는 아주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그도 한편이구나 싶어 그와 맞서게 되었다.
"그럼 왜 사고가 나자마자 병원으로 옳기지 않았죠? 정판사 뒤에 법원 직원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왜 모르는 척 했느냐고요."
"무슨 말씀 인등, 법원 직원이 있었수까. 정판사님은 외가에 다녀오는 길이었씀둥. 어찌 법원 직원이 뒤를 따를 수 있수까."
기사는 급하지 자기도 모르게 제주도 말로 항변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신문 기사는 정판사가 사고 당하기 전의 행적을 왜곡 보도했다. 직원 야유회가 아닌 외갓집에 다녀오던 중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냈다고 말이다.
"개자식들, 내 당장 모가지를 베틀어……"
기사는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속력을 내고 있었다. 빨리 법원 앞에 나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양이었다. 정순희 판사를 저 세상으로 집어던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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