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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희의 연작소설]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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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장 찍느라고 힘들지 않았어요?"
  주간이 인세를 건네주며 하는 말은 항상 똑같은,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다. 작가와의 협약에 의해 인지를 생략한다는 노인지를 거절한 것을 비꼬느라고 하는 빈정댐이었다.
  "하루에 몇 만 장이라도 찍을 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주문만 하세요."
  하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주간은 생각만 해도 좋은지 너털웃음을 웃었다.
  "잘 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인씨 2부를 구상해 보는 것이 어때요?"
  주간은 벌써 장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야 해요. 질질 늘여놓으면 1부까지 망치게 돼요."
  하인은 돈 봉투를 집어 핸드백에 넣었다. 하인은 돈 봉투를 자기 손으로 집어서 자기 핸드백에 넣을 때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머리를 쪼아서 뛰어놓은 작품을 돈과 바꾼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무명 시절을 생각하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원고 뭉치를 들고 출판사를 기웃거리고 출판사 말단 직원에게 굽실거리며 출간을 타협하고 타협이 어그러져 다시 원고 뭉치를 들고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하인은 자기가 왜 문학이라고 하는 고행 길에 들어섰던가 싶어 눈물을 찔끔 찔끔 홀리며 후회를 했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짚고 있는 목발이 하인을 더욱 움츠려들게 했다. 목발만 없었어도 직장을 얻을 수 있었을 덴데 싶어 버릴 수도 없는 목발을 공연히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포기하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잡고 있었던 글이 지금의 결과를 맺게 해 주었다. 하인 자신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었다.
  "부지런히 도장이나 찍어두십시오. 그리고 다음 작품도 빨리 시작하시고요."
  하인은 미소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몇 발자국을 걸어 나오는데 출판사에서 가장 막내인 미스 박이 하인을 불러 세웠다.
  "참 선생님, 후배라는 분이 연락을 주십사 간청을 했어요. 자기 연락처를 전해드렸느냐구 하루에 한번씩 전화를 하는 거 있죠. 선생님께 연락처 전해드리면 저 커피 사준대요. 너무 지극정성이에요. 전화 좀 꼭 해드리세요."라며 메모 쪽지를 전해주었다.

  소설이 나온 후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를 다 알려주었더니 귀찮은 일이 많아 하인은 전화번호 발표 금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중요한 연락만을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 중요한 연락은 모두 잡지사 인터뷰 요청이었다. 후배 연락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전하는 것이었다.
  하인은 메모 쪽지를 건네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메모에 적힌 글씨는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박 종 우-
  잊고 있었던 이름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솟아올랐다. 특수교육학과 3학년 학생이던 시절, 문학의 밤 연사로 초대를 하기 위해 하인에게 연락을 했었던 친구였다. 몇 번 만나지는 않았지만 전화는 만난 것보다는 더 많이 했고, 편지는 그보다 더 많이 했었다. 그는 글 솜씨가 좋아 하인의 가슴에 쉽게 파고 들어왔다.
  그래서 그의 청을 뿌리치지 못해 대구까지 내려갔었다. 그가 졸업을 하기 전까지는 연락이 자주 왔었는데 졸업과 함께 소식이 끊겼다. 그 후 하인도 그의 존재를 잊었었다.
  하인은 그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빽에 넣었다. 하지만 하인은 그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 급한 용무가 아니기에 자꾸 뒤로 미뤄졌다. 그러다 출판사를 가야할 날이 되자 미스 박이 한 말이 생각났다. -선생님께 연락처 전해드리면 저 커피 사준대요. 전화 좀 꼭 해드리세요-
하인은 얼른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나 세요?"
  그는 마치 매일 전화를 했던 것처럼 하인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잘 알어. 내 목소리를 기억해?"
  하인은 정말 신기했다.
  "기억하고 말고요. 어떻게 잊어요, 그 목소리를."
  자기를 쭉 기억해주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하인을 기쁘게 했다.
  "누나를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알아요?"
  그 말 역시 듣기 좋았다.
  "종우, 아첨이 늘었다."
  "아녜요. 전 아첨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아- 정말 좋다. 누나 전화를 받으니까 정말 좋다."
  "점점, 마누라한테 꼬집힐려구."
  하인은 한참 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결혼 여부였다. 결혼을 했다고 하면 다른 편이고 결혼을 안했다고 하면 자기편이 되는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마누라는요. 누나가 아직 안 가셨는데 제가 어떻게 가요?"
  누나가 아직 안 갔다는 말에 비위가 상했다. 그는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결혼을 안 했을 것이라고 규정지어버리는 것이 괘씸했다. 하인은 갑자기 입이 굳어버렸다. 그가 혼자 떠들어댔다. 그의 이야기로 알 수 있었던 것은 현재 특수학교 교사이고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직장 문제 때문에 졸업 후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했는데 그 후는 하인이 이사를 했기 때문에 연락이 끊기게 되었던 것이다.
  "누나, 술 살게요. 언제가 괜찮으세요?"
  "글쎄 ‥‥‥‥"
  하인은 그를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헤어졌던 애인과 짜릿한 재회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학교 선후배여서 인연을 끊을 수 없어 만나야 하는 경우도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일 때문에 만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집요했기에 만날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가 요구하는 날짜에다 일주일을 더 보태서 정했다.

  "아, 일주일을 어떻게 참지."
  그는 하인의 마음을 힘껏 잡아당기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하인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하인은 외출할 일이 없어 내내 집에 있었다.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순간 약속을 연기할 까도 싶었지만 그러면 계속 부담을 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나가기로 했다. 대충 대충 옷만 입고 나갔다.  약속 장소는 1층이었다. 1층이라는 사실이 만남의 점수를 크게 올려놓았다. 약속장소에 갔을 때 가파른 지하이거나 2층 3층 되는 계단을 올라야 하면 만나기도 전에 기분이 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그는 아주 근사한 신사가 되어있었다. 학생 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머쓱해졌다.
  "벌써 왔어? 나도 일찍 온 건데."
  "저 온지 30분 됐어요."
  그는 자연스럽게 하인을 안내했다. 하인은 자리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하인이 의자에 앉자 그는 얼른 목발 두개를 받아 벽에 기대어 두었다.
  특수학교 교사다웠다. 그는 하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 좀 봐요. 어떻게 변했나."
  그는 하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인은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많이 늙었어."
  하인은 눈길을 돌렸다. 그와 계속 눈빛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하인은 화장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뇨. 고대루예요. 누나는 정말 고대루예요."
  "종우는 많이 변했다. 아주 멋있어졌어 어른같애."
  "그럼요. 내년이면 서른인데요. 내 친구들 중에는 장가가서 애 아버지가 된 아이들도 많은 걸요."
  "그렇겠지."
  웨이터가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주문하세요."
  "종우가 먼저 해."
  "에이, 레이디 퍼스튼데요."
  하인은 주문 때문에 질질 끄는 것이 가장 촌스러운 것 같아 얼른 주문을 했다. 자기가 지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다소 고급스런 메뉴를 택했다.
  "같은 걸로. 그리고 와인 1병, 화이트로."
  그는 망설임 없이 포도주를 주문했다. 하인은 와인은 무슨 와인이냐고 하고 싶었지만 자기가 대접하는 입장이라 말릴 수가 없었다.
  포도주가 먼저 왔다. 그가 하인에게 잔을 권하며 말했다.
  "그때 그러셨어요. 다른 술은 전혀 못하지만 와인을 조금 마실 줄 안 다구요. 아직도 그러세요?"
  그는 과거의 일을 너무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인은 그런 그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인은 곧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학교 얘기를 주로 했고, 하인은 자기 소설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다. 하인은 그 누구를 만났을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뭐-뭐라고? 마지막 황제라고? 잘못했다. 나도 좀 늦게 태어날 걸. 그러면 황녀가 될 수 있을 덴데."
  하인은 눈물을 흘리며 깔깔 웃었다.
  그도 하인을 따라 웃었다.
  "누나, 소아마비는요, 요즘 천연 기념물이에요."
  그는 하인을 계속 웃겼다. 하인은 정말 오래간만에 실컷 웃어보았다. 레스토랑을 나을 때까지 계속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얘, 네가 계산을 하면 어떡하니? 내가 내야지."
  "남자가 내야죠."
  "어른이 내야지."하며 하인이 눈을 흘겼다.
  "다음에 사 주세요."
  "에이, 너무 했다."
  길가까지 걸어갔다. 하인은 항상 걸을 땐 표정이 굳어진다. 앉아 있을 때는 남들과 똑같지만 걸을 때는 목발 두 짝이 남들과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하인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도 말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인과 걸을 때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인은 키가 몹시 작았다. 두 다리에는 로봇 같은 철 보조기가 채워져 있어 하인은 걷는 것이 아니라 두 목발에 매달려 두 다리를 앞으로 밀어놓는 방법으로 앞으로 나간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길가로 나오자 그가 열심히 차를 잡았다. 택시를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집에 가는 일을 훨씬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택시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미안했다.
  택시가 멈쳤다가도 하인만 보면 그대로 달아났다. 그럴 때마다 하인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이번 인지세로 차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는데 그가 용케도 택시를 잡아왔다.
  그는 하인을 태우고 자기도 하인 옆에 탔다.
  "방향이 다르잖아."
  "모셔 다 드려 야죠."
  "그럼요. 모셔다 드려야죠."
  기사가 끼여들었다.
  "자락 같습니다만 저는 장애자면 무조건 태웁니다. 사지 멀쩡한 것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가용 없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짧은 거리도 택시 안 타고는 못 가는 그런 한심한 사람들이 많은데, 난 그런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자가용이 진짜 필요하고 택시를 꼭 이용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장애자예요. 그래서 저는 쉬는 날에는 봉사활동을 나갑니다. 그래서 내가 일일이 다 업어서 차에 태우고 바깥세상 구경을 시켜줘요."
  "참 좋은 일 하시네요."
  그는 기사의 말에 간간이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하인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장애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스스로 자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인은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가 택시 값을 지불했다. 하인의 행동이 느려 그렇게 되었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는데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것도 하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웃기는 사람이야. 봉사한다고 하면서 팁은 왜 받어."
  "저런 사람이라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옳았다. 도망가는 것보다는 생색을 내면서라도 태워주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
  "오늘 신세가 너무 크다."
  "누난 왜 그런 말을‥‥‥‥"
  "여기야. 커피 한잔하고 가라는 말도 못하겠다. 너무 늦어서. 저기, 이거 택시 타고 가."
  하인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그의 주머니 속에 넣어주었다.
  "누나, 정말 왜 그러세요. 저도 돈 벌어요. 그땐 학생이었기 때문에 누나한테 커피도 못 사드렸지만요. 이젠 누나가 먹고 싶은 거 정도는 사드릴 수 있어요."
  "비싼 저녁 사줬잖아. 택시 값까지 네가 내면 어떡하니?"
  "누나를 편하게 모시려면 빨리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흔한 차도 없이, 미안해요. "
  그는 자기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는 하인의 손을 잡아 빼며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익살스런 얼굴로 "와 누나 손 잡아보네."라고 신나했다.
  하인은 갑자기 온 몸에 전류가 생기는 듯했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잡아 뺐다.
  "주무세요."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래, 잘 가. 오늘 고마웠다. 원수는 나중에 갚을 게."
  그는 하인을 대문 안에 밀어 넣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그 후 그는 하인에게 전화를 자주 걸었는데 그저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달이 너무 밝아서 전화했어요."라고 할 때도 있었고, "공중전화가 보여서 전화했어요."라며 걸때도 있었다. 사무적인 전화만 받아보던 하인에게는 낯설은 전화였지만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일 집에 내려가요."
  "왜?"
  "오래요. 엄마가 보고 싶으시다구요."
  "그러시겠지. 잘 다녀와. "
  전화를 끊자마자부터 가슴이 텅 비어져갔다. 그가 서울에 없다는 사실이 하인을 그렇게 허전하게 만들었다. 하인은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인은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그래서 하인은 그를 만나면 자기가 누나라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사무적이 되려고 애썼다. 그의 눈빛은 다른 사람하고는 확실히 달랐지만 예의는 항상 발랐다.
  하인의 그런 예의차림이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그가 학교 얘기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여선생에게 질투심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인은 그에 대해 독점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일 뿐 말과 행동은 항상 어른다웠다.
  하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그였다. 하인은 원고지를 메뀌나가며 그와 열애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자취방을 찾아가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었다.
  그를 교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와 수없이 입맞춤을 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자기도 했다.
  하인은 정말 유감 없이 사랑을 주고받았다. 그러느라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작품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행복했다.

  "어디 아프셨어요? 얼굴이 안되셨네요."
  그가 그렇게 말을 하면 하인은 머리 속에 이렇게 바꾸어 넣었다. "어디 아파? 얼굴이 안 돼 보이는데."
  "아니요. 아픈 데 없어요."라는 대답을 가슴으로 하고 말로는 "아니, 아픈데 없어."라고 했다.
  하인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병원 갔다 오셨어요?"
  "피곤해서 그래. 며칠 밤을 새웠거든. 출판사에서 어찌나 독촉을 하는지."
  "나쁜 자식들."
  "왜 멀쩡한 사람을 욕해."
  "그렇잖아요. 왜 독촉해요?"
  그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하인은 웃어버렸다.
  "누나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나가요. 누나 얼굴 노란 거 보니까 산소부족이에요. 시원한 바람을 쏘여야겠어요."
  하인도 그러고 싶었다. 무조건 고속버스 터미널로 왔다. 토요일 오후라 사람들이 붐볐다. 하인은 대합실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었고, 그가 뛰어다니며 표를 사왔다.
  "마침 금방 떠나는 티켓을 구했어요. 어서 가요."
  하인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의 둥에 업혀 버스에 오르고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앉기가 무섭게 버스는 출발을 했다. 도심지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나서야 떠난다는 실감이 갔다.
  "근데 참, 어디 가는 거니?"
  "강릉이요."
  "뭐? 강릉?"
  "그렇게 놀라실 줄 알았어요. 빨리 출발하는 게 그거 밖에 없었어요. 한참 기다리게 되면 누나 맘 변할까 봐 그냥 샀어요. 죄송해요. 화났어요?"
  "아니, 잘 했어. 밤 열차 타면 되지 뭐. 신문에 보니까 밤 열차가 그렇게 운치 있다고 하더라."라고 웃어주었다.
  "휴- 살았다. 버스 세우라고 하면 어쩌나, 진땀 흘리고 있었는데."
  어깨를 나누고 나란히 앉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그와 마주 앉았었기 때문에 하인으로서는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누나 주무세요. 밤바다 구경하려면 자두는 게 좋아요. 제 어깨에 기대세요."
  "됐네. 이 사람아."
  하인은 일부러 농담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자꾸 빠져들 것 같아 두려웠다.
  동해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두워 있었다. 밤바다가 오히려 더 포근히 하인을 반겨주었다. 아마 하얀 바다였으면 하인은 또 표정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하인은 바닷가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밤 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하자 택시가 없었다. 서울 같지 않고 통행금지 시간이 암암리에 지켜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니까 몹시 추웠다. 그가 양복 민저고리를 벗어 하인에게 걸쳐 주었다. 하인은 그가 미안해 할까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누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제가 민박을 알아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좀 기다리세요. "
  그가 돌아오기까지엔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하인은 너무 불안했다. 그가 영영 안 와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무섭기까지 했다. 그때 그가 돌아왔다. 그는 하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웬 자전거야?"
  "멀어서 얻어왔어요. 어서 타세요."
  "한번도 안 타봤는데."
  "제 허리만 꼭 붙잡으시면 안전해요."
  하인은 그가 시키는 대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갈 테니까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는 마치 하인의 오빠 같았다. 하인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꽉차있는 듯했다.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응, 재밌다 얘. 종우 덕분에 안 해보는 것이 없네 내가."
  그가 구했다는 방은 민박이 아니라 장급 여관이었다. 민박은 화장실 이용이 불편할 것 같아 여관으로 정했다고 했다.
  "아이구 색시가 그래서 자전거를 빌려갔구랴. 어서 들어가요. 청소 깨끗이 해놓았으니."
  하인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딴 방법이 없었다. 빨리 그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은 아주 정갈했다. 잠자리도 이미 깔끔하게 준비되어있었다.
  "누나가 먼저 욕실 쓰세요."

  그는 서울을 떠난 후 하인이 한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사실 하인도 화장실이 무척 급했다. 외출했을 때 가장 큰 고통은 아무 화장실이나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인은 목욕은 하지 않았다. 바깥에 그가 지키고 있기에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하인이 나오자 그가 욕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옷을 벗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하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없을 때 하인은 얼른 보조기를 풀었다. 보조기를 벽에 기대어 두었다. 몸속에 있었던 것은 그에게 보인다는 것이 좀 어색해서 보조기를 어디에 치울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들어왔다.
  바지는 입고 있었지만 런닝 차림이어서 그런지 섬뜩했다. 그는 계속 머리를 털고 있었다.
  "누나 누우세요. 피곤하실 텐데."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1시 40분이었다. 갑자기 졸음이 왔다. 하인이 먼저 누웠다. 그는 바닥에 누웠다.
  "덮어야지."
  "괜찮아요."
  하인은 자기 베개와 나란히 놓여있던 베개를 그에게 밀어 주었다. 그가 그 베개를 받아 머리에 베었다.
  "불 끌까요?"
  "응."
   하인은 어두워지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캄캄한 공간 속에 두 사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숨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자요?"
  하인은 망설였다. 자는 척 할 것인지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때요?"
  "편해. 생각보다는."
  "누나."
  "응."
  "우리 손잡아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하인도 손을 내밀었다. 그가 하인의 손을 꼭 잡았다.
  "히- 햇"
  "왜 웃어요?"
  "손잡고 걸어가는 것 같은 거 있지."
  하인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 하인은 목발을 짚어야하기 때문에 손을 목발에 빼앗겨 상대의 손을 잡을 손이 없었다.
  "누나, 팔베개 해드릴게요. 어깨를 감싸고 걷는 기분이 들 거예요."
  "됐네, 이 사람아."
  하인은 어색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누나, 얼굴 좀 보여줘요. 지금 어떤 얼굴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요."
  "얘 참, 마지막 황제는 잘 있니?"
  "누나." 그는 하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약간 당겼다. 하인은 손을 잡아 뺐다.
  "안 그럴 게요 누나."
  "나 졸려, 잔다."
  하인은 눈을 감았다. 조용한, 너무도 조용한 침묵이 하인을 짓눌렀다. 그가 짓누르는 것 이상으로 하인의 숨을 가쁘게 했다. 그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옷을 들고 나가 버렸다. 하인은 어디에 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하인은 내내 그를 기다렸다. 일어나서 나가 볼 까도 생각했지만 보조기를 다시 신어야하기 때문에 간단히 나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인은 너무 걱정이 되어서 계속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인은 얼른 누웠다. 그가 들어왔다. 하인은 얼른 눈을 감았다.
  그가 하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기 얼굴을 하인의 얼굴에 가까이 붙였다. 하인은 불덩이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고 보드라운 깃털이 얼굴을 간지러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하인의 입술 바로 옆에 입을 맞추었다. 하인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마취가 된 것 같았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굳어졌다. 그는 다시 하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인이 사르르 눈을 떴다.
  "사랑해요. 이 말을 하지 못해 그동안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아세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사랑했어요. 결혼해요."

  하인은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인은 그를 방어하기 위해서 늘 쓰던 방법을 또 썼다.
  "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지금, 착각하나보다. 다른 여자하고."
  하인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생글 생글거렸다.
  "누나,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난 알아요. 누나도 날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 사랑하지. 종우는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인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누나도 날 남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기를 속여요? 왜 좀더 솔직하지 못해요?"
  그는 계속 하인을 내려다보며 눈을 응시했다. 하인은 더 이상 그를 속일 수가 없었다.
  "우린 안 돼."
  하인의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졌다.
  "왜요? 나이 때문 에요?"
  "난 안 돼."
  하인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굵은 줄기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될 것 아무 것도 없어요. 누나한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 아무 것도 속에는 장애가 포함되어 있음을 하인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하인을 힘주어 안았다.
  "이제부턴 누나가 아니에요. 이 하인이라는 여자예요."
  하인은 오래 전부터 그에게 자기가 그저 여자이기를 원했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자기가 그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동갑만 되어도 아니 한두 살만 많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고 또 했다.
  "난 너무 행복해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 가슴속에 이렇게 안겨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매일 매일 꿈을 꾸었어요. 이게 꿈은 아니겠죠."
  그는 하인의 긴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하인도 자신이 그의 품속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이런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하인이야말로 행복했다. 영원히 그렇게 살라고 하면 더욱 행복할 것 같았다. 날이 밝으면 하인은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 넘어야할지 막막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하인은 알고 있었다.
  "주제에, 나이가 다섯 살이나 어린 신랑을 만났어. 그 남자도 눈깔이 뼜지."
  "그 남자가 특수학교 선생이래요."
  "그러면 그렇지.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여자를 누가 거들 떠나 보겠어."
  그 여자들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 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이제 자요. 내가 팔베개 해줄게요." 

작성자방귀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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