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희의 연작소설] 이브의 사랑
본문
"너 제발 이 어미 속 좀 그만 색혀라. 어째 그렇게 천방지축이냐. 내가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갈 수가 없어."
해영 엄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길길이 뛰고 있었지만 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좋은 혼처 자리 다 마다하더니 그래 겨우‥‥‥ 내가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니? 가당치도 않구나."
혜영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한다는 것이 구차했다.
"이 계집애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미 가슴에 못 박아놓고, 이제 그런 오명까지 씌워? 꼴좋다. 처녀가 애나 배고 다니고.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해영의 독립 선언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해영 아버지는 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해영이 태어나기 전에는 가내수공업으로 집 마당에서 힘들게 꾸려가던 가방 공장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유명메이커 가방 생산 업체가 되어 수출도 왜 하는 기업이 되었다.
해영이 소아마비에 걸려 목발에 몸을 의지하게 되었지만 하루하루 늘어가는 재산에 재미가 붙어 해영의 장애 따위는 큰 불행 조건이 되지 않았다. 돈만 많으면 육신 멀쩡한 남자를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해영 아버지 말 한마디로 해영에게 장가를 올 남자들이 줄로 서 있었다. 하지만 해영이 완강히 거부를 했기 때문에 해영 아버지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해영은 어렸을 때부터 노는 것을 좋아해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장애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공부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극복이니 의지니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닭살이 돋았다.
장애인이 수석을 차지한 기사나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영광의 얼굴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면 콧방귀를 뀌었다. 할 일 없어 공부를 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그들이 대단하다거나 훌륭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쪼다로 보았다.
해영은 학교에 다닐 때 노는 아이 부류에 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집이부자였고 머리도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부를 잘 할 수도 있었지만 해영은 공부에 살이 붙었는지 대학공부라면 넌더리를 냈다. 또 집에서도 여잔데 대학 보내서 무슨 소용이 있나 몇 년 데리고 있다가 시집이나 보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몇 년 동안 해영은 정말 원 없이 놀았다.
하지만 해영은 문란하게 놀지는 않았다. 아니 해영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남자들이 없었다. 또 해영 자신도 자존심을 있는 대로 꼿꼿이 세우고 기회를 차단했다.
그러다 해영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해영보다 15살이나 많았다. 화실을 경영하는 이름 없는 가난한 화가였다.
물론 결혼을 하여 부인도 있고 아이도 둘씩이나 있는 유부남이었다.
해영은 그림을 좋아했다. 한때는 화가가 되려고 그림 공부도 했었다. 인내심이 부족하여 오래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해영은 그래도 그림 공부에는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미술 전시회를 찾아가 감상을 했다. 해영이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일이었다. 그 날도 해영은 친구들과 어울려 전시회에 갔는데 전시회장이5층이었다.
"아유 너무했다.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없니?"
친구 남순이가 불평을 했다.
"5층이라고 해서 당연히 있을 줄 알고 확인을 안 했지."
해영이 힘없이 말을 받았다.
해영은 이럴 때가 제일 난감했다. 참새처럼 즐겁게 재잘거리다가도 장애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금방 시무룩해졌다. 해영은 자기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제일 못견뎌했다.
"얘 우리 다른데 가자."
"얘는 여기까지 왔다가 어떻게 그냥 가니? 어떻게 해보자."
해영은 그런 남순이 고맙기도 했지만 밉살스럽기도 했다. 해영은 구차스러운 것이 정말 싫었다. 그때였다. 웬 중년 신사가 나섰다.
"자,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엘리베이터가 되죠."
친구들은 잘 줬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지만 해영은 남자 등에 업힌다는 것이 썩내키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그가 해영을 달랬다.
"괜찮아요.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어서 업혀요."
그는 등을 들이댔다. 친구들이 한 수 더 떠 해영을 끌어다 업혔다. 해영은 자기의지에 상관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는 아주 가뿐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해영의 팔은 그의 목을 감쌌는데 가끔씩 그의 턱에 스치었고 그의 두 팔은 해영의 엉덩이를 감싸고 있었는데 여름옷이라 바지가 아주 얇아 맨살에 그의 손이 닿는 것 같았다.
남자한테 처음 업혀보는 해영에게 그것은 매우 묘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재잘거렸다. 그런 재잘거림 때문에 해영의 묘한 느낌이 감추어졌다. 그는 5충에 다 올라와 해영을 내려놓았는데 해영의 목발이 도착하지 않아 그에게서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해영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씩 웃었을 때도 해영은 무표정이었다. 웃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해영을 부축하려고 했을 때 해영은 퉁명스럽게 "괜찮아요"라고 거절을 했을 뿐이다.
"고맙습니다. "
친구들이 합창을 했다.
"이쁜 아가씨를 업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내가 고맙지요."
해영은 그가 사라져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전시회에 계속 있었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 전시회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그가 해영에게로 오고 있었다. 해영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척 했지만 이상하게 그를 관찰하게 되어 그가 오는 것을 친구들보다 먼저 알아차렸는데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어때요. 작품 좋지요?"
남순이가 대답했다.
"뭘 아나요. 이 화가 모시고 온 졸개일 뿐인데."
"아, 화가시군요?"
그는 아주 반색을 했다.
"아, 아녜요. 희망사항이에요."
해영이 기겁을 했다.
"그럼 이미 화가예요."
"선생님, 화가시죠?"
남순이가 형사처럼 물었다.
"나도 희망사항이에요."
"그럼 이미 화가예요."
남순이 그가 한 말을 흉내내어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웃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얘, 우리 선생님께 커피 대접해드리자."
남순의 제안에 모두 찬성했다. 사실 해영도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커피숍에 가게 되었다. 친구들은 새로운 분위기에 신이 나 있었다.
"선생님, 몇 살이세요?"
"선생님, 사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연애 하셨어요?"
"그림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친구들은 해영이 궁금해하는 것을 모두 물어주었다. 그는 아주 재미있게 대답했다. 그는 명문 대학 미술과를 중퇴했다고 했다. 그것도 1년을 남겨놓고 말이다. 졸업을 했으면 학연(學緣)이 있어 화단 활동이 활발했을 텐데 그것이 없어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해영은 솔직한 그에게 신뢰감이 생겼다.
그는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한 이야기며, 학비가 없어서 막노동을 했던 이야기 등 자신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이제 사모님에 대한 얘기해주세요."
친구 하나가 물었다. 해영도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집사람에 대해선 할 얘기가 없어요."
"왜요? 부인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집사람을 사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나는 공감대가 없어요. 그 사람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든. 그 사람은 남편이 그저 돈을 많이 벌어다 주길 원하는데 나는 그렇질 못하니까."
해영은 보지도 않은 부인이 원망스러웠다. 돈을 많이 벌어 오라고 괴롭히는 부인이 한마디로 무식한 여자라고 욕을 했다. 그의 쓸쓸한 표정이 부인 탓이라는 규정까지 했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가 자기 얘기를 하도 많이 들려주어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다시 말해 그와 아주 친숙해졌다. 그가 헤어지며 해영에게만 명함을 주었다.
"한번 놀러와요. 커피 맛있게 끓여줄게요." 라며, 그는 또 씩 웃었다. 그의 미소가 해영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졌다.
해영은 그의 명함을 소중히 지갑 속에 넣었다. 하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들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했다. 아무도 그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가자고 하면 마지못해 따라 가는 척 하려고 했는데 도통 말이 없었다.
해영은 전시회에 가면 혹시 그가 오지 않았나 하고 찾았다. 이상하게 그가 망령처럼 해영에게 늘 따라다녔다. 해영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 석 달쯤 지났을 때 약속이 있어 외출 준비를 열심히 하고 막 나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약속이 취소됐다는 비보였다. 해영은 힘이 쭉 빠졌다. 다른 때하고는 달리 치장을 열심히 했는데 갈 곳이 없어진 것이 약이 올랐다. 해영은 영화관이라도 갈 양으로 집을 나왔다.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한참 잘난 척을 해놓고 안 나가면 엄마 잔소리가 있는 대로 쏟아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해영은 잔소리를 피해 나왔다.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무슨 영화를 볼 것인지를 생각했다.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없었다. 해영은 시간이 빌 때마다 영화를 보기 때문에 보려고 점찍어놓은 영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해영을 더욱 속상하게 했다. 마침 택시가 지나갔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택시를 세웠다. 그리곤 집하고 가장 먼 천호동을 목적지로 삼았다. 천호동에 다다랐을 때 기사가 물었다.
"천호동 어디세요?"
해영은 인절미를 먹다가 막힌 것처럼 갑자기 목구멍을 큰 덩어리가 가로막은 것 같았다. 이성이 곽 막힌 상태에서 해영은 반사적으로 목적지를 얘기했는데 그것은 화가아저씨가 자기 화실을 설명한 것을 그대로 기억해낸 것이었다.
해영은 화실 가까이에서 내렸다. 낮선 곳이었기 때문에 해영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적 없이 걷는 것이 다리를 더욱 피곤하게 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카페를 찾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한 다방 하나 없었다.
"후진 동네라 다르군." 해영은 있는 대로 동네 탓을 하다가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그래. 전화를 걸자. 아저씬데 어때 뭐.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도리가 아니지."
해영은 용기를 내어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갔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여보세요. "
분명 그 목소리였다. 해영은 힘이 솟았다.
"이석구 선생님 화실인가요?"
"그런데요."
"선생님 계신 지요?"
"제가 이석구입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기억하실 지 모르겠네요. 000 개인전에서 5층까지‥‥‥‥"
"아 아, 해영씨군요."
그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해영은 더욱 힘이 솟았다.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억하구 말구요. 가끔 생각했어요. 오늘 전화를 다 주구 웬일이에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영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지나던 길에 잠시 인사나 드릴까 하구요."
"지금 어디예요?"
만약 그가 인사는 무슨 인사하면서 적극적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해영은 전화인사로 끝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열렬히 초대했다. 그가 알려준 건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그 멋진 미소로 먼저 인사를 했다.
"더 예뻐졌군요."
해영은 쑥스러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하예요. 아주 가팔라요. 업어서 모실게요."
"아- 아니에요. 2, 3층 정도는 갈 수 있어요."
"가파르다니 까요."
해영은 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업히게 되었다. 그는 마치 해영을 업어주기 위해 있는 사람 같았다. 그의 말대로 계단이 몹시 가팔랐다.
"흉보지 말아요."
그는 있는 대로 불을 켰다. 지하라서 어두웠다. 그 어둠은 우울함으로 느껴졌다.
그의 작품이 벽을 완전히 메우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아주 다양했다. 아주 사실적인 정물화가 있는가 하면 물감 장난을 한 것 같은 추상화도 있고 나체화도 눈에 많이 띄었다.
"자, 이쪽으로 앉아요."
해영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이에 그는 해영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딱딱한 의자를 방석으로 빙 둘러 소파를 만들어 권했다. 해영은 그 정성에 감동이 되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무얼 대접한담."
그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청바지에 헐렁한 독구리 세타가 청년들보다 더 잘 어울렸다.
그는 큰 물 컵에 커피를 타와 해영에게 건네주었다.
"몸이 차던데 마셔요."
해영이 거리에서 방황을 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늦가을 바람이 해영의 몸을 차갑게 식혀 놓았는데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담요를 갖고 와 해영의 다리 위에 덮어주며 "냄새나는 담요지만 해영 씨를 따뜻하게 녹여 주는 데는 이놈이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라고 정겹게 말했다.
해영과 그는 그림에 대한 얘기만 했다. 그래도 시간이 아주 잘 갔다. 헤어질 때쯤 그가 제안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 좋은 작품이 될 거예요. 내 모델이 대주겠어요? 사실 요즘 모델이 너무 비싸서 인물화를 그리는데 어려움이 많아요. 한때는 인물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짜 환쟁이가 되려면 사람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늘어요. 그래서 요즘은 인물화를 주로 그려요."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해영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모델이 되기로 했다. 그는 언제나 입구에서 해영을 기다리고 있다가 업고 내려갔다 커피를 손수 타 주었다. 식사시간엔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하 얘기a해주고 인생에 대한 철학을 말해 주기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택시를 잡아주고 그는 다시 화실로 들어갔는데 어떤 때는 간단히 저녁을 하며 술을 한잔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해영을 집까지 꼭 데려다 주었다. 그도 해영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해영은 그를 남자로, 그는 해영을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주고 또 받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가 작업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그림이 안 돼."
"왜요?"
"재능이 없나 봐."
그가 깊이 좌절하고 있었다. 해영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녜요 선생님, 선생님은 분명히 재능이 있으세요. 진짜 그리고 싶은 구상을 아직 찾지 못하셔서 그럴 거예요.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해영이 말이 맞아."
해영은 가슴이 뜨끔했다. 모델을 잘못 선정했다는 것이 되니 말이다.
"내가 진짜 그리고 싶었던 해영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어."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어서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떤 모습을 원하시는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영이 다시 물었지만 그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해영은 번뜩 누드화가 생각났다.
"누든가요?"
"………"
"그래요 선생님?"
"미안해 해 영이."
그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해영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벗을 옷이 왜 많았다. 그가 놀라 달려와 말렸다.
"저도 벗을 수 있어요. 왜 벗으라고 못하셨나요. 제 가는 다리 때문이었나요?"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냐. 순결한 해영의 몸을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는 없지. 그래선 안 되지."
"바로 그래서 그리고 싶으신 게 아니었나요. 선생님 작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벗을 수 있어요."
해영은 그가 자신의 그림에 자신감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해영은 그를 만날 때마다 옷을 벗고 싶었다.
그러니까 해영은 지금 핑계삼아 옷을 벗고 있는지도 몰랐다. 해영은 너무나 씩씩하게 옷을 벗었다.
"자, 빨리 붓을 잡으세요. 어서요."
"해영이 미안해. 난 붓을 잡을 수가 없어. 해영을 쳐다볼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해영인 몰라"
"선생님,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세요."
해영은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붓을 잡았다. 그 역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미친 듯이 손을 놀렸다. 붓소리가 해영의 몸 구석구석을 할고 지나갔다. 해영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해영이 균형을 잃자 그가 얼른 뛰어와 해영을 살펴보았다.
"맙소사."
그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다시 그 옷을 입지 않을 양 찢듯이 성급하게 옷을 벗었다. 그리고 해영과 부위마추기를 하듯이 정성껏 포갰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는 해영의 몸이 아까와는 정반대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해영은 몸 구석구석에 전류가 흐르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 전류가 해영의 몸을 태워버리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처럼 혓바닥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타액은 신기할 만큼 부드러웠고 풍부했다. 해영은 너무나 나른해서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많았다. 해영은 책에서, 영화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있어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애무만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그것은 해영의 몸을 녹여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정말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해영은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있는 반면 그가 자기를 원치 않고 있다는 것이 섭섭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신뢰가 생겼다. 그는 정말 멋있는 화가 아니 예술가라고 확신했다.
해영은 그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어김없이 그 앞에서 옷을 벗었고 작업이 끝나면 아무 일 없이 옷을 입었다. 해영은 그 앞에서 옷을 벗을 때마다 가슴을 울렁거려야했지만 그는 아주 사무적이었다. 해영이 옷을 벗을 동안 그는 작업 준비를 했고 옷을 입을 동안은 커피를 탔다.
해영은 그가 커피를 타 올 때까지 일부러 옷을 천천히 입기도 했는데 그럴 뻔 그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며 빨리 입도록 했다. 해영은 목이 탔다. 야속히 흘러나온 액체를 몰래 닦아내느라 곤욕을 치루면서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드디어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가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함성을 질렀다.
"해영이 수고했어. 정말 고마워."
"이제 선생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차례예요."
"그래, 무슨 부탁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게 말해 봐."
"선생님 아이를 갖고 싶어요."
"해영이가 날 놀리는군. 미안해 정말.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해영인 짐작도 할 수 없어. 내가 해영 이를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었는데‥‥ 난 내가 자랑스러워. 해영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어서 말야."
"아뇨. 난 선생님의 아이를 원해요."
그의 눈이 부풀어졌다.
해영은 천천히 그의 옷을 벗겼다. 그는 해영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줬다. 그가 해영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해영이 그를 범하고 있었다. 해영은 천부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감탄케 했고 솔직히 해영 자신도 놀랐다.
그들은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처럼 자연 그대로인 상태로 스물 네 시간을 보냈다. 그 스물 네 시간 동안 그들은 먹지도 자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 스물 네 시간은 육체와 육체와의 교류 그 자체였다.
그는 40년 동안 쌓은 실력을 한껏 발휘하며 남김없이 해영에게 바쳤고 해영은 평생에 할 일을 하루에 몽땅 끝마칠 것처럼 욕심을 부렸다.
너무나 지쳐 빈사 상태가 되었다가도 눈빛이 마주치면 다시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의무감은 없었다. 사랑 그 자체였다. 해영은 때때로 시계를 보았다. 해영이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이별의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유롭게 눈을 감고 있었다.
해영은 마지막 거사를 결심했다. 살그머니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는 습격을 받은 보초병처럼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해영은 다시 시작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었다. 그도 있는 힘을 다했다. 그도 해영도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가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해영에겐 힘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화실을 떠나는데 써야 했다. 해영은 옷을 챙겨 입고 흉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와 얼굴을 손질했다.
해영은 시체처럼 뻗어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완성된 자기 나체화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붓을 들어 그 그림 구석에 또렷이 썼다. "안녕"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집에서는 소식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난리가 나 있었다. 하지만 해영은 괘념치 않았다.
그 후 해영은 자기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방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후 해영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임신이었다. 해영은 뛸 듯이 기뻤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의 아기를 갖게 된 것이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일로 집안이 완전히 발칵 뒤집혀졌다.
해영은 변명도 반항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하나 얻어주어 혼자 살게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해영 엄마는 해영의 부정을 감쪽같이 은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해영은 아이는 절대 지울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애를 지우기 싫으면 누구 자식인지 얘길 해. 그래야 일을 해결할 게 아니냐."
해영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얘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해영의 승리가 굳어졌다. 배가 점점 불러왔기 때문에 해영 집에서는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해영을 유배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해영은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해영은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 음악을 듣고 아이를 위해 책을 보고 아이를 위해 음식을 먹고 아이를 위해 잠을 잤다. 또 아이를 위해 아빠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 그 생각을 했다.
아이가 뱃속에서 세차게 꿈틀거릴수록 그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꿈틀거렸다. 하지만 해영은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계속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륜이라고 생각했다.
해영은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엄마가 된 것이다. 원수처럼 피하던 해영 엄마도 손자를 보자 마음이 풀어졌는지 자주 들러 이것저것을 챙겨 주었다.
"아이고 우리 똘똘이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똘똘해졌네. 누굴 닮아서 이렇게 훤하실 까."
아이가 그를 아주 판에 박은 듯이 빼닮았다. 신기 할 만큼 그와 닮았다. 해영은 그래서 더욱 아기에게 애착을 느꼈다.
"좋은 씬가 보다. 그나저나 호적은? "
해영 엄마가 딸 눈치를 살폈다.
"당연히 내 호적에 올려야죠. 내 아인데."
"아휴, 어쩌다‥‥‥ 얘 내가 애 아빠 한번 만나보면 안 되겠니?"
"엄마 그런 말하려면 오지 마."
해영은 애 아빠 얘기만 나오면 단칼에 잘랐다. 아기가 돌을 맞을 때쯤이었다. 신문을 읽다가 어디서 많이 본 누드화를 발견했다. 자기였다. 순간 아찔했다. 그 누드화로 그가 미술상을 받아 실린 기사였다. 그림 제목이 "안녕"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이런 엄청난 발표를 했다.
"나를 화가로 만들어준 사람은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 후 난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 만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그녀의 성씨조차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히 찾아올 테니까요. 난 이번 전시회 기간 내내 그녀를 기다릴 것입니다. 난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난 그녀를 사랑합니다."
미술상을 받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미술 생명보다는 사랑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광수 같은 놈이 또 있다고 비웃겠지만 해영은 그의 사랑에 온몸에 환희가 흘렀다.
"아가, 아빠가 엄마를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신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야호-"
-연재예고-
1년 이상 "완전한 반"을 주제로 연작소설 13편을 연재해 주신 방귀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 1월부터는 정희수 선생님의 장편소설 <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를 연재합니다. 정희수 선생님은 5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출판사·잡지사 편집부장으로 출판·언론계에 몸담은 적이 있으며 86년 신동아 문단에 데뷔, 88년 첫 시집 <서울의 양심>을 펴낸바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방귀희
연작소설 연재를 마감하면서
"자유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소설을 시작하며 글쟁이로서가 아니라 운동가 적인 목적만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마치 사경(寫經)을 하듯이 그려야지 했었는데, 건방지게도 멋을 부렸다.
그렇다고 사실무근의 소설은 단 한편도 없다. 다만 소설이란 것을 더욱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것 같아서이다. 사실 그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해두고 넘어가자. 소설을 쓰며 참 많은 얘기를 들었다. 뜻하지 않던 관심에 멀쓱해진 적도 있다. 어떤 독자는 소설을 통해 장애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고, 또 어떤 독자는 거울이 생겨 옷매무새를 고칠 수 있었노라고도 했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더 왜곡치 키고 더 고착화 시켰다는 질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벗기지 않았으면 영원히 비밀 속에 감춰져 있을 텐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머리 숙여 받아들이고 싶다. 단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연재를 시작하면서도 밝혔지만 나는 장애인 문제를 글로 풀고 싶어 장사도 안 되는 소재에 매달려 있다.
내 가족에, 우리 옆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원리를 소설에 대입시키려 한다.
장애를 소재로 한 단 한편의 소설만 읽는다 해도 그 사람의 머리 속에는 장애인이 자리된다.
그런데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느냐 하면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입력되어야 편견이 없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것은 바로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장애를 가진 사람도 함께 동참되어 있는 모습이다. 좀 전의 모습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모범생들이라 장애인은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 틀을 깨고 자유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말, 정말, 그러고 싶었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