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쓸개
본문
"김부장, 내 잘못도 있기에 이런 말은 가능하면 않으려고 했지만,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만 뒷탈이 없을 거 같아서, 좀 보자고 한거요."
승욱은, 사장이 무슨 일 때문에 출근하자마자 자신을 사장실로 호출했는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말썽만 생긴 게 김부장 탓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현숙 기자 때문에 생긴 일이니, 결국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겠지. 김부장 의견도 묻지 않고 내가 불러들였으니…. 다만, 왜 그런 상황이 매달 반복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사장의 말은 애매모호했다. 김현숙이라는 여기자가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 승욱이가 잘못 통솔했기 때문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김현숙을 사장 자신이 독단적으로 입사시킨 것을 후회한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승욱은 스멀거리는 불편한 심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부질러놓듯 말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김현숙씨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다음날부터 김현숙씨는 취재파트에서 편집파트로 옮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근이 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반발이 심할 텐데. 또 김현숙이는 편집을 못한텐데…"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조금 시끄럽더라도, 사장님께서 모른 척만 해주시면 됩니다. 교열하고 교정을 맡기면 되니까요."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 김현숙이가 이태원에서…"
"이태원에서 외국인하고 호텔 출입한다는 소문 말씀이시죠? 저도 그건 뭐라고 딱 잘라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생활 문제라서.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타이른다고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라서…"
이틀전 퇴근 무렵이었다.
최기석 총무부장으로부터 승욱에게 술이나 한잔하자는 전갈이 왔다. 승욱은 일곱 시 조금 넘어 회사건물 지하에 있는 한식집으로 내려갔다. 최부장은 미리 내려와서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아놓고 있었다.
"김부장,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최부장은 양복 윗도리 속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승욱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지난달에 사용한 전화요금납입청구서였다.
"국제통화료 부분을 좀 보시죠."
승욱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벌써 석 달째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화 한 대에만 사십만원이 넘는 국제통화료가 나온 것이다. 통화한 상대국가는 필리핀 일색이었다. 누구 소행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쪼였다.
"김현숙이 짓이군요. …사장은 뭐라던가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뭐하지만, 사장이야 자업자득 아니겠어요? 영어 조금 잘한다고, 인간성은 보지도 않고 덜컥 기자로 데려왔으니. 그나저나 필리핀 한 군데만 사십만원이 넘게 나왔으니…. 지난달치엔 필리핀 관련기사가 거의 없었지 않습니까? 설사 있다해도 그렇지. 김부장께선 뭐 좀 짚이는 게 없습니까?"
짚이는 게 왜 없겠는가. 이것만이 아니라 김현숙은 다른 월권행위 때문에 승욱에게 여러번 심한 닦달을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승욱으로서는 김현숙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말을 총무부장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밉상을 부리며 천방지축으로 설쳐대더라도 어쨌든 부하직원이었다. 주의를 주더라도 그것은 편집부장인 자신이 직접 맞대놓고 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총무부정은 아무 말이 없는 승욱을 바라보다가, 소주잔에 젓가락을 집어넣고는 슬슬 휘젓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상태를 드러냈다.
"제가 말입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아까 전화국에다 알아봤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필리핀까지 최초일분요금이라나 그게 천이백사십 원이고, 일분 추구요금이 구백이십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최 부장 설명인즉슨, 국제전화요금 사십만 원을 구백이십으로 나누면 사백삼십 분 즉, 일곱 시간 이상을 계속 통화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겁니까? 아무리 영문잡지사라도 그렇지, 한 사람 통화료가 사십만원이 넘는다는 건 너무 심해요. 우리 총무부 경리직원이 한 달에 얼마를 받는지, 김 부장도 아시잖습니까."
총무부장은 은연중에 승욱을 꼬집는 듯한 말투로 바뀌고 있었다. 승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총무부장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경리직원 월급이 삼십오만 원에 불과했으니까.
"하여간 피곤하군요."
"그건 사실입니다. 제가 이 회사에 오기 전에 있었던 회사에서도 말썽을 피우는 직원들이 없었던건 아닙니다. 어디서나 집단이 이루어지면 그 속에는 성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썽꾼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더군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 정도가 좀 심한 편입니다. 다독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짤라내자니 노동부에다가 부당해고니 뭐니 시끄럽게 할 건 뻔하고, …잘못하면 광고주들한테 좋지 않은 인상만 심어주겠고,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음식 먹기 싫은 건 시궁창에 쏟아버리면 되고, 물건 보기 싫은 건 어쩔 도리가 없다지 않습니까. 죽일 수도 없고, 한마디로 애물덩어리죠."
울고 싶어하는 놈한테 때맞춰 철퍼덕 뺨아리를 쳐준 것처럼 뱉아내는 총무 부장을 승욱은 멀검하게 바라보았다.
-째진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막 씨부리는군. 편집부 기자를 네가 어떻게 목을 친다는 거야? 건방진 놈!
"무슨 수를 써야지 않겠습니까? 김 부장 생각은 어떠하세요?"
"‥‥‥"
넉 달 전이었다.
오후 편집회의를 끝마치고 사장이 참석하는 정기회식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짙은 화장에다가 청바지 차림인 여자 하나가 편집부 출입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이십대 중반을 넘어선 듯한 여자는, 첫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이다 싶었다.
"잠깐 실례할까요. 난 암-, 김현숙인데요, 사장님 좀 뵈려고 왔어요."
청바지는 편집부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이윽고 맨 윗 쪽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승욱을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뻣뻣한 자세로 선 채 승욱에게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다는 당당한 태도였다. 각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다른 기자들은 이 희한한 방문객을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청바지는 주둥이에 고성능 모터를 달아놓기도 한 것인지, 말하는 속도가 예사로 빠르지 않았다. 승욱은, 이 여자가 꽤나 방정맞다고 생각했다.
"김현숙이에요. 부장님이시죠? 사장님으로부터 말씀 들었어요. 암-, 조금 있다가 인터뷰하실 때 잘부탁드려요."
승욱은 엉겁결에 청바지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기는 했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김현숙은 뭐고 인터뷰는 또 뭐란 말인가?
"김현숙씨라고 하셨나요? 김현숙씨, 갑자기 인터뷰라니, 언제 저하고 약속하셨습니까?"
"오우! 노노노노. 아직 사장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암-, 내일부터 내가 여기 에이시언 투모로우(ASIAN TOMORROW) 기자로 뛰게 되는 거, 아직 모르세요? 부장님 보거든 먼저 인사를 드리고 하던데요."
김현숙은 말을 마치고는 두 팔을 펼치면서 어깨를 두어 번 으쓱거렸다. 그 바람에 윗도리가 엉덩이 위로 밀려올라갔다. 금세라도 짝 달라붙은 청바지 실밥이 터지면서 국부가 툭 튀어나와 윤곽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시쳇말로 속살이 탱탱해 보이는 몸매였다.
김현숙의 몸짓을 본 승욱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승욱과 마친가지 표정이었다. 잘못 뒤틀린 꽈배기 꼴이 되고 말았다.
"난 아직 그런 얘기들은 적이 없는데…. 이력서를 본 적도 없고…. 오늘, 사장님 만나뵙기로 했습니까?"
"네에-, 그런데요."
김현숙은 또다시 두 어깨를 으쓱하고는 승욱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승욱은 의자에서 벌떡 이러나려다 말고는, 낮은 한숨을 뱉아냈다.
-에잇, 밤맛없어! 더럽게 재수대가리 없는 년이로군,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는 년이 뭐, 기자질을 해? 대가리에 똥도 안 마른 년이 겉멋만 들어가지고…, 이런 기집년 세탁하는 기계는 없나?
"엄 차장"
승욱은, 화가 났을 때의 깔아지는 목소리로 편집차장을 불렀다.
"엄 차장. 이분, 사장실로 안내해드려. 그리고 나머지 기자들은 회식장소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곧 내려갈 테니까."
기지들이 모두 빠져나간 편집부에는 냉방기 작동 소리만 윙윙거렸다 승욱은 사장실을 흘끔 바라보고는 담배를 빼어물었다. 한마디로 불쾌했다.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인 김현숙이라는 여자는 백 번 이해해서 덮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장은? 아무리 인사권이 사장 고유권한이라고 한다지만, 명색이 편집부장인 자기에게 한 마디 의논조차도 없이 기자 채용을 결정하다니.
좀만에 사장이 김현숙과 함께 사장실을 나왔다. 승욱은 그들을 보자, 속이 메슥거리는 것만 같았다. 김현숙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던 모습이 떠올라오자, 머리 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 하나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복학을 앞두고 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승욱은 ㅅ대학교 부근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일층에는 방이 일곱 개에 하숙생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그 일곱 개에 1호감방, 2호감방, …, 하는 식으로 고유번호를 붙여놓고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법대생들이 하숙생의 주류를 이루다 보니 장난삼아 붙인 명칭이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층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이 하나 있었는데, 남부 이탈리아 혈통인 미국인 한 사람이 하숙하고 있었다. 하숙생들은 그 미국인의 나이가 삼십을 조금 넘는다는 것과,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 강사로 법벌이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무슨 이유인지 도통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승욱은 7호감방에 수감되었다. 감방장은 ㄷ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인 박이라는 사람으로서, 승욱과는 동년배였다. 박은, 다혈질로 알려져 있는 승욱보다 더한 다혈질이었다. 한마디로 , 활활 타고 있는 불덩어리와 다름없었다.
한 달 여가 지나갔을 때, 승욱은 그 미국인의 생활태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성서를 들고 교회에 가는 일요일을 빼고는 날마다 반반하다 싶은 대학생 차림인 여자를 이층 하숙방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여자도 거의 일주일 터울로 바뀌었다. 어떤 날은 벌건 대낮인데도 다다미에 무언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요상스럽게 뱉아내는 신음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하숙집 아랫층 분위기는 묘하게 비틀어지곤 했다.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하숙생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대놓고 거론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껏 "한국여자들 여럿 걸레 되는군"하면서, 약간은 질투심이 섞인 뒤숭숭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여럿 모이게 되면 반드시 "별종(別種)이 있기 마련이다.
"박형. 이층 미국놈 말이야. 우리나라 여잘 몇 명이나 따먹었을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담배를 피워 물면서 승욱이 박에게 말했다.
"말해 뭐할끼요. 그놈아 자석 낯빤대기 안 봤소. 꼭 영화에 나오는 놈 맨크로 뺀질뺀질하데요. 내가 알기로는, 이탈리아놈들, 특히 남부출신 놈들은 색을 더럽게 밝힌다카던데. 아줌마 말로는 저 새끼도 그쪽 출신이라 캅니다."
박은 이불 속에 드러누운 채로 이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박형, 그러면 말이야. …저 새끼는 그렇다 치고, 성 개방이 어떻고 한다지만 그 계집들은 어떻게 돼먹었길래…"
승욱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 박이 발딱일어나 앉았다.
"승욱씨. 미안하지만, 일호깜빵부터 시작해갖고 우리 방으로 전부 모이라캐주소. 아침 묵기 전에 잠깐 회의 좀 하입시더. …아. 아이요. 내가 움직이는 기 낫겠소."
그로부터 일주일 뒤, 하숙생들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이층 미국인을 7호감방으로 불러들였다. 한국에 온 지 여섯 달이 넘었다는 미국인은, 한국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숙생들은 또한 "콩글리쉬"와 더듬이 영어"가 고작이었지만, 어느만큼은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었다.
그 미국인은 자기 이름이 브라운이며, 지금 아시아 각국을 무전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미 15개국을 거쳐왔고, 한국 다음에는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서 "여행기를 써볼 거라고 했다.
하숙생들은 히히덕거리면서 중구난방 감정 섞인 말을 쏟아냈다.
"이 새끼 이거, 다른 나라에서도 여자들 여럿 건드린거 아냐?"
"국제 홍합이 있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국제 소시지가 있다는 소린 못 들어봤어. 이 개자식 이거, 국제 소시지구만."
"분명히 관광비자로 돌아다닐 텐데, 우리나라에 온지 여섯 달이면 불법체류에 해당돼. 이놈 여권을 한번 보자고 말해 봐."
"얌마. 너 혼자 독식하지 말고 소득분배 좀 해주지 않을래?"
"올림픽에 빠구리 종목이 있으면, 미국놈들이 금메달감일 거야."
브라운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기를 욕하는 말만은 귀신처럼 눈치로 때려잡는 것이었다. 낌새가 험악하게 돌아가는 듯하자 자꾸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때마다 승욱은 반강제적으로 그를 방바닥에 끌어앉혔다.
한국인 여자친구가 몇이냐, 하숙집에 데려오는 여자는 뭐하는 사람이야, 혹시 대학생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건 말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었다. 그날은 그것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하지만 하숙생들 사이에는 동류의식이랄까.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아니나다를까, 낮이 한참인 시각에 그 브라운이 앳돼보이는 여자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외출 중인 몇을 뺀 하숙생 칠팔 명은, 이층방 바로 밑에 있는 1호감방으로 모였다.
시간이 꽤 흘렀다 싶었을 때, 이층에서는 브라운이 짜놓은 각본대로 비비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소리를 죽이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문 앞에 도착하자, 요상스런 신음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여닫이로 된 방문을 두드리면서 밀어보았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졌다. 박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고함을 질렀다.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조그많게 흘러나왔다.
"후 아 유?"
"훌, 아, 유? 니기미 씨발놈? 후아유가 아니라 이젠 니놈 새끼를 잡아삐리유가 될 끼다. 야이 씨발자석아, 문 열어! 퍼뜩!"
박은 자신의 말이 마룻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방문을 발로 냅다 걷어차버렸다. 문고리가 훌러덩 벗겨지면서 문짝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방안 공기는 비릿했다. 두 사람은 방 모서리쪽에 서 있었다. 브라운은 급한 김에 바지만 꿰입은 상태였고, 거웃가리개와 젖 가리개를 브라운의 등짝에 달라붙어 있었다.
박이 댓바람에 달려가더니, 빡 소리가 나도록 브라운의 뺨을 올려붙였다. 브라운은 주저앉으면서 박의 허리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박이 브라운의 가슴팍을 내질러버렸다. 브라운은 숨이 막히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놀란 나머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모서리에 고개를 들이댄 자세로 서있었다. 마치 도망 칠 곳이 없는 노루가 머리만 처박고 숨어 있는 형국이었다.
박은 여자를 방 가운데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 있는 여자의 핸드백을 집어드는 것과 동시에 그것으로 여자를 후려패버렸다. 겁에 질린 여자는 우는 것조차도 잃어버린 듯,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브라운, 너 이 씨발자석아. 한국 남자는 쓸개도 없는 줄 알았나? 이걸 고마, ×를 짤라삘라. 너, 내일 중으로 여기서 나가. 안 그라면 니를 직이삐리고 우리 모두 짐 싸갖고 나갈 텐께네. 알겄나? 이걸 고마 칵!"
브라운은 박의 기세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박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이놈에 가시나! 내를 따라와."
박은, 거웃가리개와 젖가리개를 한 손에 움켜들고는 미적거리는 여자를 잡아채다시피 아래층으로 끌고 하숙생들은 구경만 하는 것으로도 역할을 다하는 상황이었다.
7호감방으로 끌려들어간 여자는 자라 모가지를 한 채 쿨척거리면서 울기만 했다.
"당신, 대학생이죠? 그렇죠?"
승욱이는 묻는 말에 여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질 급한 박이 여자의 핸드백을 뒤져 학생증을 찾아냈다.
"ㅅ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 3학년 이××."
"알만하다, 알만해. 그란께네, 꼴같잖은 영어 몇마디 배울라고 저 미국놈한테 몸까지 바쳐가면서? 이거야말로 진짜 몸으로 때우는 산 교육자 하나 나오는 순간아이가. 존경시럽다, 존경시러워."
하숙생들이 찜찜해 하는 분위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줄창 담배만 피워댈 뿐, 승욱과 박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승욱은, 이 여학생을 윽박지르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차후에 또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는가는 전적으로 이 여학생에게 달린 문제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이라도 이성에 호소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상투적이고 뻔한 얘기겠지만, 어찌 보면 "미국이 어떻고, 영원한 혈맹이 저떻고" 하면서 영어 한마디에 환장하도록 가르쳐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는 교육정책의 희생자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 여학생이 누구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가. 아무리 명분이 옳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가두어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명백한 감금행위인 것이다.
승욱은 박에게 학생증과 거웃가리개와 젖가리개를 건네 받아 핸드백 속에 집어넣은 다음, 여학생한테 돌려주었다.
"같은 학생으로서 한마디만 합시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저 미국놈이 당신 하나만 사귀는 걸로 알고 있겠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미국놈들 사고방식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사고방식은 극과 극인 건 알고 있겠지요? 당신 눈에는 한국 남자들이 볼품없게 비쳤겠지만, 적어도 대다수 한국 남자들은 미국놈들처럼 여자를 섹스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 개새끼한테 당신처럼 행동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한마디만 더 합시다. 저 미국놈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당신을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겠죠? 그러면 결국 당신은 나중에 한국 남자하고 결혼할 거고, …그 다음 말은 알아서 판단하시오."
승욱은 차마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처녀막 재생수술을 할거 아니냐, 그리고서는 첫날 밤 침대 위에서 숫처녀인 양 온갖 주접을 떨게 아니냐, 맥도 모르는 남자놈은 속으로 희희낙락 니나노 늴리리야를 불러제끼겠지, ….
다음날부터 김현숙은 출근했다. 승욱은 불쾌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다른 기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대해주었다. 사장은 한동안 승욱의 눈치를 살피는 기미더니, 별 탈이 없다고 판단한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십여 일이 지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난 사개월 가까이 근무하는 동안, 툭하면 지각을 하는 것은 그나마 취재 때문에 늦었다는 핑계를 대면 그만이었다. 누구나 다 써먹는 고전적인 수법이었으니까. 하지만 퇴근시간이 문제였다. 김현숙은 기사 마감과 관련된 잡지사의 특수성은 아랑곳없이 도무지 야근을 않으려고 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자기는 "초과근무를 하려고 이 잡지사에 들어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미국에 이년동안 있으면서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초과근무는 단 일 분도 해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도 그랬는데 뭣 때문에 한국에 와서 그래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몇몇 고참 기자들이 뭐 저런 게 다 있느냐는 반응을 보여도, 너는 너 나는 나였다. 의무를 강조하는 한국의 사회풍토에서 볼 때, 김현숙은 개성(?)이 너무 강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한 주일에 서너 번씩 어디론가로 가는 국제전화 문제였다. 전화기를 붙들었다 하면 이십 분을 넘기기가 예사였다. 그러다 보니 전화기 한 대에 사십만 원이 넘는 통화료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현숙이 국제통화를 시작하면, 이십 평이 넘는 편집부 내부는 김현숙의 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치 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기 십상이었다. 반면에 국내통화는 정반대로 절에 간 새색시 같았다. 도무지 속알머리를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이 예민한 몇몇 기자들은, 김현숙이 국제통화를 시작하면 아예 자리를 떠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현숙씨. 나 좀 봐."
사장을 만난 다음날, 점심식사를 하고 난 승욱은 김현숙을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카페로 데려갔다.
"김현숙씨. 잘 알겠지만, 요 근래에 와서 편집부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해져 있어. 그러니 내 말을 고깝게 듣지 말길 바래."
"하실 말씀 있으면 리버럴하게 하세요."
"리버럴?"
"그래요, 리, 버, 럴, 암-, 까놓고 하시라 이거죠."
승욱은 맹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두팔을 펼치는 김현숙을 바라보았다. 그래, 톡 까놓고 얘기하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오늘도 마닐라에다 전화하는 거 같던데. …이번달엔 필리핀 기사가 한 꼭지도 없잖아? 내가 볼 댄 좀 심한 거 같아."
"…암-…. 암…."
김현숙이 더듬거리는 것을 핑계삼아 기를 꺾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문제로 회사 전화를 사용하더라도, 거기엔 묵시적인 기준이 있는 법이야. 더구나 국제전화인 경우엔 기본적인 사회통념은 지켜야지. 난 김현숙씨만큼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지만 대화는 대충 알어들을 수 있어. 마닐라에 누가 있지? 취재하고는 하등 관계없는 통화가 아니었나? 도대체 왜 그래? 그런 사담은 집에 있는 전화로 하면 되잖아. 그리고 회사 전화 다섯 대 중에서 한 대는 김현숙씨 전용전화처럼 돼버린 거 알어? 한 번 잡았다 하면 보통 이삼십 분이야. 그게 회사 일이라면 하루 종일을 써도 말안해. …그리고 김현숙씨. 명색이 편집부장인 내가, 겨우 전화통화 문제를 놓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게 만들어서야 되겠어? 미안한 마음 안들어? 마닐라에 누가 있길래 그런 가야, 말좀 해봐."
닦달을 당하면서도 찍소리조차 못하고 눈치만 살피던 김현숙은, 승욱이 말끝을 조금 가라앉히자,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지 말문을 열었다.
"마닐라에요? 암-, 보이 프렌드가 있어요."
"유학생?"
"예-. 마닐라 유니버시티 비즈니스 어드미니스트레이션, 암-, 씨니어!"
영어가 혀끝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순간이었다. 승욱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자 또다시 그 방자한 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돌대가리 외사촌이 아닌 다음에야 필리핀까지 가서 경영학을 공부한다? 연놈이 끼리끼리 제대로 뀄군.
"그 친구 부모가 돈이 많은 모양이군. …"
승욱은, 앞으로 국제전화는 삼가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으로부터 불거져버렸다. 승욱의 눈치를 살피던 김현숙이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정색을 하면서 말허리를 자르고 나왔다.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제 보이 프렌드를 현지 통신원으로 이명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비용도 다운이 되니까 좋지 않겠어요?"
"뭐야? 현지 통신원이라니?"
"예-, 현지 통신원. 갠 괜찮게 사니까 월급을 안 줘도 되거든요."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김현숙은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요령부득이었다. 주제파악을 하는 지능 지수가 턱없이 낮은 것만 같았다. 승욱은, 막가는 인생이 아닌 다음에야 이다지도 앞뒤를 잴 줄 모른단 말인가 싶었다. 이 순간까지도 꾹꾹 참으면서 어떻게든 다독여보려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울화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호되게 다루기로 작정했다.
"김현숙씨, 내 얘기 잘 들어! 통신원 문제는 당신이 나설 일이 아냐. 그건 사장하고 내가 결정할 문제야. 왜 그리도 똥오줌을 못 가려? 내, 듣기 거북한 소릴 좀 해야겠어. 통신원도 기본적인 바탕이 있어야만 가능한 거야.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당신 남자 친구 말이야. 김현숙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거론할 가치도 없어. 왜 그런지 알아? 하고많은 해외유학 중에서도 필리핀, 그것도 경역학이라면 그 수준 알만하지 않겠어? 대가리 속에 똥밖에 든 게 없으면서도 영어 몇 마디 잘한다고 기자질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나? 착각하지 마."
김현숙은 눈을 똥그랗게 치뜨면서 승욱에게 항의했다.
"오 마이, 오 마이 갓! 그런 모욕을!"
승욱은 그런 항의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아예 엎어놓고 볼기를 치는 것처럼 세차게 몰아붙였다.
"오마이 갓이든 아바이 갓이든, 건방지게 내 말 자르지 말고 들어!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지적을 해주지. 당신 혼자 사용한 전화요금이 얼마나 나왔는지 알고나 있어? 당신이 들어온 뒤부터 달달이 사십만 원이 넘었다는 것만 알려주지. 그렇기 때문에 당신 입에서 경비절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가소롭다는 거야. 그리고 툭하면 미국에서는 미국에서는 하는데, 아무리 영문잡지사래도 그렇지, 한국이 어쨌다는 거야? 당신 한국 사람 아냐? 또 있어! 당신이 우리 잡지사 수석기잔가? 수석기자는 엄차장이야. 엄 차장!"
승욱은 어느덧 울컥거리는 짜증 때문에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잡지사 생활 그럭저럭 칠 년째에, 뭐 이런 자식이 있나 싶었다. 네가 이판사판이라면 나는 사판이판으로, 업어치나 메어치나 그게 그거라는 심정으로 김현숙을 몰아 붙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앙다물어졌다.
"김현숙씨. 도대체 기자 경력이 몇 년이야? 이제 이 년째라며? 우리 기자들 최하가 이년차야. 그리고 다들 사년제 영문학과 출신들이야. 김현숙씨가 미국에 이 년 있은 게 뭐 그리 대단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대충 보니까 만만해 보였나? 당신이 보기엔 사장이나 간부진이 바지저고린가? 당신이 나발대는 영어 정도는 우리나라 영문과 출신은 다해. 한국인이 그리도 만만해 보이던가? 도대체 아래 위 구분도 못하고 있잖아. 왜 그렇게 생각이 얕고 교만해? 앞으로 주제 넘는 언동은, 내 자리를 걸고서라도 더 이상 용납 않겠어. 지금 사무실로 올라가는 즉시 김현숙씨 취재 꼭지 전부를 엄차장에게 인계하고, 취재에서 손을 떼. 이건 사장 결제가 난거니까, 앞으로 교열하고 교정만 맡아. 싫으면 사표 쓰고 나가!"
"왓? 왓? 수석기자?"
"왓? 이놈이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이놈아! 언제 누가 너한테 수석 기자라고 했어? 마닐라에 영어로 통화하면서 뭐라고 말했지?"
상당히 감정 섞인 닦달을 호되게 당한 김현숙은 겉으로 보기에 한동안 자숙하는 듯했다. 승욱이 보기에, 어떤 날은 괜시리 측은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기를 한 달 여, 승욱은 김현숙한테서 앞으로 인화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다음 다시 취재를 맡겼다. 기자들 사이에서, 김현숙이가 이태원에 있는 어느 미군 전용 술집과 호텔을 출입한다는 입방아가 있었지만, 승욱은 모른 척했다. 간섭할 수도 없었거니와, 또한 전혀 그럴 가치를 느끼지 않았던 때문이다. 제 몸뚱아리 제가 궁굴리고 다니는데, 어느 누가 뭐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부모조차도 못말리는데, 훈계한답시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가, 네가 뭐냐고 따지고 들면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나하고 관계없는 일, 회사업무에 지장만 없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럭저럭 별다른 말썽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탁 원고를 받아가지고 들어온 승욱에게 인쇄소 공장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그건 그렇고 김 부장 있잖습니까. 하하, 이거 조금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하다니요? 제가 뭘 어쨌길래요?"
"제 말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명함 인쇄 때문에…"
내가 모르는 인쇄가 있었나? 더구나 명함을 인쇄소에다 맡겨?
"지금 인쇄기마다 몽땅 비상이 걸려 있는데, 갑자기 명함을 찍어달라고 하면 좀…. 그것도 이도(二度) 칼라로 해 달라니 말입니다. 물론, 기자들 명함 정도야 언제든지 써비스로 찍어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잡지사하고 출판사가 기계마다 걸려 있는 거, 김 부장이 잘알잖습니까. …예, …, 그렇죠. 다른 일도 아니고 명함이라면…."
그건 타당한 말이었다. 인쇄기가 한 바퀴씩 휙휙 돌아갈 때마다 4×6배판 크기 잡지가 16쪽씩 인쇄되는데, 그 큰 기계에다가 관제엽서의 4분지 1밖에 안되는 게딱지만한 명함 쪼가리 열다섯 개를 걸어 2도 칼라인쇄를 부탁하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었다. 더구나 칼라 인쇄를 하려면 색상을 배합해서 기계에 발라놓은 잉크를 전부 닦아낸 다음, 다시 잉크를 배합해야만 인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장이 승욱에게 전화를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제가 바보다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예,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전화 끊지 마시고 잠깐만 기다리세요. …에이 참, …그래요, 기다려보세요. …물어본다니까요. 엄차장, 인쇄소에 이도 칼라로 명함 부탁했어?"
승욱은 한마디로 황당한 느낌이었다. 편집차장에게 물어보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엄차장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명함을 인쇄소에 맡기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쇄과정을 모른다면 모를까, 언제 우리가 칼라명함 사용한 적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승욱은, 뭔가 퍼뜩 떠오르는게 있었다.
"공장장님, 제가 알아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명함은 찍지 마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면서 갑자기 후덥지근함을 느꼈다. 기자들은 일손을 놓은 채 승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머쓱했다. 승욱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기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집부 출입문을 열었다.
"엄 차장. 미술부 기자들 데리고 지하 카페로 좀 내려와."
지하 카페에서 승욱은 미술부 기자들로부터,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이 김현숙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짐작한 대로였다. 김현숙을 카페로 불러내렸다.
"김현숙씨. 하나만 물어보자. 칼라 인쇄기 본적 있지?"
승욱은, 확실한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감정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분하게 순서대로 다그칠 필요가 있었다. 김현숙은 내려깐 시선으로 커피잔을 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엄 차장과 미술부 기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김현숙씨 똑똑하니까, 인쇄과정도 잘 알거고."
"‥‥‥"
"내가 언제 기자들 명함 찍는 거 간섭한 적 있었어? 미술부에 말만하면 알아서 처리해 왔잖아."
김현숙은 웬일인지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김현숙씨. 말 좀 해봐. 말을 해야 왜 그랬는지 알 거 아냐."
"‥‥‥"
지금 이 녀석은 나를 아예 무시하려고 작정한 것이나 아닐까? 승욱은, 차분해야만 한다는 처음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좋아. 내가 말하지. 그깟 명함이야 얼마나 된다고 인쇄공장에다가 맡긴 거야? 인쇄소가 문방구야? 공장장이 어이가 없어하는 건 당연해. 내 얼굴이 뭐가 돼? 이건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야."
승욱은, 예전과 달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 김현숙을 바라보며, "내가 어쩌다 이런 애물단지한테 걸려들었나" 싶어 서서히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상의 한 마디 없이 제멋대로! 혹시 말이야, …사장이 직접 채용했대서, 그 정도쯤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유감이겠지만, 당신은 아직 그럴 군번이 아냐. 지금 우리가 쓰는 흑백 명함도 디자인이 산뜻하게 잘돼 있어. 기자들 의견에 따라 미술부에서 디자인한 거란 말이야. 미술부 기자들을 뭘로 보는 거야? 나도 가능하면 디자인엔 간섭 안해! 흑백 명함이라서 일이 안되고 체면이 깎이던가? …어디까지 말썽을 일으켜야 만족하겠어?"
어느새 승욱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이윽고 김현숙이 고개를 발딱 들더니, 그러한 승욱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대신에, 고개를 깐닥거리면서 말했다.
"오케이, 오케이. 좋아요. 이번에도 똥 오줌 어쩌고 말할 건가요? 오케이, 말하죠. 암-, 내가 컨택한 미국인을 만나서 명함을 주면, 그 사람들은 암-. …암-. 어쨌든 그 사람들은 우리보단 팻션이나 디자인에서 컬러풀하고 모던한건 사실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쪽팔리지 않으려고 에이시언 투모로우의 모던 이미지, 예-, 이미지네이션 때문에…"
글/정희수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