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2]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
본문
차석은 의자에서 일어선 다음, 자기 책상 쪽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무료함과 피곤함으로 지쳐 있던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차석을 따라가서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차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내 주민등록증을 훑어보고는 직업을 물었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잡지사 기자가 고상탁이하고 친구는 아닐 거 같고, …어떤 사이요?"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일을 대충 설명해주었다. 차석은 무척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고상탁에 대한 애정 탓이리라 생각했다. 얘기 중간 중간에 고상탁이 끼어 들어 말참견을 했지만, 그때마다 차석에게 제지당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그에게서는 경찰에 대한-왠지 부담스럽다거나 하는-선입관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진지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고상탁과 관계를 끊겠다고 결심한 마당에 이왕이면 자기합리화랄까, 그러한 방어막을 쳐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상탁 씨한테 지쳤십니더. 자기 부인이라캐도 몬 견딜 낍니더. 사실, 우리 잡지에다가 살아온 얘길 취재해 싣고 싶어도, 고상탁 씨에 대해 뭐 한가지 아는 게 있어야지 말입니더. 통 말을 안해서…"
차석은 이해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상탁은 언제부터인지 나무의자에 드러누워 팔베개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면… 앞으로 어쩔 생각이오?"
"깊이 생각은 안 해 봤지만서도,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당분간만이라도 만나지 말고 제 일에나 충실해야 안 되겠십니꺼. 그라고… 좀 뭐한 말이지만서도, 도무지 저 양반 술값을 감당해낼 수가 없십니더."
고상탁은 나와 두 번 이상 들렀던 술집에는 반드시 혼자 가서 외상술을 마시고 내 앞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이다. 술집 주인이 외상을 주지 않을 경우에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직장을 확인시킨 다음, 반드시 갚아준다는 다짐을 받게 했다. 그때마다 상용되는 방법은, 내가 자신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이었다.
차석이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만 가도 좋소."
나는 나가려다 말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아홉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나무의자에서 잠자고 있는 고상탁…
"고상탁 씨하고 같이 나가면 안 되겠십니꺼?"
차석은 말없이 고상탁을 흔들어 깨웠다. 나는 고상탁을 들쳐업고 파출소를 나왔다. 그는 술이 덜깬 목소리로 "동상, 미안혀, 정말 미안혀"소리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파출소에서 오백여 미터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포장마차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작고 허름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오금을 박듯이 맺고 끊는 문제를 얘기했다.
"상탁이 형요, 내 말을 고마 섭섭하게 듣지 마소. 요 근래 와갖고 내 생활이 엉망진창이 돼뺐는기라요. 지금 회사에서 내 입장은 말또 몬하요. 그라고 딱 뿌라지게 말하겠는데요, 내는 형이라는 사람을 이해를 몬하겠십니더. 전에는 우쨌는지 모르겠지만서도, 내하고 알고 난 다음부터 형의 생활태도가 더울 난삽해진 게 아닌가, 내가 형을 그리 만드는 게 아인가…. 그란꺼네, 한마디로 말해서 형도 나도 서로를 더 망쳐삐리기 전에 앞으로는 연락을 하지 말기로 하입시더.…"
5
구월 말에 나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월 삼십일자로 해고당한 것이다. 경영진을 모독했고 인사발령을 거부한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구월분 봉급과 퇴직금을 받고는 미련 없이 짐을 꾸렸다. 해고당할 때까지 고상탁에게서는 어떠한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월간잡지사 편집부는 매달 마감 때만 되면 "도떼기시장판"과 하등 다름이 없다. 그 날 일도 그랬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철야팀"과 "새벽팀"으로 나눈 다음, 마무리 작업에 정신없이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편집부와 미술부 작업실은 파지원고(破紙原告)와 전산식자(電算植字)에서 떨어져 나온 허섭쓰레기가 휴지통을 넘쳐흘러 바닥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도 수북하게 꽁초가 쌓인 채였다.
열시 반이나 되었을까? 커피나 한잔 마시고 일하자며 잠시 쉬고 있을 때, 총무부장을 앞세운 사장이 불시에 "순시"(巡視)라는 것을 나왔다.
사장은 육군 대령 출신으로서, "회장이 군에 있을 때 부관으로 달고 다녔다"는 말이 회사 내부에 널리 퍼져 있었고, 총무부장은 사장 부하였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사장은 일 주일에 한 번씩 각 부서마다 "순시" 도는 것을 주업(主業)으로 삼는 것 같았다. 그가 총무부장과 계장을 거느리고 편집부, 출판부, 영업부, 광고부, 총무부, 경비실을 순시할 때마다 관련 부서의 분위기는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되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간혹, 커다란 목소리로 "충성!" 이라는 고함이 비상계단을 통해 편집부에까지 들려올 때도 있었다. 그것은 경비실 순시를 마쳤다는 뜻인 것이다. 다만, 편집부만은 다른 부서보다 기자들의 반발 강도가 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교적 자유스럽게 그 순시라는 것을 받아왔다. 기자들 또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사장을 구제불능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한편, 그의 순시를 "개코 수색(搜索) 떴다"는 말로써 치지도외(置之度外)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만은 일이 꼬이고 말았다.
사장은 삼층에 있는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미술부부터 시작해서 편집부 전체를 주욱 훑어보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일어서서 꾸벅 목례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자기 일을 계속해 나갔다.
"박 부장하고 이 차장, 어디 간 거야?"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질타하는 듯한 사장의 목소리였다. 수석기자인 미술부 송형이 의자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머뭇거렸다. 사장은 거듭해서 부장과 차장의 소재를 물었다.
"두 분 다 청탁원고 때문에 만나러…"
"그건 그렇고. 이거 와 이리 지저분해! 여어가 쓰레기장이야, 뭐야! 자네들, 총무부도 안 가봤나? 총무부 절반만 깨끗해봐!"
"…죄송합니다. 지금이 마감 때라서… 마감이 끝나면…"
미술부 송형이 애꿏게도 언텃거리를 당하는 판이었다.
"마감? 마감 때면 이래 해놔도 되는 기야! 이거-군기가 빠졌구만!"
순간, 기자들 얼굴 가득 냉소가 피어올랐다. 사장은 혼자서 계속 궁시렁거리더니, 이윽고 내 뒤쪽에 와서 한참동안 원고 메꾸는 것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해버렸다.
"자넨 직책이 뭔가?"
내 뒤통수에 술 냄새를 섞은 말 찌꺼기가 쏟아졌다. 기분이 무척이나 상해 있는 말투였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짧게 대답했다.
"기잡니더."
"지자? 그래, 기자라…. 기자는 이래도…"
나는 사장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명색이 사장이라는 사람이 뒤에 서 있는데, 일어서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되겠냐는 뜻이었다. 사장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할 것처럼 입을 옴찔거렸다.
"마감 때라서 바빠갖고 결레를 범한 거 같습니더. 죄송합니더."
사장은 눈꼬리를 삐듯 치켜올리면서 코허리에 주름을 잡았다.
"편집부는 마감이라는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있구만. 박 부장 들어오면, 내방으로 오락캐."
사장은 총무부장이 열어준 편집실 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는 가버렸다. 동료 기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날리면서 한마디씩 했다.
"송 선배 팔자는 뒤웅박 팔자로구만."
"사장은 여기가 군대막산 줄 아는 모양이야."
나는 한마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새끼 같으니! 잡지의 잡자도 모르는 놈이 잡지사 사장이라고 잡놈 짓거리를 하고 자빠졌다 아이가. 절마 저거, 주부생활 마감 때 한번만 가보락캐라. 잡지사 정화하자꼬 완장 차고 댕길 놈인기라. 국민 혈세로 주는 연금이나 곱게 받아 처묵고 살면 밉지나 않제."
모두들 펄펄펄 웃고 말았다.
내게는, 초등학교 때 보았던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남아 있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진해시 경화동에는 "해병대 본부"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큰 신식건물인 "경화극장"이, 우리집과 그 본부 사이에 있었다. 경화극장에는, 훈련을 마친 신병들이 자대에 배치되기 전에-잠깐동안이었지만-집단으로 수용되는 모습을 일 년이면 몇 차례씩 볼 수 있었다. 그 신병들은 틈만 나면 극장 뒷문쪽에 있는 화장실 철창 앞으로 뻑뻑히 몰려들었다. 그 앞에 모여든 장사꾼들한테서 옥수수나 건빵을 사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때문이었다. 철창 밖으로는 지폐를 흔들어대는 수십 개의 손이 저마다 얽힌 채 빠져 나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러나 건빵을 받아든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철창 밖으로 삐져 나온 손마다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인솔장교들의 명령을 받은 헌병들이 방망이를 무자비하게 휘둘러대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신병들은 용하게도 건빵을 놓치지 않았다. 가슴 졸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동네 어른들은, 때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장교들에게 항의했지만, 마이동풍은 고사하고라도, 오히려 닦달을 당하기까지 했다. 나와 내 또래 아이들은 서로를 붙들고는 무서워서 엉엉 울기만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동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훈련병들 식비를 어디어디 부대장들이 빼먹어서 저렇게 되었다는…. 그 기억을 사장이 일깨워준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사장을 갈궈주리라도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월일(月日)만 적어놓으면 되는 사표를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편집부 쫑파티"를 하고 있는 술집에 사장이 총무부장과 계장을 데리고 물색 없이 나타난 것이다. 편집부장이 사장에게 상석을 내주었다. 그 바람에 한창 무르익어 가던 흥이, 겨울날 잠시 쪼그라들 듯 시르죽어 벼렸다. 사장은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내 옆에 앉은 여기자에게 한잔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 한, 여기자에게 술잔을 들이밀지 않는 것이 이 구성체의 금기임을 몰랐던 것일까? 사장은 그 금기를 직위로써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똥 밟은 얼굴을 한 채 술을 따르고 있는 여기자의 팔꿈치를 의도적으로 툭 쳐버렸다. 그 바람에 술잔을 들고 있는 사장 손에 술이 엎질러졌다. 부장의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눈을 꿈쩍 거리면서 적당히 넘어가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역시 어쨌든 간에, 사장이라는 자리에는 개를 앉혀도 품위를 찾게 만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사장은 빙긋이 웃는 것으로 그 상황을 넘어가려 했다.
"오늘 술값은 사장님께서 내시는 게 어떻십니꺼? 상석에 앉으셨으니."
나는 사람들 얼굴을 비잉 둘러보면서 내 말에 동의를 구했다. 이심전심, 기다렸다는 듯 하하하 히히히 낄낄낄 적당히 박수를 쳐댔다. 사장은 호기롭게 허허거렸지만, 소주 몇 잔에 십만여 원을 날리고 말았다.
다음날, 나는 느지막하게 출근했다. 다음주 초에 있을 11월호 편집회의에서 어떤 아이템을 제출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회사 건물을 들어섰다. 이게 웬일인가! 1층 게시판에 인사발령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길을 가다가 영문도 모르고 몽둥이 맞은 놈처럼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命-
廣告2部 10月 1日 編輯部 記者 金敏守
경비실 직원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비상계단을 통해 편집부로 올라갔다. 먼저 출근한 몇몇 동료들이 둘러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김 선배… 광고이부로…"
"하여간 치졸한 놈이야, 기자를 광고부로 발령을 내리다니!"
나는 그들을 향해 걱정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 날짜를 적어 넣었다. 이제 이것을 부장에게 건네주는 절차만 남은 것이다.
광고이부가 어떤 기업체 광고를 따오는 곳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광고계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경영진 측에서 경쟁논리를 이용해 1부 2부로 분리해 놓은 것만은 알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복수 방법치고는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기분이 씁쓰레했다. 동료기자들 사이에서 행동통일을 하자는 말이 나왔으나, 과연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에 그만두라고 했다. 또한, 나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을 실업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시각. 부장은 사장실에 있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출근해,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는 발령 건을 보고는 사장실로 가서 재고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때를 마악 넘겼을 무렵, 부장이 사장을 뒤에 달고 편집부로 들어왔다. 부장은 내게, 기자들 보는 앞에서 사장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을 정식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나는, 부장에게 뺨을 맞을지언정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장에게 못할 일을 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자책감에 마음이 아팠다. 부장에게 사표를 건네주었다. 동료들은 모두 일어선 채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속에서 울컥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남아 있을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으로 자제해야만 한다고 자신을 억눌렀다.
"사장. 짐 싸기 전에 한 말씀만 드리겠십니더." 동료들이 일제히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만두는 마당에 인심 잃자꼬 이라는 건 아인께네,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더. 우앴든, 이 말씀만은 꼭 드려야겠십니더. 그 순시라카는 거, 앞으로 고만 하이소. 자유라카는 게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빼 묵는 거는 아이겠지만서도, 적어도 여긴 군대가 아입니더. 그라고 잡지라카는 건, 군대식으로 쪼아댄다꼬 되는 게 아입니더. 최대한 풀어줘야 한다는 거, 잡지사에 가서 한번 물어보이소. 또 있십니더. 기사 내용에 간섭 고만하이소. 도대체 그놈에 연예인 기사를 아까운 칼라 지면에 그리 많이씩 다룰 이유가 어데 있십니꺼?"
그날 밤, 내 자취방으로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구월 말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사표가 수리되니 마음 가라앉히고 당분간만이라도 광고부로 출근해라. 그런 다음 편집부로 복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수는 없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하루 하루가 무료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순례하듯 하루 종일 극장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기도 했고, 기원에 나가서 잘 두지도 못하는 바둑에 몰두해보기도 했으며, 이대입구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땅속을 다섯 바퀴나 뺑뺑 돌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큰둥하게만 여겨졌다. 밤낮 나흘 동안을 깨면 마시고 깨면 마시는 식으로 술에 쩔어 살다시피 해봐도, 결국 남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구월은 가고, 한가위를 사나흘 앞둔 시월 어느 날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잡지사에서 간부로 있는 몇몇 선배들을 만나 일자리를 부탁해놓고 자취방으로 돌아오자. 집주인 아주머니가 겹겹이 접은 종이쪼가리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동상 보개여. 동상 해사에 저놔를 혔더니 고만두엇다고 혀서 걱정이 대아서 왓따가 가네. 다르미 아니라 니헌티 이리 생기서 동상헌티 상이를 헐라고 왓떤 거시네. 오늘 밤 늑게나 내일 아츰에 저놔를 너을 거시니 꼭 기둘리주게. 고상탁이가. 참 그리고 동상 나 그동안 술 마니 안 무건네."
다음날 아침, 고상탁은 그의 말대로 내게 전화를 넣어주었다. 몇 마디 오간 끝에 그는 굳이 내 자취방에서 얘기를 나누자고 우기는 것이었다. 열한 시가 넘었을 때,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의 그 몸으로 땅바닥을 청소하며 찾아왔다. 서로가 보지 못한 사이에 그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서먹서먹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마주 앉았다. 고상탁이 단도직입 말문을 열었다.
"나 말이시…오늘 동상헌티 꼭 상이헐 일이 있구마. 메칠 동안 무진장 고민혔당께. 나 말, 조깐 들어 주겄는감?"
나는 허기를 느꼈다. 담배를 빼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아침식사는 하셨는교?"
말을 하고 나니 더욱 허기가 느껴졌다. 무엇이든 좋으니 뱃속을 채우고 싶었다. 고상탁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스러운 자기 심정을 몰라준다는 뜻이 담긴 한숨이었으리라.
어느덧 고상탁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새끼를 잃어버린 짐승이 우는 듯한, 쥐어짜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돌발적인 상황변화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냐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상탁은 머리를 벽에 기대면서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사금파리가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엄닐 보았당께-, 엄닐 보았어-. 엄니를-…"
나는 도무지 앞뒤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라니? 언제 내게 자신의 가족 얘기를 비친 적이 있었던가! 몸이 그렇게 된 이유조차도 말한 적이 없었지 않았는가!
6
고상탁은 아버지가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두 사람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 친아버지 얼굴은 전혀 기억이 없으며, 양아버지는 지금 군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간지 햇수로 구년째 접어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보았다는 것이다.
상탁이 부모는 1945년 1월 개성에서 결혼했다. 아버지 서상호(徐相鎬)는 개성 토박이였으며, 어머니 김말이(金末伊)는 군산 사람이었다.
일제시대, 군산에서 어부로 생계를 꾸려왔으나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말이네 가족은, 장사라도 하면 낫지 않을까 싶어 얼마 안 되는 가산을 정리해서 개성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그곳도 애옥살이로 목숨을 부지해 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 끝에 입이라도 하나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열다섯 살인 말이를 개성 변두리에 사는 소작농 서상호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대 상호 나이 스물 셋이었다.
결혼한지 일곱 달 뒤에 해방이 되었고, 그 석 달 뒤 가족들은 군산으로 귀향했다. 물론 말이는 개성시댁에 남겨둔 채였다.
1946년 봄에 말이는 첫아들을 낳았으나 영양실조로 몇 달 뒤 죽고 말았다. 이듬해인 1947년 가을, 임신 다섯 달째이던 말이는 시댁 허락을 받고 친정인 군산으로 내려왔다. 남편 상호는 내년 봄 아이를 낳을 때쯤 내려가겠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1948년 이른봄, 상탁이가 태어났다.
"지금 나가 쓰는 상탁이라는 이름은 개성 아버님이 지어주셨다등마."
"그라모, 형 어머님이 개성서 내려오실 때 아버님이 미리 이름을?"
"그거이 아니고…"
뒤이어 남북이 삼팔선으로 막히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넘들처럼 피난을 가믄 믓허나 잡아 안 가고 기냥 있었다등만. 하도 묵잘거이 읍다 봉께, 움직거리는 거이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들더라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다 붕께 굶어서 돌아셌고…"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남편 서상호가 떠억 집으로 들어서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민군 군관 복장을 하고서.
서상호는 두 시간 정도 머물다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서상탁(徐相卓)으로 지어주고 떠났다.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러나 그것으로 소식은 끊기고 말았다.
"엄니가 그러시등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을 생각허믄 징허다 못혀서, 쌔를 빼물고 칵 엎어져 죽어뻔지는 거이 나삿을 거라고…"
미군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고 나자. 상탁이 어머니는 인민군 장교 부인이라 하여 체포되어 방첩대로 이첩되었다. 상탁이는 보호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만 했다.
상탁이 어머니는 거의 날마다 몇 시간씩 똑같은 내용으로, 통역관을 대동한 미군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하루에 서너 차례나 불려나갈 때도 있었다.
"군산에서 개성으로 이사한 이유는 무엇이냐, 결혼할 당시 남편 서상호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느냐, 남편한테서 사상적으로 이상하게 느낀 점은 없었느냐. 개성에서 살다가 혼자서만 군산으로 내려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군산으로 와서 무슨 일을 했느냐, 북과의 남침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서상호는 몇 번이나 찾아왔느냐, 찾아왔을 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느냐…"
전쟁 와중에서 정식재판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나마 체포될 때 즉결처분 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일반인 부역혐의자가 아닌, 인민군 장교 가족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것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뒤 상탁이 모자는 세월이 지나가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갇혀 지내다가, 미군 장교 앞에 불려나가 분류심사를 받았다. 그때가 1952년 3월, 갇힌지 십팔개월 만이었다. 상탁이가 어느덧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우리 엄니가 코쟁이헌티서 심사를 받을 때, 그때 통역을 혀준 사람이 지금 군산서 살고 있는 양아부지야."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통역관 고광진(高光鎭)은 상탁이 모자의 뒤를 열성으로 돌봐주었다. 멀쩡한 사람까지도 빨갱이로 무지막지하게 덮어씌우는 그 당시의 험악한 상황을 도외시하고 보살펴준 고광진에게, 그들 모자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고광진은 미군들을 움직여 상탁이 모자를 무혐의로 석방시켰다. 그 몇 달 뒤 고광진의 제의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지쳐 있던 상탁이 어머니가 그 제의를 못이긴채 받아들였던 것이다.
상탁이 어머니는 고광진과 동거하면서, 수감생활의 압박감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회복해 나갔다. 뒤이어 고광진은 김말이와의 혼인신고를 하면서 서상탁을 자신의 호적에 고상탁으로 입적시켰다. 이로써 그들은 합법적으로 부부관계·부자관계로 맺어지게 되었다. 몇 달 뒤 그녀는 고광진의 아이를 뱄다.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호사(多魔)인가. 상탁이 어머니가 정신분열증 초기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일을 하다 말고 느닷없이 흐느껴 울거나 히죽히죽 웃는가 하면, 잠을 자다가도 새벽에 벌떡 일어나 남편을 깨워서는 "중공으로 갈라요. 상탁이 아베, 지발 나, 중공으로 좀 보내주씨오." 하면서 몇 시간이고 흐느껴울곤 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임신 육개월째였다.
고광진이 그녀에게 중공에 가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남편을 빤히 바라보며, 아닌 밤중에 웬 봉창 긁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또다시 중공으로 보내달라며 우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고광진은 상탁이 어머니를 미군부대 구내병원에 입원시켜 검사를 받게 했다. 인성검사와 심리검사, 그리고 개별사안검사 결과는 고광진을 절망감에 빠뜨렸다. 그녀는 첫 남편인 서상호를 아직도 북한에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看做)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공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을 통해 북한에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남편을 만나고자 하는 것 같다는 진단소견이 나왔다.
"화가 난 양아버진 엄니 뱃속에 든 동상을 띠라고 혔어. 그체만 우리 엄니는 내 동상을 낳고버텀 요양소하고 정신빙원엘 많이도 들락거렸시아."
"그카면, 형은 그때 우얘 지냈는교?"
"화이고 징헌 거! 고상, 고상, 그놈에 고상, 말도 허들 말어. 엄니가 정신빙원에를 몇 번 들락거리다 봉께 양아버지가 날 내논 자식 취급을 허드라니께. 동상만 싸고 도는겨. 그다봉께 난 집 밖으로만 나돌게 되드란 마시. 개밥에 도토리였당께. 밥은 훔쳐 묵거나 미군부대 근처 쓰레기통을 뒤졌제. 그런다고 양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읍었제. 나만 그런게 아니었응께. 고때 나가 여섯 살이었는디, 양아버지가 고로코롬 하는 이유를 빠삭허게 알겄드랑께. 철이 일찌감치 들었던 거이제 머."
상탁은, 어머니가 병세에 차도가 있어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내다가도, 다시 악화되어 입원하게 되면 집을 나가 군산시내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너무 일찍 "까져 버리게" 되었다.
나는, 그렇다면 고상탁이 전과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그토록 집 밖으로만 나돌았는데도 소년원이나 교도소엘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양아버지와 그가 실질적으로 인연을 끊었던 시기는 수없이 말썽을 일으켰지만 번번이 양아버지가 빼내 주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면글면 살다가 어머니가 종적을 감추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과가 없이 지내왔다고 했다.
"형이 운수가 좋았거나, 아니면 착하게 살았기 때문일 끼요. 그카고, 내가 볼 땐 형 양아버지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거 같네요."
머쓱해진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파출소 차석이 한 달 전에 그에게 했던 "자꾸 그러면 교도소에 가게 된다"는 말이 떠올라오면서, 고상탁의 운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내가, 목이 심심하니 소주를 마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는 선뜻 받아들였다. 술병과 간단한 안주가 방바닥에 놓여진 다음 그의 얘기는 계속됐다. 고상탁과 나는 그 동안의 소원했던 기간을 비질하듯 서서히 쓸어내고 있었다.
몇 해 뒤, 상탁이 어머니는 결국 남편과 갈라서고 말았다. 정식으로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별거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 사이 상탁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이학년이 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 한동네 아이들에 의해 상탁이 어머니가 정신이상자라는 소문이 학교에까지 퍼졌고, 그러다 보니 학교에 가기만 하면 "미친년 자식"이라고 놀려대는 통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병세는 상탁이 군대에 가서 훈련을 마칠 때까지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어찌된 셈인지 양아버지로부터 다달이 조금씩이나마 보내져오던 생활비마저도 끊겨버렸다. 때문에 상탁은 어머니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투수당이 나오는 월남파병을 자원했다. 월남으로 가기 전에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양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삼 년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전투수당을 엄니헌티 몽땅 보내부렀시아. 한 달에 오십 달러였으니께 솔찬혔어. 넘들은 몸풀러 간담서 오입질 허로 다녔지만 나는 마시, 한 번도 그라덜 않었시아. 죽어도 그리는 못허것더라고. 연장지원꺼장 헌 내목심값이다, 울엄니 목심값이다 생각헌께, 피보덤 더 아깝게 여겨지더랑께."
제대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병세는 나아진 것은 없었으나 악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말이 아닌 몰골에서, 양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어머니를 돌봐주었는지를 짐작하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어차피 그도 남이라는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하여간 그때까지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없는 위안이 되었다.
몇 달 뒤 상탁은 살던 집을 정리한 다음,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왔다. 그 동안 그는 한번도 양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고, 양아버지 또한 상탁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상탁은, 집을 정리한 돈과 월남에서 모은 돈을 합쳐 자그마한 식당을 차렸다. 어렸을 때의 배고팠던 기억과 함께, 먹는 장사가 그래도 많이 남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군산총각"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얘기가 한참 무르익어가는 것만큼, 고상탁과 나는 대낮부터 마신 술에 취해 들어갔다. 우리는, 며칠 후 누구든지 먼저 연락해서 만나기로 하고 오후 세시쯤 해서 헤어졌다. 내가 그를 집까지 업어다 주겠다고 했으나, 고상탁은 기어코 고집을 부려 혼자서 돌아갔다. 나는 그가 점심식사를 거르고 갔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길바닥을 쓸면서 기어가고 있을 그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계속>
글/정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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