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4] 여자 포기 선언
본문
하영은 아름다운 여자이다. 갸름한 얼굴에 눈 코 입이 뚜렷하고 피부까지 우윳빛으로 고운데다 알 듯 모를 듯한 화장법이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하영은 양 겨드랑이 사이에 낀 목발에도 불구하고 몸매도 왜 괜찮은 편이어서 장애인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가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진(眞)감이었다.
그녀는 외모 못지 않게 머리도 좋아서 명문대학 법학과에 다니고 있다. 가정도 상류층에 속해 하영은 부잣집 딸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편안하게 하고 장애인이면 무조건 입학을 거부당하던 촌스런 시기를 벗어나 태어났기 때문에 아주 당당히 모든 입학의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하나 둘씩 "장애"에 부딪히게 되었다. 미팅에 자신 있게 참석할 수가 없었다. 여고 시절에도 남학교와의 미팅이 있었지만 그때는 공부를 핑계로 합법적으로 제외될 수 있었지만 대학교의 미팅은 참석을 하는 것이 오히려 합법적이라 하영의 자존심을 있는 대로 구겨놓았다.
같이 가자는 친구의 권유를 점잖게 뿌리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일이 있었다.
"보소, 보소."
투박한 남자 목소리였다. 뒤돌아보았다. 자기와 똑같은 닳은 꼴이 서 있었다. 닮은 것은 목발 두개일 뿐 그는 자기와는 전혀 달랐다. 키도 짤따랗고 하체가 흐믈거리는 문어 다리였다. 그가 자기를 불렀다는 데 혈압이 올랐다. 그래서 그냥 돌아섰다.
"보소, 청각장애요? 와, 사람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는 거요?"
사실 그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섰다.
"1학년이지 예."
그는 확인한다는 투였다. 하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물리학과 3학년이요. 참수요. 푸른 서클 회장이고."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요?"
하영은 싸늘하게 물었다.
"서울 아가씨들은 참 버릇없네. 선배한테 눈 똑바로 뜨고 그게 뭐고."
"기가 막혀."
하영은 오히려 그에게 더 무례함을 느꼈다. 하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뒤돌아서 가버렸다. 하영의 등을 향해 그는 화살을 던졌다.
"푸른 서클에 가입해.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서클룸에서 모임이 있어. 이번 토요일에 꼭 나와. 이 버릇없는 아가씨야."
하영은 똥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언짢았다. 영 더러웠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장애인 시설에서 학교로 공문이 와 참석을 권유받았지만 하영은 일체 거부를 했었다. 그런 일들이 자기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지같은 녀석이 자기를 장애인 과(科)에 집어넣으려고 하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영은 생전 뱉지 않는 침을 다 뱉어냈다. 소금이라도 있으면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영씨, 음악회 갈래요?"
과에서 가장 그럴듯하게 생겨 그렇지 않아도 관심이 있던 남학생이 하영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하영이 가슴이 뛰었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음악횐데요.?"
하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물었다.
"000 피아노 독주회예요. 귀국 발표회니 까 신선한 것 같아서 가려고 해요."
"그-그렇담, 나두 가야죠"
이렇게 해서 하영은 그와 음악회를 가게 되었다. 그와 음악회를 가기 위해 나란히 걸어 나오는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왜 안 왔니?"
창순가 청순가 하는 선배였다. 하영은 너무나 창피했다. 그가 자기를 아는 체했다는 것, 특히 아주 친한 척했다는 것이 까무러칠 정도로 부끄러웠다.
"전 그런 모임에 가입 안 해요."
하영이 딱 잘라 거절을 했다. 그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아주 즐거웠을 길이 그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하영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박진우씨는 음악회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무척 좋아해요."
"티켓 값 많이 들겠네요. 두 장씩 준비하려면."
"아녜요. 보통 혼자 가요."
"근데 왜 오늘은‥‥‥‥"
하영은 진우의 표정을 살폈다.
"하영 씨와 합께 가고 싶어서요."
하영은 왜 하필이면 자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관두었다. 음악회 자체는 별 볼일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옆에 앉아있는 진우 때문이었다. 가끔씩 그의 옆 얼굴을 훔쳐보았는데 그는 아주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했다. 박수를 칠 때도 아주 열렬하게 손바닥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 음악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하영의 귀에 입김이 쏟아져 하영의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음악회를 보고 나오면서 진우는 국수라도 먹자며 하영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뭐 먹을래?"
"국수 먹자면서요."
"그래 하영이도 국수 좋아하는구나."
진우는 어느새 씨자와 요자를 다 빼버렸는데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정겨웠다. 하영이 가슴속에 진우가 들어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진우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하영이 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하영아, 오늘은 널 납치하겠어."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오장육부를 긁어놓는 창수. 하영은 그가 원수였다. 그 때문에 학교 오는 것이 끔찍할 정도였다. 만약 진우가 아니었으면 학교에 정이 뚝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것보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모여서 어쩌자는 거예요."
"장애인 문제를 우리 손으로 풀어야지 언제까지 이런 구조 속에서 살수는 없잖아. 장애인이 언제까지나 소외 계층일 수는 없잖아."
창수는 연설문을 낭독하듯이 진지하면서도 힘있게 말했지만 하영은 웃음이 나고 한심했다. 구조다, 계층이다 하는 단어가 낯설었다.
"난 그런 데 관심 없으니까 딴 데 가보세요."
하영은 동냥 온 거지 대하듯이 했다.
"야, 넌 찐따 아니냐. 잘난 척 좀 하지 마라."
창수도 참을 수가 없는지 독화살을 그녀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하영은 그 독설이 비집어진 시각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치부해버렸다.
5월이 되었다. 대학의 5월은 온통 장미 꽃 향기로 하영을 매혹시켰다.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하영은 은근히 축제를 기대했다. 대학의 축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축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축제 파트너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겹치기 미팅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소개해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영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축제 파트너는 당연히 진우일 테니 말이다. 하영은 첫 축제이니 만큼 멋있는 축제가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옷도 준비했다. 딸이 축제에 가기 위해 옷을 사겠다고 했을 때 하영의 부모도 마치 시집이라도 보내는 양 좋아하며 신경을 써주었다.
"그래 어떤 친구니?"
하영의 엄마는 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응, 우리 과 친군데 참 괜찮은 애야. 아주 귀티 나게 생겼어. 음악회도 여러 번 갔었어. 얼마나 잘 해주는지 몰라."
하영은 진우에 대해 자랑스럽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축제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친우가 축제에 대한 스케줄을 말하지 않았다. 약속을 할 때 항상 시간적 여유를 두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말이 얼었다. 하영은 불안해졌다.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면 가슴이 갈가리 기는 듯이 아팠다.
드디어 축제날이 되었다. 그런데 진우한테 아무런 제안이 없었다. 하영은 그 이유를 막 생각해내다가 아마 그에게 참석 못할 이유가 생겼나보다고 좋게 해석했다. 그것이 마음 편했다. 그가 없는 축제는 무의미했지만 새 옷까지 마련했는데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영은 학교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캠퍼스는 북적거렸다.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아니 그 이상의 젊은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플래카드, 풍선, 오색의 줄 테이프 등으로 휘감겨있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영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그런 자기 모습이 초라하다는 생각은 없었고 다만 사람들에게 밀려 쓰러질까 봐 무서웠다. 하영은 사람들 속에서 언제나 이런 두려움을 느낀다. 탈춤 구경을 했다. 얼굴에 탈을 쓰고 어깨춤을 추며 두 팔과 두 다리를 크게 크게 움직이는 모습이 하영에게 시원함을 주었다.
그때 하영의 눈에 진우의 모습이 잡혔다. 레이더망에 포착이 되듯이 군중 속에 끼어있는 진우이지만 정확히 잡아냈다. 반가웠다. 그가 몹시 아플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도 자기처럼 첫 번째 축제를 지나칠 수 없어 외롭게 기웃거리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가 불쌍해 보였다. 하영은 어떻게 진우에게 다가갈 것인가를 머리 속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진우씨 하고 그를 일깨울 것인지 아니면 그가 먼저 하영씨 하며 발견의 기쁨을 줄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때였다. 그가 움직였다.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하영은 당황했다.
생각 같아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 멈춰 세우고 싶었지만 그럴 거리도 아니었고 또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빠른 속도로 그의 뒤를 쫓아가기로 했다. 군중들이 다 빠져나가야 안심하고 자리를 뜨는 하영이었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기에 용기를 냈다. 죽기 살기로 그 군중을 헤집고 나왔다. 좀 비켜주세요 라는 말을 수십 번을 하고서야 인간 숲을 빠져나을 수 있었다.
그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저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하영에게 좀 더 구체적인 정보라도 주려는 듯 손을 잡았다. 하영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완전히 뒤집혔다.
"야, 잘 말났다.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는데."
오창수였다.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축제랍시고 한껏 멋을 냈는데 하영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였다. 그래도 오늘은 그가 밉지 않았다. 물에 빠진 하영에게 그는 지푸라기였다. 그래서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푸른 서클이 개최하고 있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하영씨. 제가 한잔 바치겠습니다."
그곳에서 하영은 여왕이었다. 모두 하영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학생 한명이 있었는데 그녀만 말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뚱뚱해서 입이 벌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걸리 한 대접을 한숨에 들이켰다. 하영에게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여자가 술을, 그것도 남자처럼 마실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아이들도 술을 잘했다. 성한 사람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잘 마시고들 있었다. 하영은 마치 술 마시기 대회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왜 안 마셔?"
"전 못해요."
"어허 이거 큰일났네. 우리와 함께 못 살겠네."
창수는 하영에게 억지로 술을 권했다. 하영은 생전 처음 막걸리 한 사발을 마셨다.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취하고 싶었다. 도저히 제 정신으로는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하영은 그 날 밤늦게 귀가했다. 축제에 참석했던 딸에게서 나는 막걸리 냄새를 그녀의 어머니는 대견스러워했다.
"아저씨 부르지 않고."
"집 앞에까지 데려다 줬어."
하영은 희망사항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우리 집 앞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냈단 말이니?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지. 넌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불편한 딸을 안전하게 집에까지 바래다준 청년에 대한 고마움에 하영 엄마는 혀를 찼다. 길게 아주 길게. 그런데 하영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자기의 거짓말을 비난하는 소리로 들렸다. 너무나 부끄러워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 날 밤 하영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사랑의 배신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던 그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날부터 하영은 지독한 감기 몸살로 꼼짝도 못했다. 하영은 박진우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자기 머리에 손을 얹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위로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축제도 끝났고 감기 몸살도 끝났다. 다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하영의 마음은 옛날 그 마음이 아니었다. 박진우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배배 꼬여 있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박진우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와 친한 친구에게 친절을 보이기도 하고 그에게 관심 없는 척 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영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에게 여자다움을 보여주어 자기에게 끌리게끔 유혹하기로 했다.
"아, 나 힘들어서 더 못 걸어요. 난 여기 있을 테니까 갔다들 와요."
힘들어서 못 걷겠다는 것은 장애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기에 도저히 발설해서는 안 될 그녀의 치부였지만 그건 전략이었다.
"널 어떻게 여기다 두고 그냥 가니 ?"
과대표가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 박진우가 나섰다.
"하영이 내가 업고 갈게."
하영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영은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자기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 기뻤다. 진우는 하영에게 등을 내밀었다. 진우의 등은 아주 넓었다.
"정말 업혀도 돼요 ?"
그의 등뒤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그가 재촉했다. 그 재촉에 못이기는 척하고 그의 등에 몸을 얹었다. 그것은 그와의 첫 피부 접촉이었다. 하영은 그와 손을 잡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피부가 닿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남자 냄새가 났다. 엄마한테서 나는 냄새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아빠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건 아주 자극적인 향기였다. 생각 같아선 킁킁거리며 좀 더 그 향기를 조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의 목을 휘감은 그녀의 두 팔이 그의 볼을 가끔씩 스쳤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까실 까실한 턱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찔렀다. 썩 좋은 느낌이었다.
"그만 내릴래요. 진우씨 숨소리 거칠어지니 까 미안해서 내가 더 힘들어요. 어서 내려줘요."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하영은 내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를 너무 힘들게 하면 그가 질려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하영은 박진우를 유혹하기 위한 계략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멀쩡히 걸어오다가 넘어지는 연극까지 했다. 박진우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하영을 일으켜 세워 줬다.
"어디 다친 데 없니?"
"없어요. 괜찮아요."
하영은 무릎이라도 벗겨지길 원했지만 야속하게도 멀쩡했다. 인간의 보호 본능 때문에 상처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지만 이런 노력들로 과에서 박진우와 하영을 하나의 커플로 생각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영에게 생긴 모든 문제는 진우에게 넘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둘을 연인 사이로 보아서가 아니라 박진우에게 특별한 봉사 정신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하영은 괘념치 않았다. 나중에 그게 아니었구나 할 테니. 오히려 그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진우는 하영의 집에 놀러오곤 했는데 하영 엄마도 그가 오면 마치 사위 감이라도 된 양 최선을 다했다. 모든 것이 하영의 뜻대로 잘 되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푸른 서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오창수와도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하영에겐 그지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우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졸업 하고 가지?"
"졸업하고 가면 취직하기도 힘들고, 취직 못하면 장가들기도 힘들고,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빨리 갔다 오기로 했어."
하영은 그가 자기한테 의논 한마디 없이 그렇게 큰 결심을 한 것이 섭섭했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군에 가 있는 동안 자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 것이 서운했다. 자기는 초주검이 되어 있는데 너무나 싱싱한 모습의 그가 야속했다.
"진우씨 없으면‥‥‥‥"
하영의 말을 가로막으며 진우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른 친구들이 더 잘 해줄 거야. 모두들 하영일 얼마나 돕고 싶어하는데. 내가 주책이지. 뭐 잘났다고 혼자 설치고.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아. 하영일 도와줄 기회를 내가 모두 차단해버린 셈이 됐으니."
하영은 그 말을 계속 들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그동안의 행동이 하나의 자원봉사였다는 얘기로 들리기에 묵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영은 좋게 해석했다. 말재주가 없어서 진실을 말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다.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뼈아프게 느꼈다. 하영은 더 이상 점잖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주 아주 독한 마음을 먹었다.
"야, 더 늦기 전에 내려가자. 늦으면 차 끊기잖니."
"자구 가지 뭐."
"뭐, 자? 이 넓은 별장에서 둘이서 잠을 자? 무섭지도 않니?"
"뭐가 무서워? 진우씨가 있는데."
"얘 좀 봐. 내가 무서운 거지. 난 장담 못해."
하영은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영은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냈다. 진우를 나지막이 불렀다.
"진우씨!"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에 진우는 조금 멈칫했다.
"진우씨, 부모님은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진우는 그 말의 진의를 몰라 대답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런 영화 있잖아. 어느 한쪽이 부실하면 부실하지 않은 쪽에서 반대하는 거 말야."
"그야 사랑에 따라 다르겠지 뭐."
더 이상 답변을 보류할 수 없었는지 진우는 간신히 대답했다.
"진우씨 부모님은 어떨 것 같아?"
"그-그야,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한번도."
진우는 "한번도"를 강조했다. 너무나 강조를 했기 때문에 하영은 움찔했다. 하지만 이왕에 시작한 게임인데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진우씨도 생각해 보지 않았겠네."
하영의 음성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너무나 확연한 떨림이어서 진우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하영인 참 좋은 여자야."
하영의 말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영은 되물었다.
"진우 씨한테 좋은 친구는 아니구?"
진우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천천히 하영의 손을 잡았다. 그건 그에게도 좋은 여자라는 뜻이었다. 하영은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었다.
"나도 하영일 참 좋아해. 그런데 하영 이한테 다가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
하영의 눈물 줄기가 더 굵어졌다.
"글쎄, 친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야 한다고 그냥 생각했어."
하영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뻔했기에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
"하영아, 널 좋아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야. 자신이 없어."
하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추했다. 형편없는 부스러기 같았다. 참담했다.
하영은 그날 이후 몹시 풀이 죽었다. 자신감 넘치던 그녀에게서 그것이 빠져나가자 온통 쭈글쭈글했다. 하영에게 진우는 첫사랑이었다. 그전에는 공부 때문에 남자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만난 진우는 하영에게 첫 남자였다. 하영은 진우에게 푹 빠져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진우 생각만 했다.
진우가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진우와 연결시켜 생각했다. 하영에게 있어 진우는 우주요, 지구요,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진우는 하영의 생명이었다. 진우를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었다. 생명이 중단된 하영은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영아, 왜 이러니. 진우가 죽기라도 했니, 군대 3년 잠간이야. 정신 차려."
하영 왜 그러는지 전혀 수밖에 없었다. 그건 죽은 후에도 밝혀지지 않을 극비였다.
진우가 군에 간 것이라면 하영은 오히려 더 신나 할지도 몰랐다. 군이라는 곳은 여자와 완전히 봉쇄된 곳이어서 더 안전지대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진우는 안전지대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하영은 너무나 허전했다. 너무나 허무했다. 걸어 다녀도 땅에 닿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웃어도 말해도 내용이 없었다.
하영은 완전히 허깨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중상이 가벼워져 갔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연 치유였다.
"하영이 오래간만이다. 많이 아팠다면서. 어디가 아팠던 거니 ?"
창수가 다정히 맞아주었다.
"그냥 여기저기가 좀 안 좋았어."
"꾀를 부리니까 그렇지. 앞으론 자주 나와서 일 좀 해라. 이 땅의 버림받은 장애인을 위해서 말야."
버림받은 장애인이라는 말에 울컥 아픔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 결심했다. 진짜 장애인을 위해 몸 바쳐야겠다고 말이다.
"창수야, 너 장가 갈 놈이 여기 와서 노가리 풀 시간이 있냐?"
푸른 서클 멤버가 들어오며 하는 첫인사였다. 하영은 그 말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전혀 상관없는 남자였는데도 장가를 간다고 하니까 싫었다.
"추-축하해. 누구야? 같은 멤버?"
"미 -미쳤니. 장애인끼리."
하영은 자세만 허락한다면 창수의 뺨을 치고 싶었다. 불행히도 창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뺨을 치려면 목발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데 그 동작까지 하는데는 적어도 2분이 걸리는데 그 시간이 분노를 가라앉혀 주었다.
하영은 그때부터 남자 혐오증에 걸렸다. 하영은 남자들과 동등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영은 남자처럼 웃고 남자처럼 떠들었다. 하영은 자기 안에 있는 여성을 죽였다. 그리고 밖에 있는 남성을 끌어들였다.
하영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의 여자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갔다. 하영은 정말 여자이기가 싫었다. 여자, 그것도 장애를 가진 여자는 이 땅에서 너무나 살기 힘들기에 탈바꿈을 해나가고 있었다.
만약 진우가 그녀를 보면 하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하영은 많이 변했다.
"하영아. 계집애가 왜 이러니? 너 원래 이런 아이 아니었잖아. 얼마나 여자다운 여자였어, 몸이 그럴수록 조신해야지, 이게 뭐냐."
하영 엄마는 변모해 가는 딸을 안타까워하며 늘 이렇게 타일렀다.
"엄마, 몸이 이럴수록 조신해야 한다는 건 어느 나라 법이에요? 그리고 여자, 여자 하지 마세요. 난 여자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절 여자 취급하지 마세요. 전 사람이에요, 사람."
하영은 여자이기를 포기했다. 그건 불행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건 하영에겐 행복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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