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거세되는 욕망과 불안한 근대의 은유 > 문화


장애, 거세되는 욕망과 불안한 근대의 은유

나도향의 <벙어리 三龍이>를 중심으로

본문

  14770_13915_427.JPG  
▲ <黎明>1925.7 창간호표지

장애인에게 강제된 욕망의 문제
근래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은 흔치 않은 ‘사건’이 되고 ‘미담’이 되고 있다. 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이 아직도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본보기나 하늘도 감동할 낭만적이고 숭고한(희생과 헌신으로 충만한) 사랑으로 과도하게 해석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방송 등의 매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생활을 보통사람들의 소박하고 행복한 삶으로 그리면서 장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인식을 제고하려는 노력에 적잖은 공감을 얻고 있지만 아직도 성과보다는 과제가 큰 듯하다.
이를 프로그램 기획의 한계로만 책임 묻는 것은 가혹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신체의 손상과 결핍을 구별과 차별의 근거로 삼아왔던 인식이 너무나 견고했던 데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솔직 할듯한데 신체의 강인함이 권력이 된 일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한 신체만을 정상으로 인정하고 이와 ‘다른’ 신체를 비정상으로 낙인찍어 정상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기를 당연시 하는 것으로 ‘부드럽게’ 세뇌되어온 장애,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손을 가진 신체를 억압하면서 그들의 주체되기를 방해하고 욕망을 기만하며 타자화 했던 권력적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이미 타자를 소외하는 속에서 스스로도 소외돼버리는 경험이 낯설지 않은 때문이다.
신체의 결손에서 비롯된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욕망의 문제와 맞닥트렸을 때에 갈등이 발생하는데 그것의 폭발력은 가히 파괴적이다. 특히 장애를 가진 자신을 스스로 타자화 되기 마땅한 존재로 인식했다가 특별한 계기로 억눌러왔던 욕망을 의식하게 되면서는 주체적 자아 획득의 의지가 발동하면서 험난한 노정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세계와 나의 대결은 소설 속에서 이미 익숙하다.
1925년 7월, 「黎明」에 게재된 나도향 1)의 <벙어리 三龍이> 2)는 억압적 현실과 대결하는 소외된 타자의 비극적 결말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인 ‘벙어리 삼룡(三龍)’이 주인 아들과 갈등하고 그의 아내인 ‘새아씨’를 연모하고 욕망하면서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은 죽음으로 종결하는 소설은 개인의 욕망의 문제를 식민지와 근대화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여 인식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특히 본 소설이 장애인 주인공의 갈등을 통해서 식민지 현실과 근대의 불안한 인식을 주조하고 있음을 의식하면 새로운 읽기와 해석의 방식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장애학적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억압으로서의 장애 이론’을 제안한 폴 에버리(Paul Abberley)가 효과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장애학적 시각이란 의도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띤 시각으로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금전적, 환경적, 심리적 불이익을 확인하고 그에 반대하며” 동시에 “장애인의 삶의 양식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각을 말한다. (Abberley, Paul. “The Concept of Oppression and the Development of a Social Theory of Disability.” Disability, Handicap & Society. 2.1, 1987,p.5를 손홍일, 「어거스튼 윌슨의 『두 편의 열차』와 장애학적 시각」, 『신영어영문학』,신영어영문학회, 2011, p.73에서 재인용)즉, 소설에서 장애, 장애인을 불안한 현실을 인식하는 은유로 장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짚어보는 것이다.

  14770_13916_541.JPG  

▲ 1964년에 상영된 영화 '벙어리 三龍이'

감독 신상옥/ 출연 김진규, 최은희

<줄거리>
내가 열 살 즈음, 십사오 년 전의 일로 지금은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빈민굴이나 그전에는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살았던 남대문 근처 촌락에는 제법 큰 과목밭을 가지고 여유롭게 살던 ‘오생원(吳生員)’이 있었다. 그는 제법 남자답게 생긴 얼굴로 목소리도 컸고, 늘 감투를 쓰고 다녀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양반이라 불렀다. 그도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명절에 음식을 나누거나 농사짓는 연장을 빌려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인심 후하고 존경을 받는 집인 동시에 세력 있는 집으로 인정받았다.
그 집에는 ‘삼룡(三龍)’이라는 불밤송이 머리에 키와 목이 짧고, 얽은 얼굴에 커다란 입을 가진 하인이 한 명 있었다. 주인이 이사 오며 데리고 온 그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슬기롭고 눈치 빠르며 실수 없이 일을 잘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앵모’(벙어리를 일컫는 말)라고 불러도 개념치 않고 그저 열심히 주인을 위해서 일했다.
주인집에는 열일곱 살 먹은 삼대독자가 있었는데 귀엽게만 길러서 버릇없고 어리광이 심하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많이 했다. 그해 가을, 주인은 아들을 장가들이며 그의 분별없음을 걱정하여 가난하고 문벌이 높은 집 딸을 사오듯 며느리로 삼고 처가에 일정금액을 매월 보내주었다. 주인 아들은 ‘색시를 얻었으니 이제 철들어라’거나 ‘아내만 못 하다’는 친척과 동네 사람들 말을 듣고는 아내를 무시하고 때렸다. 삼룡은 고운 새아씨를 때리는 주인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는 새아씨가 술 먹고 흠씬 매 맞은 남편을 업어다 방에 눕힌 일이 고마워서 삼룡이에게 남은 비단조각으로 부싯쌈지를 만들어주었는데 주인 아들은 이를 빌미로 삼룡을 매질했고 이후 삼룡은 마음대로 새아씨 거처를 드나드는 일이 금지되었다. 삼룡은 새아씨에 대한 궁금증이 연모의 감정으로 발전하면서 주인이 전보다 밥과 음식을 더 주고 편안하게 해주어도 싫었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룡은 약을 구해 들어오는 여자 하인에게 새아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다가 몰래 새아씨 방을 살폈고, 그녀가 목을 매려는 것을 알고 뛰어들어 말리려다가 주인 아들로부터 사통했다는 오해를 받고 심한 매질을 당하고 쫓겨난다. 그날 저녁 누군가 불을 놓은 것처럼 주인집을 빙 둘러 불이 나고 집으로 뛰어든 삼룡이 주인을 먼저 구해내고, 살려달라는 주인 아들을 뿌리치고는 여기저기로 새아씨를 찾아다닌다. 삼룡은 죽기를 각오한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새아씨를 발견하여 나가려 하나 더 이상 불길을 뚫고 나갈 수 없어 새아씨를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삼룡은 지붕위에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고 새아씨를 가슴에 안으면서는 처음으로 살아난 듯 느꼈다. 집이 전소되고 삼룡은 결국 새아씨 무릎에 누워 죽고 말았다. 그의 입 가장자리에 웃음이 엷게 나타났다.

 

욕망하는 주체의 좌절과 기호화 된 장애
삼룡은 자신의 장애를 불가항력적인 천형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후 주인 아들과의 갈등과 새아씨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그의 욕망을 추동하면서는 철저히 타자화 된 인물에서 주체를 찾아가는 인물로 급부상한다.

그에게는 눈물이업섯다. 그의눈물은나오랴할 때 아주 말너부터버린 샘물과가티나오랴하나 나오지를아니하얏다. 그는 주인의집을 버릴줄몰으는개모양으로 자긔가잇서야할곳은 여기밧게업고 자긔가 미들곳도 여기잇는사람들밧게업는줄알엇다.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죽는것이 자긔의운명인줄밧게아지못하얏다. 자긔의주인아들이 리고질으로 집어 고 모든방법으로 학대할지라도 그것이 자긔에게 의례히잇슬줄밧게아지못하얏다 아푼것도 그아푼것이 의례히 자긔에게 도롸올것이오 쓰린것도 자긔가 밧지안어서느안될것으로알엇다. 그는이맛당이 자긔가 바더야할것을 엇더캐해야 면할가하는생각을 한번도하야본일이업섯다.
- <벙어리 三龍이>,『黎明』, p.64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삼룡은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순응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머물 곳은 오생원 댁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생원의 집이야말로 있어야 할 곳이고 그 곳밖에는 없는,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존재감으로 충일한 장소이다. 게다가 먹이고 입혀주는 주인의 은혜는 스스로를 ‘주인의집을 버릴줄몰으는개’처럼 인식하게 했다. 삼룡은 집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확고하게 인식하고 주인에게 복종을 맹세한다. 때문에 그가 자신을 매질하고 괴롭히는 주인 아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대들지 않은 것 또한 그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인의 아들은 자신에게 작은 주인이기에 그의 괴롭힘으로 당하는 고통과 수치심도 감내해야 할 역할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인 아들이 괴롭힐 때마다 벙어리인 자신을 원망하고, 말하는 사람들과 말 못하는 자신은 “가튼자유와 가튼권리가업는”것으로 단정하면서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복종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복종은 주인 아들의 아내인 ‘새아씨’를 연모하면서부터 의심과 회의의 대상이 된다. 시집 온 새아씨는 몰락한 가문의 현숙한 딸로 교양을 갖췄다. 버릇없고 몰상식한 주인 아들과는 애당초 어울리는 짝이 아니나 아들의 무지와 포악을 은폐하려는 주인의 목적은 재물을 통해서 혼인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혼례 이후 주인 아들은 갖은 트집으로 아내를 매질했는데 이는 삼룡으로 하여금 새아씨에 대한 궁금함을 낳고 이를 연모의 마음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주인 아들과의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삼룡의 궁금함은 순결하고 고운 새아씨가 자신처럼 맞는 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이다. ‘벙어리가 아닌 그녀는 왜 매를 맞는가?’
새아씨에 대한 궁금함은 곧 연모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주인 아들이 술에 취해 매 맞은 자신을 업어다 눕힌 삼룡에게 아내가 고마움의 표시로 부싯주머니를 만들어 준 것을 트집 잡아 아내를 매질한 일이 있은 후다. 삼룡은 벙어리도 아니고, 못생기고 흉측한 인물도 아닌, ‘고운’ 새아씨가 자신처럼 매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타인과 다르다고 생각한(그래서 맞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삼룡은 자신처럼 매 맞는 새아씨를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이해하는 동시에 주인이 주는 옷과 음식에 굴종하고 살면서 스스로 억압했던 성적 욕망을 호출하게 된다. 새아씨에 대한 궁금함이 연모의 마음으로 전환되는 것은 삼룡이 욕망을 드러냄으로 소외된 타자에서 주체로 성장하는 대장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욕망의 통제를 수긍해왔던 주체를 회복하려는 의미 있는 걸음이다. 이제 삼룡이 새아씨를 연모하는 것으로 자신이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진정성이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굴절되는지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삼룡은 목을 매 자살하려는 새아씨를 구하기 위해서 방으로 뛰어들었다가 주인 아들에게 발각되어 매를 맞고 쫓겨난다. 주인마저 삼룡을 외면하면서 그는 더욱 절망하고 종국에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는 적극적 행동을 실천한다. 그것은 자신이 ‘우주’라 믿었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관계를 흩고 새롭게 관계를 구성하려는 주체의 시도이다. 삼룡은 불에 휩싸인 집에 뛰어들어 주인을 업어 구하였고 새아씨를 안고서 막힌 불길을 피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삼룡은 새아씨를 가슴에 안고서야 살아난 듯 느꼈고 새아씨의 무릎을 베고 행복한 웃음을 지은 채 죽음을 맞았다.
여기에서 새롭게 주체로 살고자 했던 삼룡의 도전이 죽음으로 성공한 것인지, 실패로 끝나버린 것인지에 앞서 주목할 것이 있다. 주인공 삼룡의 주체 회복의 ‘도전’이 <벙어리 三龍이>가 발표된 1925년의 현실과 연동한 속에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부정과 왜곡된 근대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기존의 평가에 대한 장애학적 인식의 필요이다.
주인공 삼룡은 벙어리라는 신체적 결함으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억압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는 주인도 삼룡의 이성과 욕망을 강제했다. 삼룡은 욕망하는 주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타자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곧 식민지 근대를 살아갔던 우리의 모습을 담아낸다. 즉 욕망은 식민지와 근대를 살아가기 위한 당위가 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반봉건적인 인습과 규범으로 인하여 항상 조정 받고 감시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벙어리라는 신체적 한계와 주인으로부터 보호 받으며 살아야 하는 머슴이라는 규범적 현실과 주인댁에 불을 지르고 새아씨를 구해내는 삼룡의 주체를 자각한 행위가 맞물리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타율적 근대화 과정을 겪어야 했던 민족의 정서적 상태를 반영하는 의의를 갖는다. 우리에게 근대화란 권력으로부터 당위적으로 주어지는, 그래서 따라잡아야 할 숙제, 그 무엇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터이다.
소설은 장애, 장애인을 전면에 세워 근대의 불안을 은유적으로 표상하도록 장치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오롯한 주체일 수 없었던 식민지 근대의 모습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 근대를 인식하는 한계와 맞닥트린, 불편한 진실이다. 
 

  14770_13914_215.JPG  
▲ 배재고보 시절의 나도향

1) 나도향(羅稻香)은 (1902년 3월 30일 ~ 1926년 8월 26일), 본명은 나경손(慶孫)이며 필명은 나빈(彬)이다. 한성부 용산방 청파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출생, 배재학당을 졸업,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에 건너가 문학 공부.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며 문단 등장.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룸.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 1925년 『黎明』 창간호에 <벙어리 三龍이> 발표. 그 외 <물레방아>, <뽕>,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
2) 「黎明」은 1925년 대구서 창간한 월간 종합지다. 경북 선산 출신 언론인으로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던 김승묵이 발행했으며 대구서 엮고 서울서 인쇄했다. 1925년 7월 창간호부터 1927년 1월호 까지 모두 4권이 출간됐다. 발행인 김승묵이 평론가, 문학가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필진 또한 화려했는데 나도향을 비롯하여 이상화, 이광수, 김억, 오상순, 김기진, 박영희, 염상섭, 최서해, 변영로, 현진건 등 명망 있는 문인들의 작품을 실었다.


참고문헌
근대서지학회, 『黎明』1925.7 (영인본), 『근대서지』3, 근대서지학회, 2011, pp.61-74.
김정희, 「나도향 소설에 나타난 전망과 서술의 신뢰성 고찰-『벙어리 삼룡이』를 중심으로-」, 『韓民族語文學』67집, 한민족어문학회, 2014, pp.375-397
박헌호, 「나도향과 욕망의 문제」,『상허학보』6, 상허학회, 2000, pp.289-330.
손홍일, 「어거스튼 윌슨의 『두 편의 열차』와 장애학적 시각」, 『신영어영문학』, 신영어영문학회, 2011, pp.71-83.
윤홍로, 『나도향-낭만과 현실의 변증』, 건국대학교출판부, 1997.


 

작성자차희정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외래교수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