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사각의 방
본문
땡, 네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무수히 쏟아지는 전등불 아래서 날개를 달고 날아와 나의 청신경으로 돌진했다. 이어서 그것은 대뇌로 곧장 가지 않고 운동신경으로 건너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개구리가 높이뛰기 하듯 링의 중앙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녀석을 보았는데 녀석도 힘차게 링 한복판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기를 죽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마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어떤 두려운 감정을 쫓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두려운 나머지 과격한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으려 하는 가련한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상대편 선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같은 체육관 소속이 아닐지라도 웬만한 선수의 이름과 얼굴은 대충 알고있는데 녀석은 생소한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권투를 시작하려는 애송이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리 오픈 게임이지만 이런 녀석을 내세우다니,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1회전이 끝나고 나는 약간 당황했다. 뜻밖에 녀석의 몸놀림은 좋았으며 간간이 내뱉는 원 투 스트레이트도 위력이 있는 듯 했다. 족히 나의 적수는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량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초반이니까 녀석의 힘을 슬슬 빼면서 맷집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복싱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다 해도 10회까지 제 기량으로 뛰는 선수는 없으니까. 종반에 가서 결판을 내야했다.
녀석은 아직까지 지쳐 보인다거나 피로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척 강인해 보이는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머리도 스포츠형으로 깍아 투지만만해 보였다.
나는 짐짓 힘을 빼고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오른손을 턱 바로 밑에 대고 왼손으론 잽을 뻗으며 견제하면서 녀석을 살폈다. 녀석도 마치 나의 흉내라도 내는 듯한 몸짓으로 오른쪽으로 따라 돌았다. 가끔 허리를 완전 구십도로 꺾으며 얼굴은 하늘로 치켜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쳐볼 테면 져봐라 하는 시늉 같기도 하고 나의 허점을 노리려는 몸짓 같기도 했다.
녀석의 눈은 불타는 한 마리 고양이 눈이었다. 깊은 밤 풀잎 서걱이는 소리를 듣고 혼자 걸어가는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위협을 할 것 같은 불쾌하고, 끈적한 눈이었다. 검은 배경의 살벌한 낯선 곳에서의 야밤에 소름끼치는 소리까지 동반하고 다가오는 번뜩이는 두 눈은 이미 늙어 버린 참피언같기도 하여 그 빛은 나를 어느 쇠창살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곳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수렁이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수렁은 발끝에서부터 온몸에 이르기까지 힘을 뺀 후 거대한 흡입력으로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수렁속으로 일단 빠져들면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상태인지조차 정확하게 구별을 할 수가 없다. 힘을 쓸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죽은 것이 분명한데 만약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아직은 살아있는 사실 하나만으로 힘을 손끝으로 모아 6온스의 글러브를 통하여 상대방의 육체에 충격을 주어 그 육체를 바닥에 눕혀야 한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느껴지는 허공을 가르는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듯한, 손놀림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그를 지치게 만든 후 통렬하게 그를 쓰러뜨려야 한다. 간단하게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른쪽, 왼쪽, 곡선, 직선, 턱, 배, 좌우연타를 넣어 그로기 상태가 될 때까지 최후의 일격을 유보해 두어야 한다. 녀석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몸으로 항복하여 허위적거릴 때, 다리가 많이 풀리면서 비틀거릴 때,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위해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시켜야 한다.
그러나 녀석은 싱싱하게 살아있다. 슬쩍 다가서는 척 속임수 동작을 취하다가 입 한 쪽을 헤 벌리며 징그럽게 웃고 있다. 그 표정에서 나는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녀석은 돌고래처럼 끈적한 땀을 흘리며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는 내 배 위에 한 쪽 발을 언고 호전적인 관중들 앞에서 손을 번쩍 치켜올리곤 V자를 그려보는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승자의 일시적인 기쁨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일그러진 웃음을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그의 무언극에 엑스트러로 출연해서는 안 된다. 모처럼의 무대에서 내가 주인공이 돼야 한다. 내가 환호성에 답을 하며 사람들의 알량한 칭찬이나마 들어야 한다. 내가 패배자가 돼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 승리는 하나의 문이다. 실력이 거의 비슷해서 차이가 나지 않을 때는 기회를 누가 먼저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종이 한 장 차이다. 교묘한 놈이 승리한다. 단지 그것의 차이다.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녀석의 손은 시계추처럼 얼굴과 가슴으로 머물렀다가 돌아오곤 했다. 녀석의 손은 잘 제어된 기계장치였다.
녀석은 쫓는 입장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이기 때문에 쉽게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내가 적극적으로 나와주기를 바랄 것이며, 그렇게 나와 주지 않는다면 각 라운드마다 점수나 잘 관리해서 판정으로 이기려 할 것이다. 녀석의 노련미는 긴 어둠의 동굴 속에서 바라고 바라던 빛을 보기 일보직전인 나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하다.
"녀석은 나를 유인하고 있다.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녀석의 기분 나쁜 눈 속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왼쪽으로 돌았다. 녀석의 주먹이 좀 쳐진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한 것은 녀석도 나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움직였을 때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잽을 툭 내밀었다. 왼쪽 주먹은 직선으로 날아가 녀석의 안면에 박혔고 녀석은 뒤로 주춤했으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약간의 발놀림을 해보였다. 곧이어 녀석은 허리를 뒤로 제꼈으므로 나의 오른손은 나가지 못했다. 녀석의 허리는 놀랄 정도로 유연했다. 주먹을 뻗어도 무모한 허공만 할퀼 것 같았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걸 참으며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기로 했다.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어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너에게 불리해."
나는 그의 약점을 찾기 위해 그의 복부를 노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둔탁한 느낌의 주먹이 얼굴로부터 느껴져 왔다.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녀석의 얼굴을 스쳤으나 녀석은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 들어왔다. 나는 겨냥하지 않고 그냥 육감적으로 주먹을 갖다 댔다. 녀석도 미친 듯이 달려들어 쉴 틈을 주지 않고 좌우로 펀치를 날렸다. 나도 질 새라 라이트, 레프트를 쉴새 없이 꽂았다. 그야말로 난타전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녀석이 때리면 맞고 나도 다시 때리고 하는 밀고 밀리는 싸움이었다. 맞을만큼 상대방을 때렸을 것이었다.
아나운서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10회전 오픈경기를 4회전 째 진행 중입니다. 이 경기가 끝나면 우리 한국의 조동민 선수와 필리핀의 이노무드라 선수의 대전이 있겠습니다."
"두 선수 좀처럼 다가서지 않고 있습니다. 한차례 난타전을 벌이고 나서 계속 외곽으로 돌고 있습니다. 흰 트렁크를 입고 있는 이수민 선수, 접근 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백호 체육관 소속 황상칠 선수, 자신 만만합니다. 두 선수 서서히 링 한복판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시합이 다 끝나고 영화를 보듯 그렇게 녹화필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내가 되어 시합하고 있는 나를 보고 싶었다. 이 장소 이 시간에 나의 정신과 육체에서 빠져나온 또 하나의 내가 진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그 기분이 어떨까.
아뜩한 현기증이 느껴져 왔다. 아우성치는 소리의 끝에 섰고, 환한 불빛이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윙윙거리는 벌떼들의 날개짓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에 나 혼자서 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태양은 뜨겁게 타올라 눈을 뜰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보니 또 수렁이었다. 두꺼운 창살이었다. 그것이 점점 다가오더니 좁아지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로우프가 나를 칭칭 감아버린다.
"제발 날 살려다오."
사람들은 나를 끝없는 암실로 처넣었다. 쇠사슬에 묶인 개처럼 발길질 당하고 끌려 들어가 1년 365일을 그늘 밑에서 시원한 바람도 제대로 못 씻고 삐쩍 말라가며 나날을 보냈다.
그때 나는 칼을 들고있지 않았었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도 나는 없었다. 단지 걸식이와는 아는 사이였다는 점과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그들에게 끌려갔다.
"안 불면 재미없어. 모든 걸 다 알고있으니까 자백해!"
사복 경찰은 끈질겼다.
"난 잘 몰라요. 정말이예요."
"이자식, 너 그렇게 나올거야, 그때 어디 있었어?"
"난 그때 거리를 돌아다녔다구요."
"거리를 왜 돌아다녀, 임마!"
"일자리를 구하려구요."
"거짓말 마, 이 자식아!"
"정말이예요."
"그 걸식이 자식을 숨겨준 게 확실하지? 자 말해봐. 순순히 자백하면 형이 가벼워질 수도 있어."
나는 나의 결백을 끝까지 밝히려 했으나 결국은 "수도 공사"라고 불리우는 지독한 고문으로 손을 들고 말았다.
1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나는 해방을 꿈꿨고 자유만을 그렸다. 그 안에 갇혀있는 동안 때때로 자유라는 새삼스런 단어가 알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다가 온 몸을 휘감으며 수갑보다 더 짜릿하게 찔러왔다. 그러나 정작 높은 담과 회색빛 도는 건물을 거느린 교도소를 나오는 날,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 아래서 아연하게 서 있었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굳은 듯 서 있었던 그 이유를 나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다니. 그것은 아마 구속이라는 것이 내 몸 안에서 면역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증이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억울함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밤새도록 술만 마셔댈 뿐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자유라는 애틋한 단어를 음미하려 했지만 그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자유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다.
나의 자유를 영원히 앗아가 버리고 나를 불감증 환자로 만들어버린 것이 그 형상의 책임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일을 함으로써 생존해갈 뿐이다. 생존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갇혀 있으면서 책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 한 적도 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유는 영원히 없었다. 죽는 날 비로소 자유스러워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조금씩 사서 모아두었다. 어느 날, 늦은 밤 후미진 골목에서 약을 털어 넣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고 싶어도 쉽게 죽지 못하는 사실 앞에 나는 그만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끝내 자살미수라는 아픈 추억을 간직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나의 마음은 묘하게 변하게 되었다. 시간은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것이었다.
나는 쉽게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왕 살 바에야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위기가 오면 올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오직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치고, 받고, 누르고, 찌르고, 죽였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약한 자는 더 약한 자를, 더 약한 자는 더더욱 약한 자를 압박했다. 그것은, 뱀은 개구리를, 개구리는 메뚜기를 잡아먹는 먹이사슬처럼 냉혹하고 야멸찼다.
나도 사회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치고 받고 싸워야 했다. 그렇다고 취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전과자(前科者)가 안정된 직장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권투라는 이름의 생존의 수단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의 정신은 이미 비대해져 있어 나는 육체로 무엇인가를 하는 직업을 택했다.
나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타조를 만났다. 그는 늙은 실직자였다. 이슥한 밤에 나는 어떤 사내와 싸움을 벌였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내 눈앞에는 낯선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가 타조였다.
"주먹이 세더군"
그는 힘없이 웃었다.
그는 나의 모습에서 자신의 옛날 일을 회상하는 듯 했다. 혈기왕성했던 지난날의 일이 꿈이런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권투 글러브 1켤레뿐이었다. 나는 그의 유일한 재산에 무척 관심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에게 그가 잘 아는 체육관을 소개해 주었다. 노인의 몸은 쇠약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는 나에게 젊었을 때의 얘기를 해주었으나 그의 말재주에 감탄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그려보는 환상적인 장면 속에서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착수했다. 그때는 스스로 원해서 그것을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인간들의 울타리에 갖힌 느낌이었고, 그들의 유희의 도구로 전락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쳐놓은 우리 안에 들어가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물어뜯고 죽여야 했다. 한없는 정적 속에서,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야생의 숲에서 싸우고 으르렁거려야 했다. 벗어날 수 없는 3차원의 현상 위에서 고독하게 뼈를 말리며 죽어야 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나와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었다. 피차 세상이 환멸스럽고, 저주스럽다면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저주하는 자들끼리 싸우는 것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비리를 저지른 재벌회사의 사장 아들이나 망나니로 노는 고위 관리층 인사의 아들을 샌드백치듯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우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즐겼고 우리는 또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싸움을 보여주었다. 서로 타협하여 싸우고 관람했다.
나는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이 헤어날 수 없는 곳에서 빠져나가야겠는데 종이 왜 안 울리지?"
나는 사람들의 울타리로부터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고함 소리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들은 나를 링 한복판에 내세우더니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직접 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 자기들의 몫을 싸우게 했다. 그들은 상처도 입지 않고 승리의 기쁨을 맛볼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싸우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싸우고 싶은 것이다.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오지만 직접 나서지 않고 누구를 대신시켜 그들의 쾌감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희생자로 선택된 나는 조종하는 대로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피 흘리고 쓰러져야 했다.
나는 그들의 광기(狂氣)어린 눈빛과 쉰 목소리가 두려워 시합을 끝낼 때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것은 나의 결심이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어슬렁 어슬렁 기어 들어와 부질없는 샌드백을 두들기고 땀을 흘리며 줄넘기를 수 없이 넘었다. 그러면서 절망하여 쓰러지고 알 수 없는 길로 깊게 빠져드는 것이었다. 내가 쉽게 권투를 포기하지 못하고 연연해 한 것은 아마 내가 벼랑 끝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깊은 계곡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을 파괴하는 자였지만 온전히 파괴하지 못하고 말았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라."
그가 말했고 그가 말한 대로 나의 상처를 바라보자 나는 심한 자기혐오증으로 파괴자와 창조자의 중간에 섰다.
"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어."
"누구를 위해서 이 앞에 나왔니?"
나의 말을 무시하고 그가 묻고자 했던 물음을 던졌다.
"누구를 위해서?"
"그래, 누구를 위해서 나왔느냐 말야? 구경꾼을 위해서? 너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세계를 위해서?"
"모르겠어"
나의 대답은 주먹을 한 대 맞고 비틀거린다.
녀석의 주먹은 살아있다. 시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디 마디 끊어지는 사이에 또 주먹이 날아왔다. 뇌세포들이 발작으로 몸을 떨었고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턱이 치켜올려졌다. 한방의 주먹이 얼굴 왼쪽에 느껴지는 순간 나는 늪을 보았고 다시 복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을 때 몸에서 수분이 빠지는 것 같았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허공엔 별들이 무수히 많은 꼬리를 만들며 떠돌아 다녔다. 한 곳에 붙박혀 있어야 할 별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미아처럼 떠돌아다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눈알을 좌우로 돌려본 후 다시 눈을 떴다. 흐린 시야에 안개가 깔려 있었고, 천천히 사람이 나타났다.
"수민씨 정신좀 들어요?"
물에 씻은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또르르 굴러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된 일이긴요.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이예요."
"제기랄 또 K.O패군 그래."
"염려하실 것 없어요. 열심히 하면 다음에는 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잖아요."
"그따위 말 필요 없어."
"아니, 왜 그래요? 참피언이 되어야 하잖아요."
"닥치라니까!"
"어머 정말 왜 그래요? 난 당신을 위해서 내 할 일도 바쁜데 밥하구 빨래 하구 다 해주는데 왜 나를 내는 거예요?"
"그렇게 힘들면 오지 않으면 될거 아냐!"
나는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이젠 다시는 오지 않겠어요!"
그녀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잠시 망연히 있었으나 곧이어 무서움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기다려 제발 가지 말아 줘. 나를 이 좁은 울타리에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마. 난 두려워. 아무도 없는 단칸방에서 나는 찾을게 없어. 여기 암울하게 갖히기 싫어. 링에서 혹독하게 피 흘리고 나서 똑같은 사각의 방에 오면 그 피의 참상이 떠오르는 것 같아. 링이 축소되어 나를 협박하며 다가오는 것 같아."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아."
"나는 그들의 관심 밖의 인물에 불과해. 그들은 빅 이벤트를 원했지. 오픈 게임은 관심 없어. 언젠가는 오픈 선수를 면하게 될거야. 나라고 참피언 되지 말라는 법 있어? 세계 참피언이 될거라구."
한달 전 나는 6회 K.O패 당한 후 그녀에게 그러게 말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식스, 세븐, 에잇……."
비틀거리며 나는 일어났다. 바닥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는 이상 나는 그 힘의 강도를 측정하고 싶었고 나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다.
주심이 싸울 의사가 있느냐 행동은 묻고 있었다. 나는 두 주먹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파이트!"
한번 다운시킨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나는 아직 녀석의 펀치를 피할 기력은 남아있다. 종이 울릴 때까지 우선 녀석의 펀치를 피하면서 링의 주위를 날 듯이 돌아다니다가 이번 라운드가 끝나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녀석을 맞이해야 한다.
5회전 들어와서 녀석은 현저히 피로한 기색을 보였다. 운이 좋아서 내가 미스 블로우를 치는 그 찰나를 포착해 단 한방으로 나를 눕혔을 뿐이지 녀석은 나에게 K.O로 승리하지는 못한다.
녀석은 발악을 하고 있다. 지금 다운을 시켜 경기를 끝내지 못하면 이후로는 기회가 없고 오히려 자신이 다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나는 피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주변으로 맴돌면서 관중들의 얼굴들을 보았다.
"그들은 누구를 응원하는 것일까?"
나는 안심이 안 된다.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고 간단히 함성도 들린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녀석이 나를 칠 때마다 내는 이상한 괴성처럼 들리는 기분 나뿐 함성이었다. 가끔 내가 녀석을 칠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 적막 속에서 이상한 피곤함을 느끼고 끝내는 연타(連打)로 치는 주먹에 힘이 빠지는 것 같다. 내가 칠 때마다 그들은 아,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통증을 느끼지만 서로서로를 묵인하는 공범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기에만 주시하는 척 한다.
다운 이후로 많이 맞지 않고 5회전이 끝났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오면서 6회전에는 녀석을 잡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의자에 앉아 마주 보이는 녀석의 눈빛을 살기 등등했던 눈빛이 약간은 죽어있어 왠지모를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6라운드에는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까? 늙은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가 미자에게 물었다.
"아들을 낳는다면 무엇을 시킬까?"
"글세……."
그녀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권투 선수?"
나는 반대했다.
"그건 안돼. 고통과 비참함은 나 혼자 느껴도 충분하거든. 난 내 아들을 의사로 만들겠어. 세상의 모든 병든 자들을 고쳐주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그녀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해 낸 것처럼 떠들어댔다.
"이러면 되겠네요. 아들을 낳는다면 커미션 닥터를 시키고 딸을 낳는다면 라운드 걸을 시키면."
"거 빌어먹을 집안이군"
나는 웃었다. 호탕하게, 목이 꺽어져라 웃었으므로 눈물이 찔금거렸다.
"그래, 그래야 되겠군. 권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집안이니까. 아버지는 나가서 열심히 싸우고 아들은 링 아래서 아버지가 얻어터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부상을 입으면 싸울 수 있나 없나를 판단하고 다행히 아버지가 계속 싸움을 하게되면 딸은 휴식시간에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서 관중들에게 눈요기 감을 제공한다. 으하하하하……."
나는 자지러졌다.
"땡."
나는 또 튀어나갔다. 로봇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동작을 취했다. 수그리고 돌고, 뻗고, 흔들고, 왼쪽으로 빠지면서 잽잽.
"빠져 빠지란 말야."
어디서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저절로 나도 모르게 되로 빠지고 있었다.
"레프트, 레프트, 짧게, 짧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들을 흐리게 들으며 달라진 녀석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스텝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느려졌다.
나는 라이트 어퍼를 녀석의 턱에 명중시켰다. 녀석은 충격을 받았는지 뒤로 약간 주춤했다.
이때가 기회다,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좌우연타, 훅, 어퍼커트, 계속 공격을 퍼부어댔다.
녀석은 어떻게 보면 야비한 사기꾼 같은 인상이었으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6·25 전쟁을 찍은 퇴색한 기록 사진에 등장하는 병든 사람처럼 처참했다.
나는 녀석에게 소나기 펀치를 선사했다. 녀석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당한 것이라 그런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로우프를 등진 그에게 달려들어 라이트 단발을 안면에 정확하게 꽂았다. 녀석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중립 코너에서 녀석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두 주먹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원, 투, 쓰리, 화이브……."
녀석은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일어섰다.
"씩스, 세븐."
녀석은 고통을 참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화이트!"
너 아니면 상대방이 다운 당해야 해. 누군가 둘 중에 하나는 피를 흘려야 해.
나는 그의 쏘는 듯한 눈빛을 보자 기운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시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는 서서히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어서 달려들어. 어서 접근해!"
그러나 나는 한 두 번 단발의 주먹을 날렸을 뿐 6회전을 그대로 끝내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왜 녀석을 가만히 나 둔거야?"
매니저 겸 트레이너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내뱉었다.
"지난번 시합에서도 다 이겨논 경기를 이렇게 해서 졌잖아."
"권투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나 봐요. 상대편의 지친 모습을 보면 애처러운 마음이 들어 도저히 달려들 수가 없어요. 그의 처량한 모습을 보면, 더군다나 다운되어 겨우 일어선 사람을 보면 전신에 힘이 빠지고 달려들 수가 없어요."
"그런 마음을 먹으면 도저히 권투를 할 수 없어. 권투, 때려 처!"
매니저 겸 트레이너는 지난번 시합이 끝나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또다시 링에 올라와 권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끝이 없단 말야!"
나는 절규하듯 글러브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그것은 제풀에 못 이겨 가볍게 튕겨오른 후 곧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스펀지, 하나의 비닐과 끝이었다. 그 작고 사소한 물체들이 무기로 변해 사람의 손을 감싼 후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상대방을 때려눕힌다.
다시 7회전을 알리는 종소리. 그 종소리가 나의 머리를 명징하게 때리며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녀석은 다시 기운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제법 날렵해졌다. 나도 싸울 기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무런 떨림이나 괴로움 없이 정면으로 딸려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있을까?
이 수민은 저렇게 미련하지. 머리를 못쓴다니까.
그들은 나를 비웃는다. 자기들이 직접 링에 올라와 적을 멋지게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여러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할 것이다.
내 주먹이 상대방 선수에 적중하면 "어퍼 컷, 그래 그래 그거야 계속……"하며 고함을 치고 심지어는 격렬한 동작까지 취해가며 흥분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무기력하게 맞는다면 "저 병신, 형편없군"하고 품고 있었던 진심을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경기를 이기고 싶다. 승리해 본적이 한번도 없는 나로서는 이 경기만큼은 이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링에 오르기 전엔 쉽게 요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올라와 보니 잡히지 않는 파리처럼 승리라는 것이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아우성소리가 마치 남국의 애잔한 음악소리처럼 귀를 간지럽혔다. 어서 경기가 끝났으면……. 이번 라운드는 몇 분이 남았을까.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시간이라는 것은 묘하다. 어떤 때는 1분이 채 안되었나 싶은데 종이 울릴 때도 있고, 또 어느 회전은 10분이 훨씬 넘은 것 같은데도 좀처럼 종이 울리지 않는다.
나는 나름대로 시간을 점쳐보았다. 30초 29초 28초 27초 26초…… 1초. 땡. 그러나 종이 울리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본 궤도에서 이탈하여 허공에서 파괴되고 시간의 입자들이 하늘거리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지루하다. 몇 분이나 남았을까."
그때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이 왔고 나는 비틀거렸다. 뱃속에 있는 내장(內臟)들이 끄집어내지는 듯한 아픔에 이어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나의 몸은 쉴새없이 폭격 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나보다 생각했을 때 종이 울렸다. 다행이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적의 코너에 몰려있었다. 나는 나의 코너로 걸어갔다. 걸어가고 걸어가도 나의 코너가 가까이 오지 않는다. 나의 코너에 있는 의자와 사람들이 강 건너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건너갈 수 없을 것 같았으나 나는 그 강을 건너가기 위해 물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숨이 차고 나는 취정거렸으나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옮겨 계속해서 걸었다. 물이 목까지 기어올라와 숨을 쉴 수 없었다. 코오너 부근까지 와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자에 앉으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이 경기가 끝날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타조는 소리쳤다."
"넌 꼭 저 녀석을 쓰러뜨려야 해. 그래야 넌 비로소 살 수 있어. 네가 지면 넌 도저히 이 처지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도태되는 거야. 누가 널 알아주기라도 하느냐 말야? 그러니 무너뜨려."
타조는 후줄그레하게 쓰러졌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태양을 피했다.
"지는 사람이 있어야 이기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나를 원망하진 마라."
나는 걸식이와 만나기 전엔 목욕탕에서 일했다. 사람들의 때를 밀면서 위선 하지 않는 육체덩어리를 보았다. 그것들이 위선하게 되는 것은 인간들의 사치스런 치장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옷을 벗으면 누구나 똑같았다. 배가 나온 사람이 있고 다리가 짧은 사람, 목이 긴 사람, 팔이 긴 사람, 신체의 크기는 모두 달랐지만 위선하지 않는다는 것은 똑같았다.
나는 미끄럽고 윤기나는 살(肉)만으로 그들의 지위나 재산, 학벌, 직업 등을 점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목욕이 끝나면 탈의실에서 저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한결같았던 맨몽뚱이들이 수십만개로 분신했다. 두 쌍둥이나 세 쌍둥이가 아닌 수십쌍둥이였던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면서 모두 다른 껍질로 그들의 순수한 육신을 가리고 새로운 세계로 가서 서로를 누르고 빼앗으며 살아갔다.
그러다가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면 누가 어쨌는가를 잊어버리고 한 곳에 모여 보이는 곳만 씻고 볼 일 보고 활개를 치러 다시 문을 나섰다.
나는 그들의 사타구니를 수없이 쳐다보았다. 그것들은 신체의 일부가 아닌 듯 외면당하고 있었다. 나는 슬슬 때를 닦으면서 그들이 나를 이렇게 더러운 곳으로 몰아넣은 것을 복수라도 하듯 슬쩍 그것을 건드려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의 다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때를 닦았다. 허벅지를 닦으면서 점점 올라가자 그것은 어느새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쾌감을 느꼈고 때를 먹고사는 나 자신을 위로하게 된 적도 있었다.
세 달간 목욕탕에 있다가 그곳을 나와 여러 곳을 전전했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일도 했고 식당에서 청소도 했고 자동차를 세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한 권씩 책 읽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작가가 되든 안 되는 책을 읽어야할 것 같은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걸식이와 만난 것은 볼링장에서였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쓰러뜨린 핀을 우리는 땀을 흘리며 주웠다.
그의 본성은 착했지만 욱하는 성미 때문에 그의 일은 잘 풀리지 않는 듯 했다. 결국 그는 사람을 찌르고 만 것이었다. 걸식이는 아직까지 복역 중이었다.
녀석은 적전을 바꾼 모양이었다. 저돌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녀석도 많이 지쳐 있었다. 지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흥분은 금물이다. 마지막 회전이니까 피치를 올려야 해. 녀석의 허점을 이용할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나는 오른쪽 주먹을 녀석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 녀석은 몸을 빠르게 움직여 나의 주먹을 피했다. 나는 덕분에 몸의 균형이 헝클어졌다. 내가 다시 손을 뻗으려할 때 녀석의 주먹이 눈 두덩이에 와 박혔다. 다시 한번 고개가 돌아가고 세상이 온통 흰색으로 변한 것과 거의 동시에 눈 위로 근질거리는 액체가 흘러 내려왔다. 나도 주먹을 뻗어 녀석의 복부에 충격을 주어야 하는데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녀석의 약점이 복부라는 사실은 8라운드에 이미 알아차렸었다. 내가 간신히 복부를 갈길 때마다 녀석은 몸을 꺽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힘을 쓸 수 없다.
다시 아나운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네, 이 수민 선수, 고통스러운 표정. 그로키 상태입니다. 코너에서 전혀 손을 뻗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소나기 펀치를 퍼붓고 있는 황상칠. 네 이수민 선수, 정신력은 무척 강하군요."
"저 선수는 말이죠. 아주 끈질긴 선수예요. 저거 보십시오. 맞으면서도 한 방을 노리고 있죠."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이 느껴져 왔다. 입안으로 찜찜한 맛의 액체가 스며들었다. 상대방의 모습이 물 속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형체 없이 흐물거렸다. 혀가 뻣뻣해지고 목이 말랐다. 몸 전체가 자유롭지 못했다. 신경이 끊어진 듯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호흡도 멎고 맥박도 멎는 듯 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온몸이 나른했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하얀 하늘 위로 검은 별들이 쏟아졌다.
얕은 언덕이 멀리 보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황야 한 복판에서 비리가 있는 재벌 기업 회장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먼지가 뽀얗게 안개처럼 피어났다. 재벌기업 회장의 뒷꿈치가 닿은 땅마다 길게 두 줄의 평행선이 그어졌다. 긴 그림자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재벌 기업 회장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언덕에 이르자 몇몇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에 십자가가 있었고 양옆에 각각 하나씩 십자가가 있었다.
그를 십자가에 눕힌 후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 십자가를 세우자 회장은 갖 빨아널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물 같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오른쪽 십자가에는 걸식이가 있었고, 왼쪽 십자가에는 황상칠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오른쪽부터 신포도주를 주었다.
아주 맛있는 것 같은데 수민아, 너도 마셔봐.
걸식이가 말했다.
나는 또 그 신포도주를 회장이 먹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젠 목마르지 않군."
황상칠은 고맙다고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걸식이는 평온해 보였다. 석양에 붉은 빛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제비뽑기를 했다.
나는 세 번째로 걸식이의 옷을 가졌다. 집사는 황상칠의 옷을 가져갔고 사회복지원장은 회장의 붉은 옷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가져갔다.
밤이 되자 우리는 다시 내기를 했다. 세 사람의 부활여부를 가지고 얘기한 끝에 나는 걸식이만 부활할 거라고 장담했다. 대학 교수는 재벌 기업 회장만 부활할 거라고 했다. 샐러리 맨은 황상칠만 부활할 거라고 했다. 로마 병정은 재벌기업 회장과 황상칠이 부활 할거라고 했다. 시인과 신문 기자만이 아무도 부활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듯 말했다.
한 밤 내내 초조했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하는 마음을 생각키웠다.
동이 트자 우리는 동굴로 갔다. 동굴을 막아두었던 커다란 바위가 굴려져 있었다. 모두 긴장했는지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은 어두침침해서 쉽게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둠이 눈에 익게되고 동굴의 윤곽이 대충 드러나게 되었다.
시체들은 모두 있었다. 걸식이의 시체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있었다. 모두들 실망했는지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아련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븐, 에잇, 나인, 텐"
빈 캔버스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조용한 세계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불꺼진 세상은 적막하고 좋았다.
어디서 뚝딱 뚝딱 시계 초침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제자리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글/김흥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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