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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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걸 파괴합니다. 아니라구요? 창조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은 파괴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시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그리운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에 존재했었던 혹은 존재했다고 믿어지는 자신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기억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랑 혹은 그리움이 존재하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또렷이 남아 있는 생각과 감정 상태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시간과 그리움에 대한 영화입니다. 개봉과 동시에 이 시대 클래식으로 등극할(공언하는 바입니다), 리챠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2013, 영국)’입니다.
변변한 여자 친구 한명 없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팀(돔놀 글리슨 분)이라는 소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행운아입니다. 이제 20살의 성년을 넘어 가문의 명령에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리(레이첼 맥아담스 분)를 본 순간 사랑을 느끼고 그녀를 사로잡기 위한 시간 여행을 합니다. 주로 오늘의 실수를 어제의 시간여행으로 되돌려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들이지요. 사실 리챠드 커티스는 여자들의 내면을 더 잘 아는 유일한 남성이라는 찬사를 받는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입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손꼽을 수 있는 장면으로 침실 프로포즈 장면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이벤트를 하지 않아서 좋다는 메리의 대사처럼 여성들은 진심이 담긴 남성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지 결코 이벤트 따위에 마을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명장면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외 결혼식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압권입니다. 폭풍우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결혼식 장면에서 신랑신부를 비롯한 모든 하객들의 웃음이 가득한 즐거운 얼굴은 정지화면과 슬로우 모션으로 교묘하게 편집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이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특히 빨간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비를 피하는 레이첼 맥아담스의 얼굴이 스크린에 꽉 들어찰 때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장면은 아무리 삶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가라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라고 했던 김상용 시인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이 영화는 사랑, 가족,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전작 ‘러브 액츄얼리’에서 여러 가지 사랑의 행적을 담은 그의 영화는 우리들에게 마치 거울과 같은 마법을 겁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의 얼굴이 등장하는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메리를 처음 본 엄마가 말합니다. “참 예쁘구나.” 이어 메리가 “아니요.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래요.” 라고 하자, 한참을 들여다 본 엄마가 다시 말합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두 메리(엄마도 이름이 같지요)의 유쾌한 대사는 마치 애드립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말하고 듣는 이야기의 연장인 것이지요.
유독 이 영화는 부자관계에 주목합니다. 아마도 여성의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를 주로 만든 커티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일 것입니다. 커티스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영화가 반드시 여성에 주목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을 잉태하는 여성을 통해 남성에 관심을 둔 자신의 솔직한 고백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빠 역의 빌 나이(러브 액츄얼리의 우스꽝스러운 그 가수가 맞습니다)가 결혼식 피로연에서 하객들에게 말하는 장면은 사실 커티스 자신의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비슷한 길을 갑니다. 결국 옛 얘기만 늘어놓는 노인이 될 뿐이지요. 하지만 결혼만은 따뜻한 사람과 해야 합니다. 제 아들은 따뜻한 청년입니다. 평생 남자로 살면서 제 남동생과 B.B.King, 그리고 제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저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제 아들의 아버지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아버지다운 사랑이 가득한 말입니까? 언젠가 제가 아들들(저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습니다)의 결혼식에 말을 할 기회가 있다면, 빌 나이의 흉내를 내보려고 합니다(사실 우리 애들은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엄마를 더 좋아하니까요). 커티스 감독의 독백은 또 있습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빠와 함께 팀이 마지막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팀이 어린 시절 함께 걷던 바닷가 산책길이지요. 시간 여행에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이전 시간으로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빠 또한 팀이 태어나면서 제한된 시간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빠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두 번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두 번째 삶에서는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여행입니다. 매일 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더 많이 효도할 걸….” 떠나버린 남편과 아내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독백을 합니다. 부지기수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청춘군상들은 더 많은 후회를 하겠지요.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반복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한 번을 제대로 잘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후회가 남는 생을 살아갑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면, 우리는 과연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함께 걸음’ 3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시간여행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요? 아마도 첫 호를 만들 때의 마음일 겁니다. 사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큰 가치를 위해 어려움을 지탱하신 수많은 기자들께 이번 영화평을 드립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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