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풍경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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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했던 모습들의 사라짐
저는 ‘도시를 걷는 것도 여행이다’는 생각을 갖고 살기 때문에,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의 모든 외출을 ‘여행’이라고 부릅니다. 늘 다니는 길이야 물론 많이 있지만, 가끔씩은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지하철(전철)역을 나와서, 출입구 바깥 풍경을 둘러볼 때가 있습니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듯, 처음 걸어보는 동네의 풍경은 모든 게 새롭습니다. 큰길의 화려함보다는,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체인점 간판 위주로 포장된 길거리보다는, 골목길 안쪽의 풍경을 주로 둘러봅니다. 서민의 삶은 그 좁은 골목길 구석구석에서 고스란히 스미어 숨 쉬고 있기 때문이죠.
아직까지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지역을 특히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억에 새겨진 거리의 모습이 아직도 똑같이 존재한다는 건 너무나 반가운 일이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하다는 것’ 그리고 ‘익숙해진다는 것’은 제 삶이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걸 의미하기에, 그 익숙함 안에서 위로를 받고 휴식을 얻게 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익숙했던 그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많은 추억의 풍경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지고 있기에, 그 풍경 안에 심어두었던 제 삶의 일부분들이 덩달아 사라지는 것 같아 몹시 아쉽네요.
철거가 진행 중인 서울 서대문구의 아현고가도로(사진 1~4)를 바라보면서, 이 아쉬움을 정말 크게 느꼈죠. 서울 시민들의 애환이 가득 담겨 있던 고가도로였기 때문입니다. 아현고가도로는 동쪽으로 서울시청 방면에 정확히 향해 있고, 서쪽으로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라던 신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의 중심과 젊음의 중심을 잇던 고가도로에서 무슨 아쉬움을 느낀다는 걸까요? 각각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그 중간지점, 그러니까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이던 ‘아현’은 그 중심에서 빠져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동네 전체를 가로막고 있던 고가도로가 사라진다면, 이젠 아현동 주민들의 머리 위에도 햇살이 가득 비추게 될까요? 참 안타깝게도 골목골목 가득 다양한 맛집으로 유명했던 역 입구의 아주 넓은 지역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더군요. 공사 준비를 위한 뻥 뚫린 벌판으로 뒤바뀌었고, 조만간에 주상복합이든 뭐든 ‘으리으리한’ 주거공간과 첨단상업시설이 들어설 게 분명합니다. 주인공이 빠지고 주인공이 배제되는 이런 재개발은 도시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은 기억들을 지워버리게 만들고 있죠. 그것이 사라졌다는 사실까지도 잊고 지내야 할 때가 많아진다는 건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빨리빨리’와 ‘여유롭게’의 차이
수십 년 전의 사라짐이라면 무덤덤해지겠지만, 익숙했던 풍경들이 바로 얼마 전에 사라졌다는 걸 새삼 확인해야 할 때는 당혹스럽고 어색해지기까지 합니다. 대표적인 게 종로 거리를 걷다가, 피맛골(사진 5,6) 전체가 사라졌다는 걸 갑자기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반가운 얼굴들과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었던 그 많던 자리들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것, 게다가 해장국으로 유명했던 바로 옆 청진동 골목(사진 7)의 풍경마저 사라졌음을 재확인해야 할 때는 한숨마저 이어지곤 하죠. 젊은 시절 대부분의 만남이 이뤄졌던 종로서적 건물(사진 8) 앞에선, 여전히 그 건물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합니다. ‘종로서적’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지 20년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즐겨 들리던 황학동 벼룩시장(사진 9)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정말 없는 게 없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던 곳이었죠. 지금도 ‘와아!’ 하는 관중의 함성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동대문운동장(사진 10,11) 자리엔 엉뚱한 거대 구조물이 자리를 잡았더군요. 세빛둥둥섬과 함께 대표적인 전시행정으로 지적 받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물이라는데, 볼 때마다 영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더욱이 동대문운동장 자리는 철거 당시 조선시대의 유적이 다수 발견되어 철저한 고증이 필요했다는데, 역사보존보다는 재개발 먼저 강행한 심각한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죠.
4,50대 연령층의 시민들에게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이 ‘뚝섬 경마장’이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 경마장(사진 12)이 있던 자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주상복합건물 2동이 치솟아 위풍당당(?)하게 서 있죠. 서울 중심의 남과 북을 가로지르며 거대한 장벽처럼 위치해 있던 세운상가(사진 13)와 진양상가 등도 철거를 앞두고 있다는데,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서대문구 홍제동의 유진맨숀(사진 14)과 유진상가 지역도 ‘홍제재정비촉진지구’라는 새 명칭을 부여받았던데, 혹시라도 ‘악기상가’로 더 유명한 낙원빌딩(사진 15)마저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물론 변화를 무조건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긍정의 의미로 본다면, 또한 생활의 편의와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명분을 앞세운다면, 당연히 ‘낡은 것’보다는 ‘새 것’이 낫겠죠. 도심 한가운데를 짓누르던 청계고가도로(사진 16)가 사라진 풍경(사진 17)은 시민의 조망권을 되찾아줬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진 17의 풍경과 조망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죠. 이미 초대형 건물들이 순식간에 그 앞으로 가득 들어섰으니까요.
독일의 한 중소도시에서 숙소인 가스트하우스(Gasthaus,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섰을 때, 집 주인이 이 건물은 14세기에 지어진 거라고 소개하던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쪽 벽에는 그동안 이 숙소를 이용했던 세계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연대별로 새겨져 있었죠. 같은 독일로 유학 갔던 한 후배는 자신이 지금 수업을 듣고 있는 강의실과 책걸상이 독일의 대(大)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학생시절 앉았던 책걸상과 강의실 그대로라서, 너무 큰 정신적 감동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헤겔이 1770년생이니까 최소한 1790년대의 대학 건물과 책걸상이 지금도 사용가능하게 보전되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삶의 질은 건축물의 철거와 재건축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보편적 복지의 확충과 도서관 환경의 질적 개선 등의 사회적 인프라가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니까요. ‘빨리빨리’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여유롭게,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사회적 변화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천주교의 성지인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성지의 대성당 건축공사는 100년의 기간을 정해놓고 진행되고 있죠. 지은 지 20년만 지나면 ‘재건축조합 결성’이 당연해지는 아파트 단지들의 현수막은, 지금 우리 시대가 어느 한쪽만 바라보며 무작정 달려가는 삶을 사는지를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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