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떠나는 여행 : 도심 단풍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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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면 산과 들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물들곤 한다. 단풍의 계절이다. 이맘때쯤이면 덕수궁 돌담 길에는 노란 은행잎이 카펫을 연상시키듯 돌담 길을 따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또, 전국 팔도의 유명산에는 알록달록한 차림새의 등산객들이 붉게 물든 자연과 산을 만끽하기 위해 힘찬 걸음을 내딛으며 산을 오른다. 필자 역시 이맘때면 여느 사람들 못지 않게 단풍 구경을 하고 싶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하지만 단풍놀이 가는 일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에겐 어려움이 많다. 과거에 비해 장애인 여행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산이나 바다는 장애인들에게 친절한 여행지가 아니다. 휠체어 사용 장애인에게 산은 말 그대로 산이다. 높고, 거칠며, 두렵고 거대한 장벽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단풍구경을 가려면 꼭 한번은 산으로 가봐야 할 텐데, 그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몇 해전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숲체원에 장애인을 위한 등산로가 생겨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게 말이 되냐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등산을 할 수 있냐며 의문만 던졌다. 우려와 달리 실제 숲체원에 생긴 등산로를 본 사람들은 너나없이 무릎을 탁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등산로였다.
최근에는 장애인이나 노인, 어린이 등의 노약자들도 쉽게 등산을 할 수 있도록 전국 곳곳에 무장애 탐방로가 생겨나고 있다. 등산을 가능하게 하는 무장애 탐방로 또는 무장애 등산로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보행약자 등 등산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단풍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장애 탐방로가 도심 가까운 곳에도 늘어나면서, 장애인들도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단풍 구경을 더욱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관악산 무장애 탐방로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산 좀 타는 등산객이라면 관악산 단풍의 아름다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도심 가까운 산에서 단풍 놀이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관악산이다. 이런 도심 단풍 명소에 이제 휠체어도 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무장애 탐방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2013년 5월 조성된 관악산 무장애 숲길은 장애인 시설 설치 기준을 준수하여 전 구간 경사가 8% 미만이어서 휠체어나 유모차로 등산을 하기에 최적화 되어 있다 관악산 입구에서부터 제1광장을 지나 등산객들을 따라 길을 오르다 보면 ‘책 읽는 쉼터’가 나온다. 이 쉼터를 지나 ‘잣나무 쉼터’까지 조금만 가다 보면 무장애 숲길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커다란 화장실과 안내판이었다. 아무리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라고 해도, 등산을 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특히 전동휠체어처럼 가속이 붙는 경우엔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세심한 주의사항도 있었다. 또 하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눈이 오는 동절기 위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안내였다. 눈이 소복이 쌓인 숲길을 다니는 것도 겨울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만, 자칫 미끄럼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어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전’에 대한 것은 수 백 번 이야기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눈길에 쉽게 미끄러지는 휠체어의 겨울 산행을 염려하는 것 또한 안전을 위해서라 생각하니, 관악산 무장애 숲길은 자연과 사람이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장애 숲길은 입구에서부터는 2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순환형 숲길(1구간)과 등반형 숲길(2구간)이 있다. 순환형 숲길은 등반형 숲길에 비해 구간이 더 짧고 완만하다. 이어 이 두 구간은 바위 쉼터가 있는 중간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바위 쉼터에는 커다란 바위가 사랑표처럼 생겨 ‘하트바위’로 불리는데, 그 모양만큼이나 등산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포토존이 바로 이 곳이다.
무장애 숲길은 바위쉼터에서 다시 길이 합쳐진 다음 전망쉼터까지 하나의 길로 이어지게 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쉽게 등반 할 수 있도록 지그재그 형태의 숲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또, 무장애 숲길 중간에 거대한 나무가 툭 튀어 오른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이 지나는 길을 방해한다고 마구잡이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보다 조금은 돌아가거나 거슬리더라도 자연과 사람이 공존 할 수 있게 숲길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섬세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단풍놀이를 위해 방문했던 관악산 무장애 숲길에서 놀라운 것을 또 하나 발견했다. 그 동안 휠체어를 위한 편의시설에 포커스를 두다 보니 다른 장애 유형이 여행을 하는데 어떤 것들이 필요 하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5개 장애 유형 중 (뇌병변장애를 포함한)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체장애인 중심의 편의시설들을 관찰하느라 다른 부분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시각장애인들의 등산을 위한 점자 핸드레일이었다. 핸드레일 여러 곳에 점자 안내판이 있어 시각장애인들도 자연과 산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보행이 어려운 노인이나 어린이, 어쩌면 누구든지 중간 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쉼터가 많았다. 덕분에 거친 숨을 내몰아 쉬는 사람도, 걸림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일도, 앉을 곳이 없어 힘들어 하는 사람도 없는 진정한 무장애 숲길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장애 숲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나무와 숲, 자연과 경치를 너무나 편안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필자 역시 그러했다. 단풍이 절정이던 어느 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연히 관악산에 올랐다. 돌이 많은 흙 길도 아니어서 염려할 필요도 없었고, 가파른 아스팔트 길도 아니어서 넘어질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무장애 숲길을 지나 다니는 그 순간만큼은 바닥에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휠체어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부서지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고, 한번씩 부는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을 맞으며 비로소 단풍 구경을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초록 소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는 곧 겨울이 올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다. 필자가 관악산 무장애 숲길에 있는 그 동안만큼은 어떤 장벽도 장애물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근심걱정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하트바위를 지나고 전망쉼터로 가는 지그재그형 길을 가고 있었다. 필자 앞에는 화려한 등산복을 입고 아이젠(등산스틱) 두 개를 들고 가는 두 명의 등산객이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거리며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 가자 그들이 힐끔 필자를 쳐다보곤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그들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여기가 무슨 무장애 등산로라고 하더니, 진짜로 휠체어 탄 사람이 오네~”
“아 그런 거였어? 어쩐지 길이 참 잘 닦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휠체어도 오고 노인도 오고 여러 사람 다 사용하라고 만든 것인가 봐. 좋네~”
행여 필자가 들을까 두 등산객은 소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했지만, 필자의 귀에 두 사람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필자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이 여행하는 일, 더욱이 혼자 여행하는 일은 여전히 모두에게 생소하다. 그런 장애인이 아무렇지 않게,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등산객 뒤를 따라 가고 있는 풍경이 그들에게도 조금 낯설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필자가 관악산 무장애 숲길을 방문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지는 않았을까 내심 생각해보았다.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등산을 해?’, ‘장애인이 혼자서 산에 오르다니 말이 안돼’라는 이야기가, ‘어머. 휠체어 타도 등산을 할 수 있더라’, ‘관악산에 갔더니 무장애 등산로가 있어서 휠체어 탄 사람도 오고 그러더라’는 식의 전환이 일어나리라 기대해보았다. 인식의 전환, 행동의 수정, 나아가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등산 그리고 여행이 가능해지려면 입에서 전해지는 말 한마디부터 변화가 가장 우선이지 않을까. 두 등산객을 따라 올라가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인식의 전환은 비장애인이나 등산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식전환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산이 많다. 등산(트래킹)을 하기에 아주 탁월한 지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이나 노인처럼 보행약자에게는 등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일부 산악지형에 무장애 등산로를 조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산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회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휠체어를 타고 어떻게 등산을 할 수 있어요’라는 생각보다 ‘휠체어를 타고도 등산을 할 수 있어요’라는 인식의 전환. 그 인식에서부터 스스로 한 발짝 움직여본다면 휠체어로 단풍 구경을 갈 수 있는 산이 우리나라에 더 많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인식의 전환과 행동, 기대감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나라도 스위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처럼 산 정상까지 휠체어가 오를 수 있게 되거나, 독일 아이브제 지역처럼 휠체어, 유모차, 자전거가 둘레길 전체를 다닐 수 있는 날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날이 오려면, 장애가 있더라도 더 많이 단풍구경을 즐기고 산을 가까이하며 자연과 함께 되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럼, 이번 11월에는 관악산 무장애 숲길로 단풍 구경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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