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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무관심이 힘이 될 때

느림보 엄마의 성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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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가 바다에서 놀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이정화)
 
서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 서호와 마찬가지로 자폐가 있는 둘째 서희는 아기 때부터 제주도, 일본, 대만까지 다녀왔는데, 서호와는 아직 시도를 못 해 보았다. 서호와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몇 번 시도 한다면 서호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 가족은 이미 여행과 관련하여 작은 장애물들을 차례로 넘어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서호가 다섯 살 무렵에는 일상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강박이 최고조였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집에서 유치원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짧은 길 이외에 모든 길을 걸어가는 것을 거부했었다.
 
집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에 1층 공동현관으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돌면 유치원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돌면 집 근처 슈퍼마켓을 가는 길이다. 그런데 내가 서호 손을 잡고 왼쪽으로 돌기만 해도 서호가 자지러지게 울면서 바닥에 누워 발을 굴렀다. 그리고 유치원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외에 나머지 길은 모두 차를 타고 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서호의 이런 행동을 걷기 싫어서 하는 ‘고집 피우기’ 정도로 생각해서 억지로 고치려고 혼내 보기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얘를 뭐로 꾀어서 걷게 하나 고민을 하다가, 집 주변에 서호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들을 찾아보았다. 지하철 역사 안에 던킨도너츠, 절편과 꿀떡을 파는 떡집,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모두 걸어서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공작은 집을 나서기 전부터 시작된다.
 
“서호야, 도넛 먹을까?”
“도넛!”
“그럼, 엄마랑 도넛 사러 가자.”
 
요렇게 꼬셔서 신발을 신기고 나선다. 그래도 공동현관으로 나와서 왼쪽으로 도는 순간 서호는 울면서 누우려고 몸을 튼다.
 
“서호야, 도넛 도넛! 도넛 먹으러 가야지.”
 
이렇게 상기시켜 주면 그래도 울음을 그치고 일어난다. 그런데 일어나서 좀 걷나 싶으면 주차 시켜 놓은 차 앞으로 달려간다. 차 문을 열려고 덜컥덜컥하고 있는 서호 손을 잡아끌면서 도넛을 주문처럼 말하면서 간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혼자서 뛰면 3분 안에도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서호 손을 잡고 도넛 먹자고 중얼거리면서 갈 때는 몇십 분을 가는 기분이다. 가는 길에 본인 눈에 들어오는 뭔가가 있으면 서호가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갈 수 있어서 손을 꽉 잡고 가는데 손에도 머리에도 땀이 줄줄 난다.
 
그래도 지하철이 보이면 그때부터는 쉽다. 서호는 지하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신나서 계단을 내려가면 도넛 가게가 바로 보이고, 도넛을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짧은 모험이 끝난다. 도넛 가게를 몇 번 잘 다녀오고 나서 떡집을 갔고, 빵집도 가고,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매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자고 하는 서호 때문에 조금 괴로울 지경이 되었다. 뭐든 중간이 없는 우리 막내다.
 
△퍼스트가든에서 뛰어다니는 서호의 모습 (사진제공. 이정화)
 
서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나온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나도 서호와의 외출이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서호가 길에 누워서 울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거나, 반대로 우울해서 같이 울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몇 번 겪으니 그냥 옆에 주저앉아서 그칠 때까지 달래는 여유가 생겼다.
 
울 때는 달래서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많이 걷게 되어 서호와 갈 수 있는 곳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이제는 도넛 가게보다 훨씬 먼 호수공원까지도 걸어서 서호와 갈 수도 있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조금 먼 거리도 수월하게 이동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문제가 사라지니 이제 여행을 좀 다닐만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났는데 그것은 낯선 곳에서 ‘잠자기’였다. 내가 속해 있는 자갈자갈사회적협동조합에서는 철마다 발달장애 가족들이 모여 자조 모임 겸 여행을 가는데, 서호는 잠잘 시간만 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차에 타서 내리지 않으려고 했다.
 
저녁까지 잘 놀다가 잘 시간이 되면 이러니, 함께 여행하러 온 다른 부모님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서호를 달래는 시간이 괴로웠다. 그리고 겨우 달래서 숙소에 들어가면 자꾸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해서(아마도 집에 돌아가겠다는 뜻이었을 듯) 숙소 현관이 이중 잠금이 아니고 안에서 밀기만 하면 문이 열리는 형태일 때에는 자는 사이 서호가 미아가 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밤중에 서호가 나가지 못하도록 숙소의 가구를 옮겨서 문 앞을 막아놓고 잠들기도 했었다(아직도 이 행동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서 여행을 가면 현관을 꼭 잠그고 잔다).
 
세 번째 여행의 장애물은 ‘화장실 이용’이다. 서호는 낯선 장소에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장거리 여행을 할 때 휴게소에서 볼일을 볼 때나, 식당에서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때 힘이 많이 든다. 화장실을 가지 않고 참다가 실수할 때도 종종 있다. 같은 장소를 몇 번 가서 그 장소가 익숙해지면 그 후부터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에 가면 꼭 같이 화장실도 가본다.
 
서호가 여행 가는 데에 이렇게 어려운 점이 많은데 굳이 데리고 여행을 가야 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서호가 다양한 장소를 갈 수 있게 되면서 그 장소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익혀가는 것을 보면, 또 함께 여행 가는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조금씩 어울리는 모습들을 보면 더 노력해야겠구나 싶다. 
 
그러니까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발달장애인으로 인해 불편함이 발생하더라도 ‘저 사람/가족은 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라는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힘든 상황에서 본인도 가족들도 많이 노력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가져주면 좋겠다.
 
힐난하거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안 그래도 힘든 사람들 마음 할퀴지 말고. 내가 서호랑 여행하면 뭐가 힘들다, 뭐가 힘들다 이것저것 적었지만 제일 힘든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부정적이고 노골적인 시선들이 저 위에 적어놓은 어려움을 다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마음을 힘들게 하니까. 서호와 여행을 가는 이상 몸이 힘들 것은 기정사실이고, 마음이라도 덜 힘들면 좋겠다. 이번 가족 여행에서는 타인들로부터 “친절한 무관심”을 많이 받고 싶다. 
작성자글과 사진. 이정화 자갈자갈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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