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스토리를 실은 신파, 현재진행형인 인식과 문제들에 날개를 달아 주다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영화 코다(CODA, 2021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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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_션 헤이더 / 출연_에밀리아 존스, 퍼디아 월시 필로, 에우헤니오 데르베스, 말리 매트린 외. / 미국 | 드라마 | 2021.08.31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 112분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은 내 정체성은 내 의지보다는 생득적으로 가지게 되는 ‘여성’, ‘황인종’, 그리고 ‘선천성 뇌성마비’였다. 지금은 더 많은 단어들이 덧붙여져 나를 설명해주고 규정짓는 정체성이 되어 주고 있다. 이처럼 ‘사회 속에서’, 또 ‘세상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나를 규정하고 정체성화 시키는 단어들은 무수히 많다.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역시 이 단어들 중 하나이며, 영화 <코다>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낯선 이 단어를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혹여 ‘코다’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인다. ‘Child Of Deaf Adult’의 약자로, 부모 중 1명이나 둘 다 농인이거나 보호자가 농인이어서 그에 의해 양육된 자녀를 말한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이 글에서는 ‘코다’라는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개인적으로 ‘장애인’이나 ‘코다’라는 단어처럼 개인의 특성 중 하나를 집단화 해 부르는 단어들을 공적인 글에서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코다’는 분명히 개인의 정체성이고, 이를 당당히 내세우는 것은 멋지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고 다름을 ‘그들’이라는 이질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협함을 합리화하는 단어로 둔갑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코다>라는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부감이 먼저 들었고, 결정적으로 제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가 극장으로 가는 발목과 마음을 멈칫하게 했다.
역시나 스토리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루비’라는 소녀가 있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랑도 하고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고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많은 ‘17세’이다. 그러나 자신 외에 부모님과 오빠 모두가 농인인 ‘루비’는 그 또래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가족과 세상의 소통을 돕고 생계를 위해 아빠와 오빠를 따라 고깃배를 타고 수어로 통역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가족의 보호자이자 통역사, 대리인 등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루비’의 몸에서는 늘 비린내가 났고, 친구들 앞에서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했던 것이다. 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만큼의 성숙한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아이들은 ‘루비’를 조롱하고 혐오한다. 따돌림은 따라붙는 수순이여서 ‘루비’의 학교 친구라고는 한 명뿐이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가 떠오르는 순간이 바로 이런 걸까?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 얼떨결에 방과 후 활동으로 합창단에 등록하게 되는데, 노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또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 그런 ‘루비’의 마음과 숨겨진 재능을 알아 본 음악선생님은 버클리음악대학교 입학오디션을 보지 않겠나며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한편 ‘루비’의 가족에게도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아빠와 오빠가 문제를 제기해 지역 수산물 직판조합을 새로 조직해 시작하게 되었다. 이 일에서 수어 통역은 절대적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루비’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필 이때 오디션을 준비하겠다는 ‘루비’를, 그것도 가족이 직접 소통하고 향유하기는 어려울 것만 같은 음악을 하겠다니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 건지, 또 우리와 멀어지는 건 아닌지, ‘루비’가 떠나면 우리는 어떡하나? 등등의 불안과 두려움이 섞인 걱정 말이다. ‘루비’ 부모 입장에서의 반대는 당연히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돼 있으리라고 나는 보았다.
한편 ‘루비’ 입장에서도 생각해봤다. 가족의 통역사이자 보호자 역할을 지금껏 해 온 ‘루비’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이제 막 알게 되었다. 여기에 재능까지 있다. ‘루비’의 심정이 어떨지, 그 절실함이 얼마만큼일지는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관객들이 ‘루비’편에 서서 성장의 순간순간을 응원하는 것, 성장의 정점에 선 모습을 지켜보며 감동받는 것 역시 당연하다. 이것이 성장스토리만이 가진 매력이고 힘이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루비’보다는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고, 감동보다는 착잡하고 아려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랬을까?
“언제 그 애가 아기인 적이 있었어?”
‘루비’를 안쓰러워하는 아빠의 마음이 읽혀지는 한마디였다. 그렇다. 농인 자녀 중 ‘루비’와 같은 청인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수어로 통역해야 한다. 은행은 물론이고 병원, 부동산 등을 부모와 함께 다니며 어른의 말을 수어로 옮겨야 했고, 부모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혼자 듣고 삼켜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래들의 말과 놀이보다 어른의 말과 세상을 먼저 알았고 익숙하다. 이런 딸에게 ‘루비’ 부모가 가진 마음은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통증을 동반하는 아림일 것이다.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공감하는 만큼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일까? 이 영화의 제작국인 미국은 일상에서 개인이 수어통역지원서비스를 활동지원서비스처럼 받을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생인 경우 학교나 일상생활에서 수어통역지원서비스가 법제화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많은 농인들이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1998년 이후 ‘수어통역센터’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수어통역을 지원받을 수 있는 체계로써, 활동지원의 지원체계와는 다른 형태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특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활동지원과 의사소통지원은 성격이 다르고, 지원인력에 대한 단가의 격차가 커서 활동지원 형태로 전문수어통역사를 지원받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김철환,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활동가). 이 영화에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미국 역시 이런 문제들로 수어통역지원이 일상 속에서 보편화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수어통역서비스가 보편적 지원으로 인식되고 체계가 갖춰져 있다면, 어린 자녀를 보호자로, 대리인으로, 통역사로 함께 다니며 이들의 놀 권리, 아이의 속도로 성장하고 발달할 시간과 권리를 어느 부모가 빼앗고 싶겠는가. 더욱이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찾았고 그 길을 위해 부모 곁을 떠나겠다는 딸에게 “네가 떠나면 우린 어떡해?”라며 아이처럼 매달리듯 반대하는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있을 뿐, 이런 부모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은 단 한 마디의 대사로도, 단 하나의 에피소드나 장면으로도 정확히 언급해주지 않은 채, ‘루비’의 관점에서만, 그의 희생과 이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스토리로 풀어내는 시퀀스와 결말에 관객들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을까? 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되새기며 자리를 떠났을까?
“그 사람들이 농인과 상대하는 법을 배우게 해.”
‘루비’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 곁에 있겠다고 하자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함과 분노가 섞여 나온 말이었다. 이 말이 내 귀에는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에서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로 들렸다. 오빠의 평소 생각이 폭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폭발의 배경이 된 사건이 있다. 판매권을 빼앗긴 조합의 신고로 출동한 해경의 경고음과 탑승 요청에 불응하고, 장애로 인해 부실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선박을 운행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선박운행 정지를 처벌 받는다. 다시 선박을 운행하려면 어떡해야 하냐는 아빠의 질문을 통역하는 ‘루비’의 물음에, 판사는 귀가 들리는 사람과 항상 동승해야 하고 무전응답 및 경적소리에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을 청인인 동생의 수어 통역으로 전달받아야만 하는, 동생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결의 답도 청인인 동생의 선택에 달려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동안 이런 일들을 수없이 겪었겠지만, 이번엔 동생의 꿈을 포기해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여서 더 화가 나고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빠의 분노, 그 배경에는 관심 없다는 듯, 학교 콘서트에서 비로소 ‘루비’의 음악적 재능을 실감하고 돌아온 아빠와 엄마가 고민하는 모습, 오디션에 도전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가족, 특히 아빠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춘다. 이러면서 영화는 정작 보여줘야 할 이야기, 법원에는 수어통역사가 반드시 배치되어 있어야 하고, 청각장애를 가진 어부들도 조업을 할 수 있다는 인식과 환경, 이를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등의 비장애 중심의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당연히 갖춰져야 하는 최소한의 것들을 놓쳐버리고, 장애 당사자와 그 가족이 감내해야할 문제, 개인이 극복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돌려버린다.
‘코다’라는 정체성
휴먼 성장스토리가 한 사람과 그가 가진 어떤 낯설고 특별한 부분을 친숙하게 느끼고 가깝게 다가서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거의가 신파의 극적 장치가 더해진다는 것이다, 신파는 태생적으로 기존 인식과 문제들을 뛰어넘으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극적 요소로 활용해 감성을 자극시키려 애쓸 뿐. 그래서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닌 이처럼 한 개인을 통해 그가 가진 사회 문제나 소수자성에 대해 풀어내려는 것은 몹시 조심스럽고 위험한 플롯일 수 있다. 즉 농인의 청인 자녀로써의 역할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루비’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그릇으로는 적절하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이고 근본적인 것, 가족의 소수자성인 장애 인식과 이로 인한 현재진형 중인 문제들을 담기에는 너무 고전적인 그릇을 택했다는 말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누군가가 가족이며, 가족의 희생이 전제된 일상일 수밖에 없는 고전적인 이미지에서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장애는 개인의 문제이며 당사자와 그 가족이 감내해야 할,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기존 인식이 영화 속에 깊숙이 깔려 있고, 이것이 신파를 타고 관객의 이성 보다는 감성을 좀 더 자극하는 장애를 대상화하는 수많은 영화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루비’가 떠난 후 가족이 겪을 달라지지 않은 비장애 중심의 현실이 더 무겁게 와 닿아 ‘루비’의 성장을 즐겁게 흐뭇하게만 지켜볼 수 없는,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는 1인으로 남고 싶어졌다.
결국 ‘루비’는 가족의 응원 속에 버클리음악대학교 오디션을 보게 되고 오디션 무대에 올라 가족들도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느낄 수 있도록 ‘Both Sides Now'의 가사를 수어로 옮기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 순간 가족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음악을 느끼고 함께 호흡하고 있음이 전해진다. 이제 ’루비‘는 농인과 청인 사이에서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 길에서 자신의 의지로 이탈해 양쪽을 모두 인정하고 볼 수 있는 ’코다‘라는 정체성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가족 속에 내가’ 아닌, ‘나’, 그리고 ‘가족’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깨닫게 되는 성장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생겼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착잡하고 아리는 것들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영화이다.
P.S.
21세기 영화인데, 20세기 초기의 단어로 번역을?
‘장님’, ‘벙어리’ 등 장애비하용어를 번역에서 그대로 쓰고 있다. 아무리 어감을 자연스럽고 맛깔라게 번역하려 했다고 하더라도 단어가 의미하는 당사자를 비하하고 조롱의 대상으로 보는 상처를 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고 1차적인 차별이다. 무엇보다 올바른 단어를 친숙하고 익숙하게 만들어야 할 공적 글이라는 점에서 지적해본다.
‘가치 봄 영화’ 버전이 없어서 시・청각장애 뿐만 아니라 발달장애를 가진 관객들은 볼 수가 없다.
그나마 청각장애를 가진 관객들은 외국영화라 자막을 이용해 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시각장애를 가졌거나 발달장애를 가진 관객들은 화면해설 버전도 없고 자막으로나 음성으로 쉬운 단어로 표기되거나 상황을 쉽게 설명하는 보조장치나 보조화면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이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근본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제기했던 차별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장애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문제이다.
작성자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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