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 속 장애인에 대한 인식, 과거의 그림자일 뿐일까? > 현재 칼럼


전래동화 속 장애인에 대한 인식, 과거의 그림자일 뿐일까?

장애 코드로 문화 읽기

본문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OOO이(가) 살았답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고, 애니메이션에서 보고, 자장가처럼 들었던 이야기들의 첫 문장은 늘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래동화는 이처럼 아주 옛날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현시점에서, 또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각색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사회체제에서 비롯된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인식이 담길 여지가 많다.
 
그래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전래동화 대부분은 왕과 귀족이 통치하는 시대가 배경이 되고,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그리고 귀족들이 주인공이며, 이들의 욕망과 체제의 결속과 유지를 다지기 위한 스토리텔링이, 기본 골격이 되는 사랑 이야기가 많다. 이런 동화 속 세상에서는 화려한 성이나 궁궐에,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날씬한 몸, 하얀 피부를 가진 세상이 칭송하는 미모의 공주가 살고 있고,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는 건장하고 잘생긴 왕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시샘하고 방해하는 음흉하고 괴기스러운 마녀와 그녀를 돕는 조력자들이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세상이 규정하는 정상성과는 다른 얼굴과 몸을 가졌고, 주인공들의 흰 피부와 대비되게 어두운 피부로 채색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런 악당들의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졌다. 이들을 직접적으로 괴물이라고 조롱하고 혐오하며 험악하게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불쾌했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안데르센동화나 이솝우화, 그림형제의 동화와 우리나라 전래동화 등 구전동화에 흥미를 잃어갔고, 이 불쾌감을 다른 아이들은 잘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저 아이들과 다른가 싶어지면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된 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어떤 경로로 이런 모습으로 재현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늘 따라다녔던 것 같다.
 
 
배제와 분리, 배척받는 사람들
 
당시 내가 느낀 불쾌감과 의문들은, 백설공주는 왜 마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고 사랑해준 난쟁이(왜소증 장애)들을 두고 왕자를 선택했을까? 인어공주는 왜 지느러미를 가진 자기 모습을 왕자 앞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빼앗기면서까지 두 다리로 걷고 싶어 했을까? 심청의 아버지는 왜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을 팔아서라도 눈을 뜨고 싶었고, 눈을 뜨게 되는 결말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무엇보다 이것이 해피엔딩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안데르센동화 <빨간 구두>의 카렌의 발이 잘리도록 유혹하는 늙은 군인은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목발을 짚고 있고,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도 목발을 짚었다. 이 마녀는 시각장애도 있어서 헨젤을 잡아먹으려고 살이 쪘는지 알아보기 위해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부분을 읽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처럼 착하고 예쁜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속여 죽이려는 악당들은 대부분이 흉측한 괴물이거나 다른 몸을 가졌고, 이 다른 몸은 장애를 가졌거나 상처 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심지어 어눌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악당들은 악당 내에서도 조롱과 무시를 당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보면 <혹부리 영감>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 작품에서 장애는 흉한 것, 추한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특히 <코 없는 할아버지와 입 큰 할머니>에서 자신들의 장애를 숨기려고 초와 실을 이용해 위장하고 친구의 환갑잔치에 간다. 물론 이 장면은 마음이 중요함을 전하기 위한 개연적 에피소드였지만, 장애는 장애 당사자에게도 추하고 흉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전제가 내재된 것이다.
 
전래동화에서 보편적으로 설정되는 인물의 면면이나 이들의 관계성을 살펴보면, 세상이 정상성이라고 보는 시선에서는 조금 다르고 상대적 소수라 존재감이 약한 인종이나 계급, 그리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 특히 장애가 있는 생명에 대한 편향적이고 차별적인 인식이 보편성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어느 누구나 거부감 없이 순응하도록 단순한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의 서사를 선택하고, 선함과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세워, 특히 장애에 대한 혐오와 배척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 스테레오타입을 전파해 왔다.
 
이런 서사와 외적인 면을 중시하는 세상의 시선이 만났을 때, 장애가 있는 인물이 기득권의 상상에 어떤 영감을 주었을지는 자명해진다. 장애는 추한 것이어서 죄나 저주의 산물로 상징화하기 위해, 가족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이 앞에 당당히 드러낼 수도, 나설 수도 없는 것, 극혐의 이미지로 그려내 장애에 대한 자존감을 약화시키는 플롯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개연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장애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일부를 내어주어서라도 설사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는 주인공들의 선택을 지지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보다 마법이나 주술, 기도 등으로 장애가 사라지는 결말을 최고의 해피엔딩으로 칭송하는 것은 비장애인의 우월감과 다름을 배척하는 정서를 전파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이지 않는가?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이 대중의 장애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이 없는 사람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난쟁이들(왜소증 장애)은 이름이 없다. 그저 난쟁이로 불릴 뿐이다. 그림형제의 원작에서 난쟁이들은 백설공주에게 이름을 묻지만, 백설공주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독자도 이들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고,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고전문학을 동화와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다양한 버전으로 각색해 만들어지고 있는 <노트르담의 꼽추>의 모든 버전에서 주인공의 이름, 콰지모도는 ‘괴물’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한 번도 다른 이름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름이 학대와 조롱의 이유가 되고 그의 장애는 저주받은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상징화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 <반쪽이>, <코 없는 할아버지와 입 큰 할머니>, <귀신 잡는 장님> 등의 장애 캐릭터들의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설정된다. 심지어 <효녀 심청전>에서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는 이름이 있음에도 심봉사로 불리며 독자들도 거의 그렇게 기억한다.
 
이 작품들 외에도 대부분 작품에서 장애가 있는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그저 장애명이나 장애로 인한 외견상의 특성이 이름이 되고, 이름에 담긴 조롱과 멸시, 편견의 시선을 그저 착하고 순박해 감내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들의 이름에 부여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왜 이들의 이름이 불쾌한지를 생각해 보면, 이들에 대한 내재된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인 감정을, 또 이로 인한 조롱과 혐오를 자연스럽게 용인케 하는 기제가 되고, 특히 이름은 정체성, 즉 자신을 인식하는 결정적인 기제로써, 자신을 장애라는 겉피에 가두어 자기결정권이나 욕구, 욕망을 절제하도록, 또 고립된 삶이 당연시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 아닐까? 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어지는 서사의 핵심은 단절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난쟁이들은 광부로 열심히 일하며 서로 돕고 살아가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깊은 산속 작은 집에서 그들끼리 살아간다. <노트르담의 꼽추>의 콰지모도 역시 괴물의 모습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성의 종탑에 갇혀 살았다. 시간 맞춰 종을 치는 일 외에, 괴물로 태어난 것은 죄이며 용서받으려면 세상과 단절하고 성경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프롤로 영주의 말에 순응하며, 그래서 사람을 만나지도 어울리지도 못하는 감금 생활을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이뿐인가. 그림형제의 <미녀와 야수>에서도 주인공이 저주받아 야수로 변한 후 그저 야수로 불리며, 야수로 변한 자기 모습이 혐오스러워 거울도 보지 않는다. 어둡고 음침한 성에서 숨어 살며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을 자처할 만큼 자존감이 약해져 있다. 야수로 변하면서 성격도 괴팍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말 걸기가 무섭고, 소통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렇게 이름이 없고,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존재감 없는 사람들로 연결된다. 이를 사회학 용어로 ‘Subaltern'(서발턴)이라고 한다. 이름이 곧 사회적 약자라는 낙인과 정체성으로 연결되는 이들. 당사자들 역시도 이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전래동화 속에서 장애가 있는 인물들의 이름은 대중들이 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에, 또 장애 당사자들의 자존감에도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주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이 저항 없이 은둔과 고립에 순응하며 심지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간다. 이런 장면들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분리와 배제, 배척의 정당함을 설파하는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며, 다름과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훼손하고 부정하는 인식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주었는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 의식도 약화시켜 온, 가장 직접적이고 1차적 메신저였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장애와 사랑이 결합할 때
 
어릴 때, <효녀 심청>을 읽으면서 심학규와 뺑덕어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뺑덕어멈의 온갖 포악과 구박을 당하면서도 자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심학규, 그러나 결국 그의 전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는 뺑덕어멈. 어린 마음에도 뺑덕어멈도 나빴지만, 심학규가 더 한심했다. 전 재산을 빼앗기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필요로 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공감되지 않는다. <벙어리 삼룡이>는 장애와 사랑이 결합된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정형성의 정점이다. 아씨는 삼룡이에게 사랑이 아닌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다. 그런 아씨를 사랑하는 삼룡이는 바라만 보아도 좋고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아씨를 지켜주기만 하는 지고지순하고 순애보적 사랑을 보여준다. 결국 삼룡이는 남편의 구타에 죽은 아씨에 곁에서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숭고한 사랑이라고 독자들은 인식한다. 이런 장면들과 결말을 목도할 때면 세상은 장애가 있는 사람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내가 읽었던 동화들에서는 부정적인 답만을 주는 것 같아 불쾌했다.
 
서양의 전래동화들 역시 이런 정형성을 벗어나지는 못 한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 백설공주는 처음 본 왕자와의 키스 한 번으로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조금의 미련도 없이 난쟁이들의 오두막집을 떠난다. 난쟁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백설공주는 자신들을 이용만 한 굉장히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행복과 사랑을 위해 당연하다는 듯 행복하게 떠나보낸다. 특히 백설공주가 성인 남자들을 아이처럼 대하는 모습, 그들에게 조금의 이성적인 매력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난쟁이들은 그녀를 보며 설레한다. 이는 장애와 사랑, 성의 정형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아이로 인식하고 대하는 태도는 장애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그대로 옮겨왔다. <인어공주>나 <노트르담의 꼽추> 등 장애와 사랑, 성의 서사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정형성과 장애 차별적인 인식의 틀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처럼 고전문학이나 전래동화에서 장애가 있는 인물과 사랑이야기가 결합되면, 장애 캐릭터의 정형성은 뚜렷해진다. 자신의 사랑은 숨기고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며 행복해하거나 이용만 당하다 죽거나 버림받는 캐릭터다. 이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것인 양 순응하거나, 감동 서사로 포장되어 사랑의 숭고함과 순수함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이다. 즉 장애가 있는 캐릭터의 해바라기 사랑은, 이 둘은 절대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없는 관계라는 선긋기이고 비장애인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가장 극적인 효과로 활용된다.
 
 
전래동화 리터러시가, 장애 차별적 시선을 깨는 상상과 영감에 날개를 달아주길
 
현재,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도 많고, 제작 중이거나 기획 단계에 있는 작품들도 많다. 이 중 올해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인 동화 <피터팬>을 실사영화로 리메이크한 <피터팬과 웬디>는 내가 가장 기대하는 작품 중 하나다. 특히 시각과 절단 장애가 있는 후크선장을 어떤 새로운 인물로 구현해 낼지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된다. 원작에서 후크는 선장이라는 위치적 시선 때문이었는지, 대부분 대중에게 그저 후크선장으로 불리고 기억되며, 이 점은 장애 관점에서의 리터러시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개중에는 후크선장을 장애가 있는 사람을 악당의 이미지로 인식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로 들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후크선장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 가깝다. 그는 악어에게 물린 트라우마로 인해 악어가 삼킨 시계 소리에 공포를 느끼고 원인 제공자인 피터팬에게 집착하는, 장애가 악당성의 주요 기제가 되는 다른 캐릭터와는 차별화된다. 악당이긴 한데, 이해와 공감이 되는 다면적인 인물이다. 원작의 이 점을 놓지 않는, 그래서 다름을 나와 다른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나라는 인식을 전하는 인물로 재현해내는 것이 이 영화의 성취가 되어야 한다.
 
이 점은 디즈니가 실사영화로 기획 중인 <백설공주>에 대한 피터 딘클리지의 비판과도 맥을 같이 한다. 디즈니는 라틴계 배우를 백설공주로 캐스팅한 것을 중점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인종으로 재현된 백설공주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백인 중심의 세계관과 사고에 태클 걸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이것 못지않게 어떤 인물,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이를 성취하는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곱 난쟁이는 여전히 동굴에서 산다는 설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을 사회로부터 고립과 분리, 배제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며, 백설공주의 사랑이 이뤄지도록 돕는 들러리로 굳어져. 사랑과 삶 모두에 수동적인 인물들로 묘사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는 의미인 것 같아 충분히 타당해 보이는 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래동화 속 공주들의 정형성을 깬 작품으로 평가받는 <슈렉>의 피오나 공주는 저주가 풀렸을 때 여전히 오거여서 사랑스러웠지만, 이런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는 또 슈렉의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라는 말 한마디에 겨우 안도하고 받아들이는 그녀 역시 실망스럽다. 또한 물거품으로 소멸하는 결말의 동화와는 다른 결말을 선택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에리얼공주(인어공주)가 왕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마녀가 죽은 후 저주가 풀려 목소리를 되찾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고 난 후였다. 이뿐인가. 1959년 제작한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원작과 달리 난쟁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외 모든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난쟁이들을 산속 오두막집에서 그들끼리 살며, 아이 대하는 듯한 말투와 태도로 일관하고, 왕자와 미련 없이 떠나는 백설공주를 마냥 신나게 행복하게 떠나보내는 모습이 재현될 뿐이었다. 이런 장면,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의 인식 속에 장애 차별적 인식의 그림자가 얼마나 깊고 넓게 드리워져 있을까?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전래동화들 속에서도 장애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전하는 작품들도 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반쪽이>가 이 중 하나다. 동화를 읽기 전에는 제목이 장애를 비하하는 것 같아서 거슬렸는데, 그가 가진 장애를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 장애 차별과 맞서는 이야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곰돌이 푸>도 이요라는 캐릭터 관점에서 동화를 보면 이 작품의 다름을 대하는 시선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동화들을 발견하게 되는 전래동화 리터러시, 우리가 어린 시절 흥미롭게만 읽었던 전래동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해보고 비평하는 리터러시는 어린 시절부터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 지향하는 것들의 사고를 이완시켜 줄 것이다. 특히 다른 존재에 대한 의식, 이 중에서도 장애라는 카테고리로 현재의 인식과 장애학적 관점에서의 전래동화 리터러시는, 현재의 장애에 대한 시선이나 의식 방향에, 또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의 역발상적인 상상과 창조를 돕는 데 긍정적인 영감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라 확신한다.
 
덧붙임: ‘난쟁이’가 왜소증 장애의 비하 지칭임을 알면서도, 원작의 호칭 문제를 잘 드러내기 위해 그대로를 옮겨 사용했습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작성자글.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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